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제16화 증명 (4)
대련이 시작되자, 헤로핀은 내게 검을 겨눴다.
날카로운 빛을 머금은 칼끝이 나를 향한다.
칼날 위로 흐르는 서늘한 기운.
나는 그것만으로도 녀석의 실력을 알았다.
헤로핀이 조금씩 간격을 좁혀 왔다.
화렌카를 꺾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그의 움직임은 신중했다.
그가 가벼운 대화를 걸어 왔다.
“그럼 실력 좀 보겠······.”
그는 말을 하다 말았다.
어느새 목에 검이 겨눠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 검으로 녀석의 말까지 잘라 버렸다.
헤로핀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그것은 대련을 지켜보던 이들 또한 마찬가지.
“…….”
뜨거웠던 장내가 찬물이 뿌려진 것처럼 고요해졌다. 시끄럽게 환호하던 목소리가 일순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일 수에 목에 검이 겨눠지며 승부가 가려졌다. 맥이 탁, 풀려 버릴 정도로 허무한 결말이었다.
“와하하하하!”
정신을 차린 이들이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웃음 속에 섞이는 고성을 들어 보면 헤로핀의 방심을 탓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묵례한 헤로핀이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내려갔다. 그 또한 자신이 방심했다고 생각할 뿐, 패배의 원인을 나의 강함 때문이라고 생각지는 못한 듯했다.
지금 여기 있는 모두가 그랬다.
본래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법이니까.
“후세까지 영원히 기억될 헤로핀의 쓰라린 패배를 딛고 다음 대련에 올라설 인물은! 깊은 전장을 어슬렁거리는 맹수이자,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상대의 다리를 굳게 만드는! 제국군을 잡아먹는 대륙의 포식자, 일! 리! 아!”
사회자가 목에 핏발을 세우자, 군중 속에서 상기된 표정의 여인이 벌떡 일어났다.
늘씬한 체구의 그녀는 양팔에 무식해 보일 정도로 큰 건틀릿을 낀 채, 주먹을 쾅쾅 부딪치며 걸어 나왔다.
맹수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다듬어지지 않은 사나운 기세.
거리를 두고 선 녀석이 유연한 몸을 비틀 때마다 건틀릿이 절그럭거렸다.
“나는 방심하지 않으니 기대해도 좋을 거야.”
그녀는 시작 신호가 떨어지기도 전부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저런 대사를 내뱉었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눈빛이 저러할까.
그녀는 혀로 윗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일리아는 조심스러웠던 헤로핀과 달리 대련이 시작되기 전부터 근육을 수축하며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시작과 동시에 돌진해 올 요량인 듯했다.
“자, 준비하시고! 대련 시작―!”
대련이 시작되기 무섭게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을 강하게 박찬 일리아가 저돌적인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헤로핀과 반대되는 적극적인 공세.
하지만 그럼에도 결과는 똑같았다.
이어지는 무거운 침묵까지도.
“…….”
일리아는 주먹을 쥔 채 제자리에 굳어 있었다. 목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장내에 다시금 적막이 내렸다.
대련이 시작되고 호흡 한번 가다듬지 못했다.
그런데 그새 승패가 가려졌다.
당황한 사회자가 반쯤 넋을 놓은 채 소리쳤다.
“제, 제네스 승리!”
* * *
일리아의 패배가 확실시되는 순간에도, 관중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알렌과 프레디, 체스도 얼이 빠진 건 마찬가지.
그들은 유일하게 제네스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지만, 대련이라 말하기 민망할 정도의 결과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 허탈하고 허망한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그냥 꿈같다.
그만큼 상식을 벗어난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헤로핀과 일리아는 ‘북부의 흰사자’에서 출중한 무력을 자랑하는 이들이니까…….
아니, 그렇지 않은 자들일지라도.
적어도 ‘와! 강하다!’, ‘아니, 어떻게 저런 움직임을!’ 등의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합을 주고받다가 승패가 가려져야 ‘아, 저 녀석 엄청 강하구나.’ 하고 받아들일 게 아닌가.
그런데 이건 뭐 승패가 가려졌음에도 대련을 시작도 안 한 기분이다.
똥을 중간에 끊어도 이 정도로 찝찝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제네스가 사회자를 보며 말했다.
“계속 진행해.”
“아아, 넵. 다음 상대가 누구였더라.”
허둥지둥 댄 사회자가 다음 상대를 황급히 호명했다.
“그러니까 다음 상대는…… 하, 하늘을 뒤흔드는 전격! 변절자들의 공포이자 제국군의 사신! 흰사자의 가장 날카로운 송곳니이면서,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천년의 고목과도 같이 강직한 마음을 가진 사내! 전격의 창! 우! 르! 노!”
“와아아아!”
“우르노! 우르노!”
함성과 함께 화렌카 옆에 있던 거구의 사내가 기다란 창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관중들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랗게 그를 연호하고 있었다.
대련자 중 유일한 간부인 그는, 진영 내에서 한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다들 이번만큼은 지금까지와 다른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우르노의 묵직한 걸음이 연무장 위로 올랐다.
그리고 이내 환호성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지금까지와 달리 눈을 부릅뜨고 연무장을 지켜보았다.
첫 번째 대련은 이렇다 할 겨를도 없이 흘러갔고, 두 번째 대련은 설마 하며 지나 보냈다.
세 번째에 이르니 의심할 것은 이제 자신들의 눈이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
제네스를 마주한 우르노는 창대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화렌카에게 녀석의 강함을 들었기에,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 또한 우연이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다.
손끝에 땀이 차올랐다.
대련임에도 이렇게 긴장되는 것은 처음.
만약, 자신이 헤로핀과 일리아와 대련했다면 그렇게 압도적인 면모를 보일 수 있었을까?
우르노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이러다 자칫 자신까지도 허무하게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지만, 알 수 없는 불안이 예민한 육감을 간질이고 있었다.
우르노는 최대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며 검을 늘어뜨리고 있는 제네스 앞에 섰다.
“대련 시작―!”
사회자의 외침에도 우르노는 움직이지 않았다.
관중석에서는 옆 사람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묵직한 적막이 이어졌다.
다들 숨 쉬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긴장한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안에서 여유로운 것은 오직 제네스뿐이었다.
그런 제네스를 보며 우르노는 생각했다.
만약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준 결과가 온전히 그의 실력이라면.
말도 안 될 정도의 압도적인 강함이, 진짜 그의 것이라면.
그는 자신이 가늠할 수 없는 존재.
‘반드시 1합은 받아 넘긴다.’
우르노는 온몸의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그는 전격의 창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굉장히 방어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었다.
제네스가 내지르는 단, 일 검을 막아 내기 위해.
가만히 서 있던 제네스의 검이 흔들린 건 그때였다.
온 신경을 검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느낄 수 있는 움직임.
살랑거리는 바람에 풀이 일렁이듯 아주 미세한 흐름을 그는 보았다.
우르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해 창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과연 저것을 검이라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섬광을 보았다.
새하얀 검광에 천지가 갈라지며 주변의 모든 것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번쩍인 빛줄기가 세상을 삼켰다.
그럼에도 그는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반을 디딘 발은 바닥에 틀어박힌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고, 전신은 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온 힘을 다해도 거스를 수 없는 압도적인 검세.
마치, 빛의 해일이 밀어닥치는 듯했다.
솨아―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흩날리던 머리칼이 가라앉는 동시에 세상을 가득 채웠던 검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제네스는 평온한 표정으로 그 앞에 존재했다.
목에서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있는 힘껏 들어 올린 창대는 가슴팍에 머물러 있었다.
우르노는 허탈한 눈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멈춰 있었던 시간이 그제야 제 속도를 찾아 흘러갔다.
이렇게 무력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저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 압도적인 무력.
제네스의 검은 자신이 알던 세계를 벗어나 있었다.
장내에는 벌써 세 번째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전과는 의미가 달랐다.
모두가 그의 검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본 게 아니라, 느꼈다.
모든 것을 짓누르는 그 압도적인 힘을.
아무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계획이 틀어지겠군.’
레이크는 제네스의 압도적인 면모를 보며 지금까지 세워 두었던 모든 구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수년 동안 밤잠을 설쳐 가며 세웠던 계획이, 무(無)로 돌아가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존재로 인해.
그럼에도 레이크는 굉장히 오랜만에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였다.
철저히 쌓아 올렸던 탑은 의미를 잃고 무너졌지만.
그의 무력을 얻을 수 있다면 레이크는, 옆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이 남자에게 천하를 쥐여 줄 자신이 있었다.
“…….”
루시안은 그런 레이크의 시선도 느끼지 못한 채, 오직 제네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본 그의 검은 하늘과 같았다.
눈앞에 선명히 존재하지만,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그런 하늘.
단언컨대 이런 검은 듣도 보도 못했다.
온몸을 울리는 전율이 가라앉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듯 뛰며 귓가에서 쿵쾅거렸다.
그의 검을 보니, 마치 세상이 손안에 들어온 듯했다.
저 검을 가질 수만 있다면.
저자를 품을 수만 있다면.
꿈에나 그려 왔던 일들이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어이 사회자, 마무리 안 해?”
제네스의 무심한 말이 정지되어 있던 시간을 일깨웠다.
그제야 사람들은 각자의 공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와아아아!!”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연무장을 흔들었다.
알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사위를 뒤덮고 있었다.
* * *
나는 이들의 함성을 들으며 내 말이 잘 전달되었음을 알았다.
그것을 위한 검이었으니까.
세 번의 대련 모두 같은 결과로 승리했지만, 일 검에 담긴 힘은 각기 달랐다.
같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들어간 힘이 달랐다는 의미.
나는 의도적으로 그들을 일 검에 제압했다.
가늠되지 않는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기 위해서.
나답지 않지만, 그들을 격려해 주기 위함이었다.
이미 패망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프렌치아가 패망한 지도 어언 10년.
이들은 그동안 끊임없이 나라를 위해 싸워 왔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이 가까워졌나?
아니었다.
독립의 날에 대한 확신은 누구도 할 수 없었다.
독립군이 된다는 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캄캄한 어둠 속을 걷는 것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어려운 것이고.
그럼에도 이들은 그 불확실한 꿈에 목숨을 걸었다.
오직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그래서 이리했다.
이들에게 작게나마 보답해 주고 싶었다.
정마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나는, 나의 강함이 전장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끝이 가늠되지 않는 강함은 경외의 대상이 된다.
그 대상이 곁에 있을 때는 더욱이 그렇다.
이들은 자연스레 나와 함께하는 상상을 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끝에서 자신의 이상을 선명히 보았을 테지.
나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보여 준 것이다.
검으로 말해준 것이다.
너희들이 꿈꾸던 독립이 이제 눈앞에 왔다고.
내가 그리 만들어 줄 것이라고.
그것이 내가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격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