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제28화 비테로 체즈웬 (3)
캄캄한 밤이 왔음에도 체즈웬성은 낮처럼 밝았다.
성의 깊숙한 내원에서는 연회가 한창이었다.
훤하게 타오르는 등 아래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음식과 술이 풍족한 연회였다.
고상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그 분위기를 한껏 누렸다.
나는 내원을 두른 성벽 위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병들이 경계를 빈틈없이 서고 있었지만, 내 존재를 느낄 만한 이는 없었다.
“저 녀석이군.”
연회의 주인공인 그를 발견하기란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제국의 예복을 입은 채, 사람들 속에서 홀로 불쑥 솟아 있은 거구의 사내.
그가 바로 비테로 체즈웬이다.
내가 죽여야 할 이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손에 쥔 초상화를 넘기며 내가 죽여야 할 이들을 한 명씩 대조해 갔다.
비테로를 포함해 초상화는 총 13장.
연회에 참여한 이들 중 죽여야 할 놈들을 골라낸 살생부였다.
“여기까지 오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비테로가 단상에 올라 말했다. 마력을 품은 목소리가 내원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전쟁의 공으로 영지를 하사받을 정도니, 실력은 출중할 거였다.
소란스럽던 연회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다들 비테로의 말을 듣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때마침 초상화의 마지막 장이 넘어갔다.
이제 진짜 연회가 시작될 차례였다.
손끝에서 피어난 불꽃이 종이뭉치를 끝에서부터 삼켜 갔다. 나는 그것을 허공에 던졌다. 불길에 타오른 초상화는 단숨에 재가 되어 흩날렸다.
삼매진화라는 고명한 수였다.
그다음 가볍게 늘어뜨린 두 손을 연회장 쪽에 겨누었다.
이어 손가락이 현을 연주하듯 허공을 부드럽게 튕기기 시작한다.
춤추듯 움직이는 손끝에서 뻗어 나간 푸른 빛줄기가 연회장에 빛살처럼 꽂혀 들었다.
퍼버버벅!
수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피 구름이 일었다. 여러 갈래로 쏘아진 탄지공(彈指功)은 목표물들을 정확히 꿰뚫었다.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연회장이 비명으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사람들은 원형의 테이블 밑으로 기어서 들어갔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위병들은 검을 뽑으며 사위를 경계했다.
“비테로 님을 호위해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
성벽에서 뛰어내린 나는 내원에서 외원으로 이어지는 성문 앞에 내려섰다.
“저, 적이다!”
그제야 나를 본 이들이 내 주위를 포위하며 검을 겨누었다.
“누구냐!”
모두 나를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지금 나는 흰 사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이 흰 사자 가면은 그저 얼굴을 가리기 위한 용도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프렌치아를 의미하고 있었다.
블랙 드래곤, 바라낙투스가 크레본 제국을 상징하듯.
흰사자, 레오니랜서는 프렌치아를 상징하는 신수였다.
앞으로 이 흰 사자 가면은 프렌치아 국민에게는 희망을, 적들에게는 공포를 전하는 명백한 상징이 돼 줄 것이다.
이것까지가 레이크가 내게 요구한 바였다.
나는 롱소드를 꺼내 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서슬 퍼런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테로가 있는 단상까지의 거리는 백여 걸음.
나와 녀석의 사이는 검과 창을 쥔 병사들로 채워져 있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을 생포하여 내 앞에 대령하라!”
비테로의 고함에 주변의 병사들이 일시에 달려들었다. 위병의 수준이 높다 하더니 기본은 갖춘 이들이었다.
그래 봤자지만.
나는 사방에서 찔러 오는 검을 피해 몸을 틀었고, 그 움직임을 따른 검극이 은빛 반원을 그렸다.
푸확!
번쩍인 궤적 안에서 핏물이 치솟아 올랐다.
“끄아악!”
나는 비명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방에서 빈틈없이 떨어지는 검격들.
나는 그것을 속도로 극복했다.
그들의 검이 내게 닿기 전에 나의 검이 그들에게 먼저 닿았다.
굼벵이처럼 느려 터진 세상 속에서, 나는 홀로 제 속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솨아아―.
손끝에서 움튼 빛줄기가 바람을 가를 때마다 하나의 생이 스러진다.
나는 죽음을 밟으며 일정한 속도로 나아갔다.
내 앞을 막아선 적들은 폭풍에 휩쓸린 듯 그대로 쓸려 나가고 있었다.
붉은 바람이 불어왔다.
“물러서라.”
전장에 내린 묵직한 목소리에, 병사들이 다급히 길을 텄다.
그 사이로 무거운 존재감을 뿜어내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앞을 막아 오던 녀석들과는 확연히 다른 기세를 뿜어내는 자들.
“실력이 상당한 놈이로구나.”
비테로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단상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아직 도망치지 않는 걸 보면 믿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그가 물었다.
“혼자 왔나?”
“보다시피.”
나는 녀석을 단숨에 벨 수 있음에도 친절히 어울려 주었다.
그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훤히 보이는 까닭.
나는 아까부터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급할 필요가 없으니까.
강자의 여유라고 할까나.
“한심한 놈.”
비테로가 입매를 비틀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 실력만 믿고 만용을 부렸나 본데, 이 몸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연회를 열었을 성싶으냐!”
그는 오른 주먹을 뻗어 밤하늘에 겨누었다. 녀석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네놈의 제삿날이 될 거다.”
내원 곳곳에 세워져 있던 가고일 석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서로 엉키며,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렸다.
아무래도 내원에 보안 마법을 설치해 두었나 보다.
우웅.
내원 전체를 덮을 만큼 커다랗던 마법진이 내 발밑으로 응축되며 지름 1m 정도의 작은 크기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온몸을 짓누르는 막대한 압력이 전해졌다.
마치 하늘이 가라앉은 듯하다.
녀석은 그런 나를 보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이제부터 1,000kg에 이르는 무게가 네놈의 몸을 짓누를 것이다! 과연 그 상태에서도 제대로 된 검을 휘두를 수 있는지 보자꾸나!”
* * *
비테로는 덫에 걸린 사자 머리를 마음껏 비웃었다.
제 실력만 믿고 홀로 오다니. 정신 나간 놈이 따로 없었다.
혹시 모를 암살 시도쯤은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사자 머리 녀석의 솜씨가 매서웠지만, 무거운 족쇄를 채웠으니 제압하는 건 이제 시간문제.
“저놈을 당장 내 앞에 데려와 고개를 조아리도록 하라!”
비테로의 명령에 사자 머리와 대치하고 있던 기사들이 움직였다.
지금까지 녀석을 상대하던 이들과 달리, 그들은 ‘붉은 삭풍’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의 친위대.
손수 모집한 기사들인 만큼, 이들을 향한 비테로의 믿음은 확고했다.
매서운 검격이 사자 머리를 포위하며 짓쳐 들었다. 오랜 시간 함께 훈련해 온 붉은 삭풍의 합은 절묘했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녀석은 자신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다. 가면 뒤에 숨은 낯짝이 벌써 궁금했다.
콰아아―.
녀석의 주변이 번갯불 튀듯 번쩍하더니, 피 보라가 일었다.
그를 향해 쇄도했던 붉은 삭풍 대원들이 썩은 짚단처럼 맥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병사들을 상대하던 조금 전의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결과.
그래비티 보안 마법이 발동되어 있음에도 그랬다.
“……대체 무슨?”
비테로는 그 장면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눈앞의 상황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사자 머리는 마법이 적용되지 않은 사람처럼, 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보안 마법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전과 달리 녀석의 걸음마다 옅게 파인 족적이 바닥에 새겨지고 있었다.
보안 마법이 발동되지 않은 게 아니라, 사자 머리 녀석이 1,000kg에 이르는 무게를 짊어지고도 붉은 삭풍을 압도할 만큼 강자라는 의미였다.
“마, 말도 안 돼…….”
비테로가 눈앞의 현실을 어렵사리 받아들였을 때는 이미 붉은 삭풍이 모두 전멸한 후였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사자 머리가 그를 응시했다.
“이게 끝인가?”
가면 뒤에서 들려오는 권태로운 목소리.
비테로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남아 있는 병사들은 감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검만 겨누고 있는 상황.
녀석의 손아귀를 벗어날 방법은 없어 보였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죽여라!”
이제 더 이상 비테로에게서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다급하게 소리치며 자신을 지킬 성벽을 세웠다.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했다.
“이익…….”
하지만 뒤로 돌았을 때, 어느새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자 머리를 볼 수 있었다.
비테로는 옆에 있던 병사를 그에게 던져 시야를 가리는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검세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뒈져라!”
하지만 그의 검은 애꿎은 병사만을 갈랐다. 붉은 핏물이 흩어진 자리에는 사자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식겁한 비테로가 곧장 뒤로 돌았다.
그때 따뜻한 액체가 왼쪽 볼에 튀었다.
……왼팔이 허전하다.
시선을 내리니 자신의 팔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상황을 인식하고 나서야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전해졌다.
“끄아아악!”
비테로는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울부짖었다. 사자 머리가 조소하며 말했다.
“엄살은.”
“이 빌어먹을 새끼가!”
왼팔의 출혈을 마력으로 막은 비테로가 전력을 다해 검을 그었다.
“크하압!”
칼날 위로 푸른 오러(검기)가 타올랐다. 왼팔을 잃었음에도 유려한 검로.
비테로가 이를 악물었다.
수없이 많은 프렌치의 목을 벤 검이었다.
자신의 검은 여태껏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 검은 허공을 갈랐다.
부웅!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통을 참느라 핏발 선 눈이 사자 머리를 직시했다.
자신의 검을 피해 움직이는 녀석의 신형이 보였다. 이제껏 놓치고 있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하압!”
기합과 함께 녀석의 뒤를 쫓아 검을 틀었다.
벨 수 있다는 확신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손끝에서는 더 이상 검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어 끔찍한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
“끄아아악!”
남은 팔마저 잃은 비테로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 댔다.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며 관자놀이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콰직.
이내 서늘한 칼날이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무릎이 의지와 상관없이 땅에 닿는다.
……빌어먹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가슴팍에서 불타오르는 무언가가 빠져나간다고 느낀 순간, 눈앞에 새하얀 섬광이 작렬했다.
* * *
쿠르르르릉!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제국의 국기가 꽂혀 있던 첨탑의 상단부가 사선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고요한 밤을 깨우는 소리였음에도 영지는 고요했다. 영지민들은 누구 하나 창문을 열지 않았다.
그 소음이 체즈웬성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집 안에서 숨을 죽였다.
덕분에 여전히 고요한 어둠 속을 알렌과 코레른이 달렸다.
“진짜로 이런 일이 가능할 줄이야!”
코레른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조용히 소리쳤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희열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상기된 표정이 잘 드러나 있었다.
조금 전, 체즈웬성이 무너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까닭이다.
알렌이 그 옆에서 한껏 콧대를 세웠다.
“제가 말했잖습니까! 우리 제네스 님이 성격부터 시작해서 정말 말도 안 되는 분이라니까요. 제네스 님이 말하면 그건 무조건 현실이 된다구요. 이제 믿으시겠죠.”
“맞네, 맞아! 자네 말이 다 맞아!”
코레른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알렌의 말에 동조했다.
“자네들의 말을 의심한 내가 바보였어, 내가 멍청이였다고! 으하하하!”
코레른은 자신의 머리통을 쥐어박으면서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는 도저히 내려올 기미가 없어 보였다.
‘아, 이 얼마나 고대해 왔던 일인가.’
머릿속으로만 바라 왔던 일이 하루아침에 현실이 되어 버렸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체즈웬 영지에 거주하는 이들, 모두가 바라고 있었을 거였다.
“후딱 설치하세!”
목적지였던 북측 광장에 도착한 둘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영지민들 또한, 비테로의 죽음을 알게 될 터.
그들이 느낄 감격이 얼마나 클지 알기에, 심장이 벌써 설렘으로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한편, 이리엘과 베론은 체즈웬성 바깥에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