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제11화 까마귀 기사단 (1)
입 안이 쓰다.
왕세자로서 이 상황에 책임이 있는 나는, 죽음으로 모두 잊고 편히 살아왔는데.
이에 대한 고통은 아무 죄 없는 국민들이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었다.
푸확!
붉은 핏물이 새하얀 벽에 튀었다.
방울로 맺혔던 피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내 손에는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파르페는 갈라져 핏물을 왈칵 쏟아 내는 목을 부여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본인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허물어졌다.
“……!”
종업원은 그 광경에 입을 막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는 이 상황을 모르는 거다. 그러니 누군가 묻거든, 내가 나가 보라 했다고 답하거라. 또 누군가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냐고 묻거든 본 대로 말하라.”
“아, 아닙니다. 구해 주셨는데요.”
그녀는 생각보다 강단 있는 얼굴로 내게 의사를 밝혔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나를 본 자가 많으니, 네가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 이만 나가 보거라.”
나는 그녀를 보내고 조금 후에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럼 그녀는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겠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종업원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방을 나섰다.
나는 그녀가 떠난 자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일까.
일면식도 없던 여종업원이 처한 상황에.
그녀의 삶에 드리운 불합리함에.
가슴 한편이 쑤셔온다.
마치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단순한 동정은 아니었다.
부당한 일은 중원에도 차고 넘쳤으니까.
그랬기에 오히려 이 차이가 손쉽게 구분이 갔다.
아무래도 나는.
그녀를 단순한 종업원이 아닌, 내가 돌봤어야 할 국민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 * *
“이러다 괜히 한 대 맞는 거 아냐?”
프레디는 불안한 듯 괜히 이곳저곳을 살피며 눈치를 보았다.
“그러니까, 괜히 한소리 들을라.”
체스 또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알렌은 이들과 달리 확신에 찬 표정으로 짐을 싸고 있었다.
“너희는 요 며칠간 겪어보고도 제네스 님 성격을 몰라? 그 인간 성격에 사고 안 치고 얌전히 돌아오겠냐고.”
“…….”
둘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제네스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금껏 겪은 그의 성격을 봤을 때 앞으로의 일이 훤히 보였다.
그래서 지금, 제네스가 오면 바로 떠날 수 있게끔 짐을 꾸리는 와중이었고.
“그래, 일단 싸 놓자. 괜히 부랴부랴 떠나는 것보다는 낫지.”
프레디는 알렌의 말에 동조하며 어제 구매한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네스가 사고 치고 돌아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말에게 재갈까지 물림으로써 떠날 채비를 완전히 마친 그들은, 여관 밖으로 나와 제네스가 돌아올 길목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곧장 떠날 수 있게 준비를 마치니 마음이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언제쯤 오시려나?”
“그러게. 아까 보니까 그 상사 놈, 예사 놈이 아니던데.”
“눈치가 빨라 보이는 게, 맞을 짓을 할 것 같지는 않더라.”
프레디와 체스의 이야기를 들은 알렌이 고개를 저으며 반론했다.
“무슨 소리야. 그럼 여태 나는 눈치 없이 맞을 짓 해서 맞았냐?”
프레디와 체스는 무언의 긍정을 택했다.
알렌은 확실히 제네스의 좋지도 않은 성질을 건드는 구석이 있었다.
본인은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알렌은 누가 볼까,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 그 상사 놈, 지금쯤 흠씬 두들겨 맞고 있을걸. 솔직히 제네스 님 성격이 좀 까탈스럽냐? 괴팍하고 제멋대로인 그 성격을 대체 누가 맞추겠어.”
빡!
“끄악!”
알렌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난데없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끙. 제, 제네스 님.”
머리통을 부여잡은 그의 눈앞에는 제네스가 떡하니 서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눈알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이 쏙 들어갔다.
“하여간 맞을 짓을 골라 해요. 밖에는 왜들 나와 있어?”
“하하. 그게, 제네스 님 오시면 바로 떠나려고요.”
호박씨를 까던 알렌은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잘했네. 너희들은 곧장 도시를 떠나라.”
“네? 역시 사고 치셨어요?”
“내가 애냐? 사고는 무슨. 훈계 좀 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프레디의 물음에 제네스는 담담히 답했다.
“상사 놈을 죽였다.”
셋은 동시에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제네스는 괘념치 않고 말을 이었다.
“다음 목적지가 파레인시였나?”
“예.”
“먼저 가 있거라.”
“제네스 님은요?”
체스가 염려하며 물었다.
“나는 뒤처리를 하고 가야지.”
“숲을 이용하면 충분히 따돌릴 수 있을 겁니다. 같이 가시죠.”
“이곳 애들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우릴 쫓는 놈들이 또 있잖냐.”
“예? 그럼 설마!”
제네스의 말을 이해한 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나는 까마귀 놈들 좀 정리하고 가마.”
“……혼자서 가능하시겠습니까?”
“입 아프게 하지 말고 어서 가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제국군이 들이닥칠 거다.”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국새는 저희가…….”
제네스의 세모눈을 본 프레디는 곧장 말을 바꾸었다.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제네스의 말대로 도시를 벗어나는 수밖에.
어떤 상황이든 자신들은 오히려 방해만 될 터였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 놓았던 셋은 말에 올라 성문을 향해 달렸다.
* * *
나는 멀어져 가는 이들을 바라봤다.
이들의 솜씨를 봤을 때, 변방에 있는 제국군에게 쉬이 잡히지는 않을 거다.
고작 상사 한 놈 죽였다고 얼마나 성의 있게 쫓겠는가.
나는 몸을 돌려 좁은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물 간의 틈이 좁아 대낮임에도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뒤를 돌아선 나는 허공에 말했다.
“나와라.”
골목의 맞은편에서 평복을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지나가는 이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까마귀 녀석이었다.
나는 어제부터 녀석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스릉.
놈이 앞섶에서 짧은 단검을 뽑았다.
이미 마지막을 결심한 듯했다.
나는 검을 뽑는 대신 가죽 주머니 안에 보관하고 있던 국새를 꺼내었다.
결사 항전을 대비했던 녀석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국새에 기를 밀어 넣자 오색찬란한 빛이 골목의 그림자를 밀어냈다.
“지금 뭐 하자는―.”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내가 던진 국새를 받기 위해 다급히 자세를 잡았다.
내 손을 떠난 국새는 포물선을 그리며 녀석의 품에 떨어졌다.
국새를 받은 녀석이 나를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골목을 채우던 긴장감이 실 끊어진 연처럼 한순간에 풀어졌다.
“원하던 게 이거 아니었나? 가지고 가라.”
“……나를 농락할 셈이냐?”
녀석은 당연히 나를 믿지 않았다.
나는 파리 쫓듯 손을 내저었다.
“누군가가 뒤를 쫓는 걸 바라지 않을 뿐이야. 가지고 가랄 때 가.”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안 믿으면 어쩔 건데.”
녀석은 답을 하지 못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놈은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갈 거면서 튕기기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내빼는 걸 보니, 내 실력을 어느 정도는 파악한 듯하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참,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치졸하게 덫을 놓는 건.
내게는 무엇이든 벨 힘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은 지켜야 할 것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까마귀들이 원하는 상황에서 난전에 들어선다면, 아무리 나라도 세 녀석의 목숨을 확실하게 보장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녀석들에게 국새를 건네주었다.
지키는 싸움은 완전무결한 승리가 아니면 의미가 없기에.
무언가를 지킨다는 건 그렇기에 더 어렵다.
* * *
까마귀 기사단의 소대원인 테더는 숙소로 돌아와 곧장 자신의 말을 타곤 전력을 다해 도시를 벗어났다.
대외적으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에 본대는 도시에서 거리를 둔 숲속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자신은 척후병으로 녀석들의 동태를 살피는 와중이었고.
그런데 그놈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국새를 던져 주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농락하는 것이라 여겼으나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그 녀석이 팔체라토와 그의 기사들을 벤 자가 분명했다.
시체에 남은 검흔을 보았을 때 알았지만, 확실히 범상치 않은 자였다.
두두두두!
말발굽이 들판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가며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주둔지.
그는 곧장 소대장, 러셀에게 향했다.
테더는 러셀을 마주하자마자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에게 러셀은 의아한 물음을 던졌다.
“어찌 된 일이냐?”
말의 거친 호흡만 보아도 다급함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생각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상황이 예상외다.
“국새를 가지고 왔습니다.”
“뭐?”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부하 녀석이 떡하니 국새를 가지고 왔다.
러셀은 국새를 찬찬히 살폈다.
마나를 집어넣자 오색찬란한 빛이 주변에 뻗쳐 나갔다.
진품이 확실했다.
“상황을 말해 보거라.”
“그게―.”
테더에게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러셀은 더욱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말이 되지 않았다.
국새가 가진 의미는 그리 가볍지 않으니까.
독립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괜히 은밀히 움직인 게 아니었다.
국새는 작은 산불만 한 전장을 프렌치아 전역에 뻗치게 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화력을 가진 불씨였다.
그런데 그런 국새를 이렇게 쉽게 건넨다고?
대체 무슨 이유일까.
녀석의 의도가 예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의문은 생각보다 쉽게 풀어졌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테더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수고했다, 란 말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러셀이 건넨 격려가 아니었다.
러셀의 표정 또한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몸을 일으킨 테더는 소리의 근원을 쫓아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눈가에 뒷짐을 진 여유로운 태도의 청년이 담겼다.
적진에 홀로 들어와 있음에도 산책하러 나온 사람같이 편안한 분위기.
스멀스멀 기어 오는 어둠 속에서, 유독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가 눈에 띄었다.
테더는 그자를 단숨에 알아봤다.
“잠시 맡겨 둔 것 좀 찾으러 왔는데.”
그는 자신에게 국새를 건넸던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