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제21화 나 하나면 충분하다 (3)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들을 봤나.”
검은 부리 부족 족장, 움트라가 쌍심지를 켠 채 말을 몰았다.
그의 눈에 ‘미드크레이’를 제집 안방처럼 유유자적하며 건너고 있는 미친놈들이 잡힌 까닭.
거리가 꽤 멀었지만, 평생을 평야에서 살아온 움트라는 그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팔레이트 상단’의 깃발.
특히나 그들은 ‘미드크레이’에 발을 디디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 아닌가.
‘수레 한 대의 조촐한 행렬이면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보지?’
아무래도 죽고 싶어 환장한 놈들이 분명했다.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움트라는 결코 그들의 자살 행위를 방관할 생각이 없었다.
“가자!”
움트라의 외침에 따라 마적 떼가 평야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말발굽이 벌판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적의 수레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그의 시야로 믿기 어려운 일이 담겼다.
“내가 뭘 본 거지?”
그는 고삐를 잡지 않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순간 헛것을 봤나 싶었다.
자신들에게 마주 달려오는 자가 있는 까닭.
그것도 혼자서.
‘정녕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인가?’
미친놈이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사람이라고 하기엔 다가오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자신들이 다가가고 있는 속도를 감안해도 그랬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제자리에 우뚝 섰다.
아직은 거리가 있었다.
그때, 저편에서 은빛 비늘이 반짝였다.
검 면에 반사된 빛이었다.
멍청한 새끼가 그 멀리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움트라는 썩은 어금니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저 한심한 새끼.”
그런데.
우당탕탕!
부하들이 하나둘 낙마하며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던 녀석들이 무언가에 처맞아 자빠지기라도 하듯, 공중에서 피를 뿜어내며 몸을 뒤집었다.
‘뭐, 뭔데?’
진형이 흐트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눈을 부릅뜬 움트라가 손에 쥔 도끼를 들며 독려했다.
“시X! 그냥 달려!”
녀석이 마법사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부리 부족은 마음먹은 이상 말 머리를 돌리는 일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 지키는 유일한 법칙이었다.
또한, 움트라는 거리만 좁혀지면 녀석의 목을 손쉽게 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홀로 검을 휘두르는 미친놈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전열은 중간중간 비어 있는 움트라의 이처럼 빈틈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움트라의 성난 포효가 평야를 울렸다. 이제 녀석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그때, 다시 한번 녀석의 검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그 빛과 정확히 시선이 맞닿았다.
콰직!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끝없는 평야 위로 별을 품은 밤하늘이 깔렸다. ‘미드크레이’는 새까만 칠흑 속에 잠겨 있었다.
평야의 배꼽이라 불리는 바이콧 언덕.
그 위로 어둠을 밀어내는 횃불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근 10년간 한 번도 모인 적 없던 마적 떼의 족장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마적 연합.’
그들은 본디 여덟 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지금 모인 것은 여섯 명의 족장뿐.
개중 둘은 이미 저세상으로 간 탓이다.
“아주 반가운 얼굴들이군.”
제멋대로 난 턱수염에 산발한 머리칼.
상거지 꼴과 다름없는 그가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는 이들의 면면을 보며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그것을 따라 드러난 이가 밤하늘처럼 까맣다.
“시X. X나게 힘드네.”
그들 중 가장 멀끔하게 생긴 사내가 미리 준비된 자리에 앉으며 툴툴거렸다.
이들의 멀끔하다는 기준은 간단했다. 얼굴에 흉이 보이지 않았다.
“엄살은. 말이 왔지, 네가 왔냐?”
입술을 가로지르는 흉을 가진 사내가 말했다.
“인사는 됐고. 다 모였으면 바로 진행하지.”
덩치가 산처럼 거대한 남자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게 만들 정도로 커다란 몸집을 가졌다.
그의 말대로 바이콧 언덕의 정상에는 어느덧 여섯 명의 수장이 모두 모여 있었다.
“움트라와 슈가토가 죽은 것은 모두 알고 있지?”
거지 같은 사내의 말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이 모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니까.
“어떤 호랑말코 같은 새끼들이 단둘이서 평야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가 말을 잇자, 족장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말을 보태며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우리가 만만해 보이는 거지. 가죽을 벗겨서 말 뒤에다 매달고 다닐 테다. 끌끌.”
“우리가 고작 두 놈 때문에 모이는 게 말이 돼?”
“움트라 그 머저리 새끼. 내가 그리될 줄 알았지.”
“자자, 욕은 그쯤들하고. 문제는 그 새끼가 X나게 강하다는 거야.”
거지 같은 사내가 회의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이들을 달래며 다시 이목을 집중시켰다.
“제까짓 게 강해 봤자지.”
인상이 살벌한 사내가 이죽거렸다.
마치 사람의 탈을 쓴 맹수 같은 생김새였다.
“그럼 네가 혼자 상대해 보든가.”
“뭐?”
도발적인 발언에 그는 금방 살기 어린 눈빛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 그를 두려워할 사람은 없었다.
“두 개의 부족이 그놈한테 당했다. 운 좋게 살아남은 놈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모두 병든 염소 새끼처럼 맥없이 죽어 나갔다더군. 그렇게 쉽게 접근할 문제가 아니야.”
거지 같은 사내는 분위기가 사그라들자 재빨리 말을 이었다.
“모두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그의 말에 여섯 명의 족장은 두 개의 의견으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하나는 함께 치자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고작 두 놈 가지고 그런 일을 벌이는 게 우습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논쟁은 생각보다 쉽게 결론이 났다.
다 함께 치기는 자존심이 상하지만, 홀로 나설 녀석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례적으로 하나가 되어 두 녀석을 죽이기로 합의를 보았다.
떡하니 상단의 깃발을 내건 녀석들을 그냥 보내 줬다간, 자존심도 허락지 않거니와 평야의 장악력이 약해져 많은 분란이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
그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녀석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모든 전력을 모은다면 충분할 거라 그들은 생각했다.
이례적인 합의가 끝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이콧 언덕 아래에는 각자 이끌고 온 병력이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마적들의 전력이었다.
결정을 내린 그들은 지체할 것 없이 움직였다.
평야야 그들의 손바닥 안에 있었고, 인내심이라고는 배워 본 적도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곧장 나아갔다.
수백 마리에 이르는 말이, 대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평야 위로 검은 급류가 흐르는 듯했다.
어느새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수십여 마리의 아리호크가 하늘을 날았다. 그들의 눈을 대신해 줄 감시자들이었다.
얼마 뒤, 하늘에 흩어졌던 아리호크들이 한데 모여 태풍처럼 커다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정해진 것이다.
그들은 그곳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 * *
“저것들이 아침부터 밥 달라고 하는데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더니.”
아침을 차려 먹고 나니, 머리 위에서 매 같은 것들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알렌이 녀석들을 향해 빵 쪼가리를 던져 주었지만, 한 마리도 내려오지 않았다.
먹이가 목적이 아닌 거다.
“저 매가 무엇인지 아느냐?”
“음. 아마, 아리호크 아니겠습니까. 이 근처에서 많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역시 빵보다는 고기를 원하는 걸까요?”
그는 머리 위로 모이는 아리호크들을 보고 그런 순진한 생각을 읊었다.
“고기를 원하기는 하겠지.”
그 고기가 우리겠지만.
“생고기 좀 줘 볼까요?”
“됐다, 아깝게.”
“그래도 아직 좀 남아 있는데…….”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물론, 고기는 넉넉했다. 차가운 기운이 유지되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온 덕택이다.
하지만.
“쟤들은 그런 고기를 원하는 게 아니야.”
“그럼요?”
나는 말하지 않고 검지로 녀석을 가리켰다.
알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손으로 제 가슴팍을 가리켰다.
“저요? 절 왜요!”
“맛있게 생겼잖아.”
“……이 새 새끼들! 저리 안 꺼져!”
알렌은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퍼부으며 의미 없는 손짓을 해 댔다.
그러다 문득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네스 님,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 안 드세요?”
“무슨 느낌.”
“……땅이 울려요.”
둔한 녀석.
이미 아까부터 잔잔한 울림이 있었거늘.
지반의 울림이 알렌도 느낄 만큼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무언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거다.
“서, 설마!”
몸을 한 차례 꿈틀거린 녀석은 수레 위로 재빠르게 올라가 손등으로 햇볕을 가린 뒤,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고는 사색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제네스 님!”
“알아.”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아니요. 지금까지와는 다르다고요…….”
기어들어 가는 알렌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이 전해졌다.
“……먼지구름이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요.”
지평선을 바라보니 확실히 전과 달랐다. 피어오른 먼지구름이 포말처럼 넓게 퍼져 있었다.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달까.
나는 그것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 정도면 근방의 마적들은 모두 모인 것 같다. 생각보다 일이 편하고 빠르게 마무리될 듯했다.
구구구구구!
시야에 마적들이 담기기 시작하자, 지반의 떨림이 더욱 강하게 발바닥을 두드렸다.
“……저 정도도 가능하세요?”
알렌이 나를 보며 불안한 눈빛을 던졌다. 눈대중으로 봤을 때, 한 사람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수였다.
“물론.”
나는 언제나처럼 간단히 답했다.
저런 것들은 떼로 밀려와도 괘념치 않을 터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걸음을 굴렀다.
쿵!
걸음 뒤로 돌풍이 휘몰아쳤다. 나는 녀석들을 향해 달렸고,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그에 따라 뭉뚱그려 보이던 녀석들이 점차 하나하나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남은 손으로 무기를 치켜든 마적들은 하나같이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약해 빠진 녀석들이지만, 말을 타고 일제히 달려오니 압도적인 기세가 온몸을 짓눌러 온다.
그들에게 나는 가볍게 밟아 죽일 수 있는 벌레와 다르지 않을 거였다.
직관적으로 보기에는 그만큼의 전력 차였으니.
그들을 마주해 가며 검을 뽑았다.
손에 쥐어진 뇌운검 위로 아침볕이 부서져 내렸다.
피슈슈슈슈슝!
저편에서 검은색 가시들이 일제히 치솟아 올랐다가 하늘을 뒤덮으며 쏟아져 내렸다.
녀석들이 쏜 화살이 장대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소나기에는 벼락이 함께여야 제맛 아니겠는가.
천령신공 보법편.
제2장 추뢰(追雷).
한 걸음을 내딛자, 세계가 뒤로 주욱 밀려났다.
마적들과의 간격이 한입에 삼켜지듯 좁혀졌다.
쏘아진 신형 뒤로 그림자가 늘어지며 긴 꼬리를 그렸다.
추뢰는 벼락을 쫓는 한 걸음.
빗물 따위에 잡힐 리 없었다.
화살 비는 내 뒤편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어느덧 마적들과의 거리는 그들의 무리가 기다란 벽처럼 느껴질 만큼 상당히 좁혀져 있었다.
나는 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제 내 차례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1장 천단일선(天斷一線).
검이 좌측 끝에서 우측 끝까지 그어졌다.
그를 따라 지평선 위로 푸른색의 수평선이 그어졌다.
실처럼 얇고 기다란 검기.
서슬 퍼런 궤적이 마적들 위로 그려지자, 선이 머물렀던 자리에 붉은 꽃이 만발했다.
마적 떼의 1선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마적들은 나자빠진 동료의 시체를 짓밟고 뛰어넘으며 달려왔다.
나는 다시금 검을 뿌렸다.
궤적을 따라 쏘아진 섬광이 긴 꼬리를 그리며 나아가 적들을 꿰었다.
검기가 화살처럼 적들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검광이 번쩍일 때마다 마적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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