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후 천하제일인이 되어 귀환했다-24화 (24/228)

제24화

제24화 다시 프렌치아로 (3)

자욱한 새벽안개 사이로 태양 빛이 스며들었다.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씻으며 옅은 잠기운을 몰아냈다.

일정은 이슬이 마르지도 않은 일찍부터 시작됐다.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서자 마당에는 알렌이 서 있었다.

“가자.”

상단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상단 후문.

독립군들이 이용하는 출입구가 따로 있다고 했다. 몇 개의 문을 넘자 장내는 금세 한산해졌다.

“다들 와 있네요.”

알렌이 말했다.

도착한 후문에는 이리엘을 비롯해 루시안과 레이크, 프레디와 체스까지 나와 있다.

루시안은 이리엘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항상 조심해야 해.”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이리엘의 말에 루시안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이리엘이 활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농담이야, 농담. 저 사람 인성이 박살 난 만큼 실력은 확실하다며 큰 위험은 없겠지.”

이리엘이 내게 슬쩍 눈짓하며 말했다. 그 괘씸한 행태를 나는 그냥 두었다.

사실이니까.

나는 내 인성이 좋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루시안이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공감은 되지만, 이리엘의 개인적인 의견이야.”

“뭐, 인성만 박살 난 것보다야 낫지.”

나는 이리엘을 보며 말했다. 이리엘은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다.

“저기요, 저 인성 엄청 괜찮거든요? 당신한테만 이렇게 구는 거예요. 제가 받은 건 그대로 돌려주는 성격이거든요. 그러니까, 당신과 똑같다고 생각 말아요. 주변에서는 제가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며 칭찬이 자자하다구요. 알지도 못하면서.”

다다다 쏟아 낸 이리엘이 팔짱을 끼며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루시안을 보며 말했다.

“동생이 아첨과 진심도 구분 못 하는 바보일 줄은 몰랐네.”

루시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얘가 그런 편이긴 하지.”

“오빠!”

이리엘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귀를 막은 루시안이 날 보며 말했다.

“그래도 둘 사이가 좋아 보여 다행이야.”

“이게 좋은 거라고?”

나는 그가 맨정신인지 의심했다.

어떻게 봐야 이 사이가 좋아 보일 수 있지?

녀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잘 부탁한다. 성격은 저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야.”

“칭찬이야, 욕이야.”

이리엘이 입술을 빼쭉 내밀었다.

내가 말했다.

“걱정 마, 죽게는 안 둘 테니.”

“다치지도 않았으면 좋겠는데.”

“바라는 게 많군.”

“그래서 미안해하고 있다. 많이 고맙기도 하고.”

루시안이 웃음기를 거두며 진지하게 굴었다.

“너에게 너무 무거운 책임을 지워 준 건 아닌가 싶어.”

“네가 지워 준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짊어진 거다.”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할렌트 바레인을 베겠다고 한 건 나였다.

루시안이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선택했다. 이 짐은 내 스스로 짊어진 거였다.

내가 말했다.

“이까짓 거 하나도 무겁지 않아.”

내가 진 책임을 가벼이 여겨서 한 말은 아니다. 지금의 내겐 이것을 짊어질 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나는 오히려 여전히 프렌치아를 꿈꾸고 있는 루시안에게 고마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이기에 프렌치아를 믿고 맡길 수 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책임을 지워 준 건 사실 나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루시안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른 이들과의 작별 과정도 길지 않았다.

나눌 말은 어젯밤에 모두 마무리된 까닭.

“제네스 님!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알렌과 한차례 부둥켜안고 발광을 한 체스와 프레디가 아쉬움을 담은 얼굴로 말했다.

“인상들 펴라. 못난 얼굴들이 더 보기 흉하다.”

녀석들은 내 말에 씩 웃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네. 알겠습니다.”

녀석들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준비된 말에 올랐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에 오른 이리엘이 손을 흔들었다.

루시안은 그런 이리엘을 바라보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그녀의 힘찬 인사를 마지막으로 상단을 나섰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이른 아침이다 보니 거리는 한산했다. 대로를 따라 도시를 벗어나자, 어스름했던 세상이 햇볕에 선명히 드러났다.

눈앞엔 끝없는 광야가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그 너른 벌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었다.

* * *

새소리 그득한 깊은 숲속.

졸졸졸 흐르는 냇가 앞에 참새처럼 나란히 앉은 이들이 있었다.

식기를 벅벅 닦고 있는 이들은 바로 이리엘과 알렌이었다.

“형님, 제가 할게요. 가서 쉬세요.”

“아니야, 같이 해야 금방 끝내지.”

상단을 떠난 지 이틀.

이들은 어느새 프렌치아 국경에 다다라 있었고, 그사이 이리엘은 알렌과 형님, 동생하며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이리엘이 알렌을 형님이라 부르는 건 그녀가 현재 남자 행색을 하고 있는 까닭.

그리고 둘의 사이가 이렇게 금방 가까워진 것에는 제네스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근데, 저 인간 진짜 얄밉지 않아요?”

이리엘은 우거진 수풀을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 너머에는 야영지에서 홀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제네스가 있었다.

“자기는 잡일에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소드 마스터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왜 우리를 하인 부리듯 부리냐고요. 진짜 소드 마스터면 다야?”

여정 중 필요한 잡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알렌과 이리엘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제네스는 ‘나는 너희들과 하는 일이 다르다.’라는 이유로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잔소리만 해 댔다.

“하다못해 잔소리라도 하지 말든가. 일은 우리가 다 하는데, 유난은 지가 다 떨어요.”

“……어쩌겠어. 우리가 이해하는 수밖에.”

알렌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미 제네스의 인성에 대해서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지신 거야. 전에는 예민하기가 사춘기 애보다 더했다니까.”

알렌은 프레디와 체스와 함께 고생했던 나날을 떠올렸다.

제네스는 무력도 무력이지만, 사람을 부려먹는 재주 또한 뛰어났다.

“지금보다 더했다고요?”

이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지금 저러시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처음에는 머리통에 혹이 사라질 날이 없었거든. 내가 눈치껏 비위를 맞춰서 이 정도인 거지.”

“대, 대단하시네요. 그동안 고생했겠어요. 저 인간은 악마인 게 분명해요.”

“마음 넓은 우리가 참아야지. 같이 파이팅해 보자.”

둘은 같은 감정을 교류하며 진한 동지애를 쌓아 가고 있었다.

‘저것들을 그냥.’

나무 밑동을 등받이 삼아 앉아 있던 나는, 우거진 풀숲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조용히 수군거리고 있지만, 내 귀에는 두 녀석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나를 후식 삼아 씹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조금 전 먹은 점심이 꽤 든든했나 보다.

“빨리빨리 안 하냐? 설거지 하나 하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다 해 갑니다!”

수풀 너머에서 알렌이 소리쳤다.

곧이어 투덜거리는 이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귀를 닫고 눈을 감았다. 선선한 바람이 마음을 차분히 달래 주었다.

잠시 후 그릇을 닦은 이들이 돌아왔다.

나는 그제야 눈을 뜨며 그들을 보았다.

“깨끗이 닦았어?”

“그럼요, 완전 새 그릇처럼 닦아 놨습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못 미더우면 자기가 닦을 것이지.”

이리엘이 짐을 챙기며 투덜거렸다. 나는 알렌을 바라보며 물었다.

“막내가 불만이 많은 것 같다?”

“하하, 그럴 리가요.”

알렌이 호탕한 척 웃었다.

“불만이 정말 하~나도 없다고 전해 주세요.”

이리엘도 알렌을 보며 말했다.

알렌이 익숙하게 내게 그 말을 전했다.

“그렇다고 하네요.”

요새 이리엘과 나는 알렌을 통해서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 가면 해가 저물기 전에는 프렌치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알렌이 지도를 보이며 말을 돌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우리는 밤이 오기 전에 국경을 넘을 생각이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자.”

채비를 마친 우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숲을 벗어나자 너른 광야가 다시 눈에 담겼다.

우리는 한 줄기 바람처럼 그 너른 땅을 가로질렀다. 말발굽을 따라 핀 흙먼지가 꼬리처럼 길게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하늘에 걸려 있던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프렌치아가 눈에 담기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산악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앞서 달리던 알렌이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측면에서 달리던 나와 이리엘도 그에 따라 말을 멈췄다.

국경을 가르는 커다란 바위가 우리 앞에 있었다.

알렌이 말의 고삐를 잡아채며 말했다.

“여기서부터가 프렌치아입니다.”

“진짜 오랜만이네요.”

이리엘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프렌치아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복잡했다.

듣기로, 그녀는 10년 전 루시안과 함께 이 길을 지났다고 했다.

기억 속에 있는 어린 날의 이리엘이 떠올랐다.

그녀가 루시안의 손을 쥐고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는 모습이 마치 본 것처럼 선명히 그려졌다.

“이렇게 다시 올 수 있을 줄 몰랐는데……. 보니까 좋네요.”

이리엘은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는 잠시 그 경관에 취했다.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우리는 각기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프렌치아에 담긴 각자의 삶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랬다.

오래전에 잊혔던 얼굴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잊혔던 삶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우습게도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었다.

낡은 책장 속에서 잊혔던 책을 발견한 것처럼, 잊은 줄도 몰랐던 것들이 나를 전생의 삶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덕분에 적을 겨눈 칼끝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의 생을 넘어 이곳에 왔음에도 나는 그들을 심판함에 주저함이 없다.

나는 지난번 이 경관을 보며 다짐했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 프렌치아를 바로잡을 것이라고.

지금의 프렌치아는 많은 것들이 어긋나 있었으니까.

신의를 지킨 이들은 모든 걸 잃었고, 나라를 팔아먹었던 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땅.

변절하고, 남을 핍박해야만 잘살 수 있는 나라.

지금의 프렌치아는 정직하게 살수록 배가 고파지는 나라였다.

하여 나는 바꿀 것이다.

죄진 자들을 심판하고, 그들이 죄악으로 쌓아 올린 모든 걸 무너뜨림으로써.

뒤집힌 정의를 바로 세울 것이다.

천하제일이자 천하무적인 내겐, 그럴 힘이 있었다.

* * *

세 개의 그림자가 평야에 길게 늘어졌다.

끝없는 땅에 비하면 참으로 조촐한 일행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 작은 걸음이 프렌치아에 어떤 역사를 남길지.

그들은 이제 그 시작에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