제29화
제29화 참초제근 (1)
이리엘은 성 밖 구릉에서 체즈웬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흐음.”
모포 안에서 잠든 베론이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척였다. 그녀는 그런 베론을 토닥여 주었다.
둘은 암살이 끝나는 대로 체즈웬성을 떠날 수 있게 미리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한 대비이기도 했다.
베론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이리엘은 다시금 체즈웬성에 시선을 두었다.
깃발이 꽂힌 첨탑은 아직 건재한 상태.
제네스는 비테로를 죽인 후, 저것을 베겠다고 했다.
‘……그게 가능할까?’
이리엘은 어둠 속에서 첨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연회를 위해 밝혀진 불빛 덕분에, 성벽 너머에서도 그 윤곽이 거뭇하게 보였다.
첨탑은 첨단에 이를수록 폭이 좁아지는 바늘과 같은 구조였으나, 검으로 벨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저걸 베겠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푸른 섬광이 번쩍인 건 그때였다.
캄캄한 밤을 사선으로 가르는 선명한 빛줄기가 첨탑을 지나쳤다.
그리고 잠시 후, 빛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첨탑의 상단부가 쓸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네스가 첨탑을 벤 것이다.
쿠르르릉…….
굉음이 성벽 너머에서 아스라이 흩어졌다.
저편에서 천둥이 친 듯했다.
“이게 되네…….”
이리엘은 자욱한 먼지구름을 피워 내는 성을, 넋을 놓은 채 바라보았다.
그 커다란 건축물을 짚단 베듯 잘라 버리다니…….
일순, 작은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아 왔다.
“제네스 님이 해낸 거예요?”
베론이 잠이 묻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첨탑이 무너지는 굉음에 깼나 보다.
이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응, 해낸 거야.”
베론은 더 이상 깃발이 존재하지 않는 체즈웬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제 작은 손을 맞잡으며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기도하던 아이는,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제네스 님이 전에 저것을 베어 주겠다고 했어요.”
“그랬어?”
베론이 말을 이었다.
“네. 저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어른들은 가끔 달콤한 거짓말을 하잖아요.”
베론은 어렸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상황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저 성에는 마을을 짓밟은 기사들보다 훨씬 많은 기사가 있었고, 저 성의 주인은 그런 이들의 우두머리였다.
베론의 작은 세상을 하루아침에 짓밟은 자들.
그들의 그림자는 베론에게 그 무엇보다 거대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홀로 베어 주겠다니.
아홉 살짜리 아이도 믿지 않을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됐다.
“베론은 모르는 게 없구나.”
이리엘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베론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베론이 고개를 들어 이리엘을 바라보았다.
“엄마, 아빠가 제 목소리를 들으셨을까요?”
아까 기도한 걸 말하는 듯했다.
“그럼. 하늘나라에서 다 보고 계실걸.”
“좋아하시겠죠?”
“물론이지. 하지만 비테로가 죽은 것보다는 베론이 이렇게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걸 보고 더 좋아하실 거야.”
아랫입술을 문 베론이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엘은 그런 아이를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베론이 조그만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아이답지 않게 제법 진중한 표정이었다.
“저는 앞으로 알렌 삼촌처럼, 제네스 님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믿을 거예요!”
피식 웃은 이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말에 동의했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녀는 깃발 잃은 체즈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인간이 성격은 괴팍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네.”
첨탑이 사라져 휑한 자리에 별빛이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일까?
세상이 조금은 더 밝아진 듯했다.
* * *
“정말 수고 많았네. 자네 덕분에 10년 묶은 체증이 다 내려간 것 같아.”
비테로의 머리를 효수한 코레른이 사다리에서 내려와 손을 탁탁 털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이로써 계획한 상황은 모두 끝이 났다.
코레른은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코밑을 쓱 훔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 혼자서 비테로를 벨 줄이야.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군. 수도로 가는 중이라 했던가?”
“그래.”
“수도에 가서는 할렌트의 목이라도 벨 작정인가? 그러면 평생을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흘깃 바라보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음하하. 농담일세, 농담.”
홀로 낄낄거리던 그는 옆에 있던 알렌과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는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서, 설마 진짜 그럴 작정인 게야!?”
무언의 긍정에, 그는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말했다.
“여기서 작별하도록 하지.”
체즈웬성이 난리가 난 마당이라, 경비대가 우리가 있는 북측 광장으로 올 확률은 매우 적었지만, 이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우리는 곧장 떠나야 했다.
알렌은 코레른과 진한 포옹을 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나는 그와 가볍게 악수했다.
그는 두툼한 손으로 내 손을 포개어 잡으며 눈빛을 빛냈다.
“앞으로도 수고해 주게. 나는 자네만 믿고, 두 다리 쭉 편 채로 살고 있겠네.”
“편할 대로.”
내가 건성으로 대답하자 코레른은 수염 속에 가려져 있던 허연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다음 날.
체즈웬은 이른 아침부터 크게 들썩였다.
북측 광장에 비테로를 비롯한 여럿의 목이 효수되어 있던 까닭.
그 아래 걸린 천에는 그들의 죄목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저리 안 비켜!”
경비병들은 광장을 메운 인파를 헤치며 비테로의 머리가 걸려 있는 효수대로 나아갔다.
험악한 기세로 그 앞에 도달한 이들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효수대 주위로 둘러진 선이 있는 까닭.
선을 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경고 문구와 함께.
“…….”
그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며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어젯밤 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효수대는 결국, 오후가 되어서야 완전히 철거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에는 어젯밤의 일을 모르는 영지민이 없었다.
* * *
체즈웬성을 벗어나 이리엘과 조우한 우리는 곧장 말을 몰았다.
이곳에 남아 득 될 게 없었다.
빠르게 벗어나는 것이 상책.
그렇게 다시 가도에 오른 우리는, 너른 구트완 숲을 이틀 동안 내리 달렸다.
그리고 지금 막 그 숲을 벗어난 차였다.
녹색으로 가득 찼던 시야가 훤히 트이며 너른 벌판이 담겼다.
“여기서 잠시 쉬고 가겠습니다.”
앞장서 나아가던 알렌이 고삐를 당겼다.
땅이 고르지 않아 말들도 피곤했을 터.
우리는 숲과 평원이 만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가죽으로 된 물주머니를 꺼내 목을 축이고 있으니 알렌이 다가왔다.
“제네스 님, 레논시로 가는 길을 정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는 내 옆에 주저앉으며 지도를 폈다.
레논시는 우리의 다음 목적지였다.
그곳에 베론을 맡아 줄 보육원이 있는 까닭.
부모를 잃고 우리에게 이제 막 정붙인 녀석을 두고 가는 게 마음이 쓰이지만, 계속 함께할 수는 없었다.
더 정이 들기 전에 헤어지는 게 녀석에게도 나을 터.
알렌이 말을 이었다.
“가는 방법이 두 가지인데, 편하지만 오래 걸리는 길과 힘들지만 빠른 길이 있어요.”
알렌은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크테러산맥을 타면 1주일이면 갈 수 있고, 카트르시를 통해 돌아가면 2주 정도 걸릴 겁니다. 둘 다 빠듯하게 움직일 때를 가정했고, 상황에 따라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 저는 카트르시를 통해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시선을 들어 멀리서 일렁이는 거대한 산악을 보았다.
내가 말했다.
“카트르시로 돌아서 가자.”
“옙!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알렌은 내 선택이 만족스러웠는지 지도를 접으며 힘차게 답했다.
크테러산맥은 매우 험준한 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말도 타고 갈 수 없을뿐더러, 깊은 산중에는 몬스터가 서식한다.
몬스터는 동물과 요괴 사이의 것들이었다.
얕은 산이나 도시 근처에는 없지만, 험준하고 깊은 산맥에는 여전히 몬스터들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는 게 낫다.
“왜? 하늘에 뭐가 있어?”
짐을 정리하던 이리엘이 베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베론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까마귀가 계속 우리 머리 위를 맴돌고 있어요.”
아이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까마귀 한 마리가 상공에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알렌은 씩 웃으며 베론을 보았다.
“내가 해 줬던 이야기 기억하지? ‘미드크레이’에서 아리호크 떼가 내 머리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고.”
“네! 기억해요! 그 얘기 또 해 주세요!”
베론이 눈을 반짝이자, 알렌은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리고는 목소리를 음산하게 변조했다.
“괜찮겠어? 이번에는 아리호크들이 시체를 뜯어먹는 무서운 이야기를 해 줄 작정인데 말이야.”
“괘, 괜찮아요.”
알렌이 스멀스멀 다가오자, 겁먹은 베론은 말까지 더듬으며 몸을 움츠렸다.
“아리호크들이 하늘에 떠 있을 때는 절대 고개를 들어서는 안 돼.”
“……왜요?”
“고개를 들면 녀석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의 눈을!”
알렌은 목소리 어조만으로 베론에게 겁을 주더니, 갑작스레 다가가 아이의 옆구리를 갈고리 손으로 긁어 댔다.
깜짝 놀란 베론은 비명과 같은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좋아했다.
“어때? 무섭지?”
“네, 엄청 무서워요!”
……참, 무서울 것도 없다.
베론은 별것도 없는 알렌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가 나오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다.
“제네스 님 나오는 이야기 해 주세요.”
“또?”
“네!”
“……이제는 없는데.”
알렌이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베론을 만난 뒤로 벌써 골백번은 더 했을 거다.
그리 우려먹었으니 소재가 떨어지는 게 당연한 일.
베론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쥐어짜 내려는 알렌에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곧 이야깃거리가 하나 더 늘겠다.”
“예?”
알렌이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되묻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까마귀하면 생각나는 게 없느냐?”
“까마귀 기사단이요!”
베론이 손을 번쩍 들며 답했다.
“네가 낫구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가만히 있던 이리엘이 눈썹을 들며 물었다.
알렌 또한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녀석들 모두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챈 것 같았다.
“에이, 괜히 겁주지 마세요.”
알렌이 허공에 손을 던지며 말했다.
“내가 언제 그러디?”
알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결코 실없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이 내 말을 믿지 못할 뿐.
알렌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저기 오는군.”
나는 너른 광야의 한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부지런한 녀석들 덕분에 내 말을 곧바로 증명할 수 있었다.
알렌과 이리엘은 동시에 벌떡 일어나 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편에서 밀려오는 먼지구름.
무언가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떡하죠? 제네스 님이 비테로를 암살했다는 걸 알고 오는 걸까요?”
알렌이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발을 동동거렸다.
“그건 나도 모르지.”
까마귀 기사단은 총독부 휘하의 기사단.
그들이 우리를 쫓을 만한 이유는 국새와 관련된 일이거나 비테로를 암살한 일, 혹은 우리가 독립군이라는 점뿐이었다.
하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그들이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우리를 적으로 간주하고 달려오는 것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그럼 녀석들은 왜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걸까?
말했듯 그건 나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알렌, 이리엘, 베론과 함께 있는 이상, 이곳을 전장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방법은 두 가지.
먼저 나서서 죽이거나, 아니면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대화를 나눠 보는 거다.
나는 평소답지 않게 후자를 택했다.
“일단 기다려 보자. 이유는 차차 알게 되겠지.”
우리를 적으로 판단하고 오는 것 같지 않아 그랬다. 적으로 생각했다면 이렇게 요란을 떨며 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근방에 저들만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
선제공격했다가 자칫 지원군이라도 부르면 골치 아파진다.
그 외에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을 수도 있고.
그러니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때는,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 기다리는 게 낫다.
내 예상대로라면 체즈웬에 관한 질문 몇 개만 던지고 지나칠 확률이 높으니까.
두두두두!
말발굽이 대지를 내딛는 소리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얕게 진동하는 땅.
검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12명의 기사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녀석들과의 간격이 좁혀지자, 알렌과 이리엘은 다시 몸을 일으켜 경계 태세를 보였다.
베론은 이리엘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점차 속도를 줄인 이들은 우리를 동그랗게 포위하며 완전히 멈춰 섰다.
그들이 몰고 온 흙먼지가 한차례 몰아친 뒤 흩어졌다.
그들은 숨을 몰아쉬며 들썩거리는 군마를 제어하는 동시에 날 선 눈빛을 내리깔았다.
나도 분위기를 맞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켜야 할 짐 덩어리가 무려 셋.
당장은 전투를 삼가야 옳다.
‘여기서는’ 죽이지 않겠다, 마음먹었으니 나도 성질 좀 죽이고 쥐 죽은 듯 얌전히 있어야 한다.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다만.
이들의 오연한 눈빛을 마주하니, 오히려 그게 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사전에 죽일 걸 그랬나?
간만에 내 결정에 후회가 들었지만,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