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제22화 다시 프렌치아로 (1)
알렌은 수레 뒤에 숨어, 제네스가 마적 떼를 섬멸하는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럼에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어렸을 적 들었던 용사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다가왔다.
그에게서 푸른 섬광이 번쩍일 때마다 우레와 같은 폭발음이 뒤따랐고, 마적들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평야에 뿌려졌다.
떼 지은 아리호크가 그들의 시체 위를 맴돌았다.
들판이 붉게 물들었다.
시체가 널따랗게 깔리고 그들을 상징하던 깃발과 그들이 쥐고 있던 병장기들은 시체 사이로 잡초처럼 삐쭉빼쭉 솟아 있었다.
그 중심에서 제네스는 어느새 홀로 서 있었다.
검을 늘어뜨린 그의 머리 위로 서광이 비쳐 들었다.
그런 그가 마치, 전쟁의 신처럼 보였다.
수백에 이르던 마적 떼들을 이렇게 손쉽게 쓸어버릴 줄이야.
제네스가 소드 마스터란 것이 살갗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
알렌은 그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도 넋을 놓은 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네스의 행색은 저 참혹한 현장을 만든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마적들의 핏물마저도 그에게서 비껴간 듯했다.
“뭐 하냐? 갈 준비 안 하고.”
* * *
내 물음에도 알렌은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 큰 사내자식에게 받고 싶은 눈빛은 아니었다.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빡!
“끄악!”
짧은 비명과 함께 녀석의 눈빛이 금세 돌아왔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쥔 알렌을 무시하고 수레에 올라 그를 내려다보았다.
“또 맞을래?”
입술을 빼쭉 내민 알렌이 머리를 문지르며 마부석에 올랐다.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양손을 베개 삼아 누웠다.
하늘이 새파랗다.
지옥도가 펼쳐진 들판과 달리 하늘은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을 좋아한다.
흐르는 구름을 보니 잠이 솔솔 몰려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제네스 님.”
알렌이 말했다. 내가 답이 없자 녀석은 다시 말을 걸어 왔다.
“주무세요?”
“왜?”
나는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그는 나를 한번 흘깃 보는 것 같더니 말을 이어 갔다.
“있잖아요. 뜬금없기는 한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제네스 님 옆에 있으니까 제가 꼭 대서사시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된 것 같은 거 있죠. 몬스터들을 검은 숲으로 몰아냈던 이스피릴 대왕님의 이야기처럼 지금까지 노래로 남은 영웅들의 서사시 같은 거 말이에요. 거기에도 저 같은 조연이 한 명씩은 꼭 나오거든요.”
알렌이 평소답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끝에선 꿈만 같던 프렌치아의 독립도 이뤄지겠죠? 어쩌면 저는 지금, 노래로 남을 서사시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알렌.”
나는 그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녀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내 부름을 오해했는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주인공은 당연히 제네스 님이고요.”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나 잘 거니까 조용히 해.”
“…….”
알렌은 대답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홀로 뭐라 꿍얼거렸다.
나는 수레를 발로 툭 치는 것으로 녀석의 입을 막았다.
평야는 금세 고요해졌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머리칼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을 느꼈다.
날아온 풀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 * *
잠에서 깬 이리엘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따스한 햇살과 함께 상쾌한 바람이 귀밑을 훑고 지나갔다.
며칠 사이 그녀의 긴 머리칼은 사내처럼 짧아져 있었다.
그 허전함이 어색했던 이리엘은 한 차례 뒷목을 쓸고는 난간에 기대어 작은 정원을 바라보았다.
화사한 꽃과 가지를 친 나무들이 한눈에 훤히 들어왔다.
하지만 이리엘의 눈동자는 평화로운 것들을 담고 있음에도 불안하게 흔들렸다.
루시안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아직도 머릿속에 잔상처럼 어른거리고 있었다.
# 지금으로부터 열흘 전.
상석에 앉은 루시안이 곁에 앉은 이리엘의 어깨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맹수를 쓰다듬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미안. 너밖에 적임자가 없어서 그래.”
루시안은 겨울밤 솜이불처럼 최대한 따뜻하게 말을 꺼냈다.
그럼에도 이리엘은 바늘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크레이 지부가 이제 좀 자리 잡히니까, 이번에는 프렌치아로 가라고?”
“너도 가고 싶어 했잖아.”
루시안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이리엘은 눈빛에 예기를 더해 그를 노려보았다.
“죽을래?”
이번에는 작은 주먹까지 들어 보이며 씩씩거렸다.
루시안은 상에 놓여 있던 쿠키를 이리엘에게 들이밀었다.
그녀의 화를 달래는 데는 갓 구워 낸 쿠키만 한 게 없었다.
이리엘은 쿠키를 입에 넣으면서도 루시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신이 프렌치아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던 건 사실이었다.
오래전에 떠나온 고국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원하던 방식은 결코 이런 게 아니었다. 루시안도 당연히 알고 있는 바였다.
“내 얘기를 마저 들어 보면 너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말했듯, 너밖에 할 수 없어서 그래.”
“그렇다고 어떻게 금쪽같은 여동생을!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르는 놈팡이에게 맡기냐고!”
이리엘이 가장 화나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자신처럼 어여쁜 여동생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원미상의 녀석에게 맡기려 하다니!
정신이 없어도 한참이나 없는 오라버니였다.
물론 루시안이 아무 이유 없이 위험한 일을 맡길 사람은 아니란 건, 이리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임무는 분명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고, 자신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일이겠지.
그래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루시안은 쩔쩔매며 말을 이어 갔다.
“그 녀석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지만, 놈팡이까지는 아니야.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보잖아.”
“난 딱 보니까, 놈팡이 같던데.”
이리엘은 입을 빼쭉 내밀었다.
그와는 고작 몇 마디 나눠 본 게 전부였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그 이름이 모기 자국처럼 매우 거슬린다.
신원도 증명하지 못하면서 죽은 왕세자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다니.
가명일 게 확실해 보였다.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으나 상당히 불쾌하다.
“솔직히 나도 널 보내고 싶지 않아.”
“그런데?”
“말했다시피 적임자가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녀석 옆이라면 덜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 네 눈에는 놈팡이 같아 보여도 실력은 확실하잖아.”
“알아, 소드 마스터라며. 그런데 그게 진짜야? 우리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던데.”
“적어도 프렌치아에서 녀석을 상대할 사람은 없어.”
“그게 말이 돼?”
“그러니까.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은 해.”
이리엘은 혀로 볼을 긁었다.
루시안이 저 정도로 확신한다면 그의 강함은 의심할 바가 아니었다.
그 우르노를 단칼에 제압했다고 하니 강하기는 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 정도로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이리엘이 말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정말 소드 마스터라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정말 많은 게 달라질 거야. 그토록 고대하던 힘을 얻은 거니까.”
한숨을 깊게 내쉰 이리엘은 쿠키를 우물거리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뭐, 호위로 쓰기는 좋겠네.”
루시안은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녀의 대답이 제네스와의 동행을 반쯤 허락한 것과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이리엘은 쿠키를 하나 더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길래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거야?”
어렵게 도달한 본론이었다.
루시안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떨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떼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리엘은 상념에서 깨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자신의 시중을 들고 있는 유리의 목소리였다.
“응, 들어와.”
방에 들어온 유리는 이리엘에게 곧장 가져온 전언을 전했다.
루시안이 그녀를 찾는다는 이야기였다.
* * *
“제네스 님! 알렌!”
마차에서 내리자 프레디와 체스가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겨 왔다.
크레이 지부에서의 상황을 모두 마무리한 우리는, 지금 막 본부에 도착한 참이었다.
두 녀석은 건치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내가 없는 동안 얼굴들이 폈구나.”
본부에서 편히 있었다 이거지.
그래도 정이 무섭다고, 반갑기는 하다.
체스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얼굴이 피다니요. 제네스 님과 알렌 걱정에 며칠 밤을 잠 못 이뤘는데요.”
“못 믿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프레디가 옆에서 말을 보탰다.
나는 알렌을 보며 말했다.
“루시안은 내가 만날 테니, 너는 가서 회포나 풀어.”
나는 세 녀석을 자유로이 풀어 주었다.
흥이 난 알렌 녀석은 앞장서며 으스댔다.
경험담을 풀 생각에 벌써부터 입이 근질거리는 듯했다.
마적들이 올 때마다 수레 뒤에서 벌벌 떨었던 녀석이지만, 주둥이는 방정맞을 게 빤하다.
그들은 얼싸안고 대낮부터 주점으로 향했다.
그간 무료했을 테니, 신나게 즐기라지.
그들을 보내고 나는 전략회의실로 향했다.
본단에 들어오면서 그리로 오라는 전언을 받았다.
중정에 들어서니 레이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셨습니까.”
“루시안은?”
“이제 곧 올 겁니다. 제네스 님께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어서요.”
“그래?”
나는 별 감흥 없이 대꾸하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책은 어떻게 됐지?”
“바로 출발하셔도 되게끔 준비해 놨습니다.”
그 말인즉, 할렌트 바레인을 벨 만한 판이 준비됐다는 이야기.
나는 이채를 띠며 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벌써 준비될 줄이야.
두뇌 회전이 상상 이상으로 빠른 녀석이었다.
“마적 떼를 토벌하신 이야기는 모두 보고받았습니다. 화끈하게 해결하셨더군요.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는 루시안 님이 오시면 그때 이야기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회의실로 들어온 나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레이크는 내 맞은편에 자리를 비워 두고 그 옆에 앉았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복도 위로 발걸음이 쌓였다. 나는 그것을 듣고 걸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손쉽게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루시안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루시안이 들어왔다.
그 옆을 따르는 이는 예상대로 이리엘이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사내처럼 짧아져 있었다.
나는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앞으로 동행하실 분입니다.”
나는 황당함에 루시안을 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머리색과 생김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내 여동생이야. 이미 한 번 봤지?”
루시안은 이리엘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던 정보고, 관심도 없었기에 나는 내가 원하는 답을 물었다.
“굳이 이 녀석인 이유는?”
“당사자를 앞에 두고 이 녀석이라뇨.”
이리엘이 세모눈을 떴다.
딱 보니 그녀 또한 나와 함께 가는 것이 상당히 불만인 듯했다.
루시안이 서로를 쏘아보는 우리를 번갈아 보며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루시안은 이리엘을 상당히 아꼈다.
동생 바보였지.
그는 이리엘이 사납게 굴며 사고를 칠 때도 매번 저리 자상하게 웃어 댔었다.
어쨌든 그런 녀석이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게 여동생을 맡긴다는 건 어떤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레이크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나서서 말했다.
“할렌트 바레인을 베기 위해서는 일단 수도로 가야 하죠.”
총독부가 수도, 마그네트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서 할렌트를 베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확인되어야 할 소문도 있습니다. 이리엘만이 그 소문의 진위를 확인해 줄 수 있기에, 두 분의 동행이 불가결한 상황입니다.”
“그 소문이 뭔데?”
나의 질문에 세 녀석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그만큼 진중한 사안이라는 의미.
레이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세자 저하께서 살아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