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제10화 나라를 잃었다는 건 (2)
표정을 부드럽게 편 파르페가 말했다.
“행색은 어떻다고 하더냐?”
“이국적으로 생기기는 했으나, 피부가 희고 곱상하게 잘생긴 데다 홀로 고급 정장을 입고 있어 눈에 확 띄었다고 합니다.”
“그래?”
정황상 귀족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파르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윌슨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수고했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쩌면 귀족과 연이 닿을 좋은 기회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몇몇의 선임들이 귀족과의 작은 연을 통해 본국으로 귀국하지 않았던가.
자신에게도 드디어 그런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 * *
아침이 밝기 무섭게 요란한 발걸음이 복도를 울렸다.
나는 그 소리의 질감만 듣고도 누군지 쉽게 예측해 냈다.
방음이 좋지도 않았거니와, 나는 마음만 먹으면 옆 건물에서 나누는 은밀한 속삭임까지 들을 수 있는 청각을 가지고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며 알렌이 사색에 질린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다급하게, 하지만 조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네스 님! 큰일 났습니다!”
나는 이미 밖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녀석의 무례함부터 꾸짖었다.
“누가 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여냐.”
“지금 그런 사소한 걸로 트집 잡으실 때가 아니에요! 아래층에 제국군이 몰려왔다니까요!”
알렌은 내 꾸지람에도 눈을 부릅뜨며 작은 소리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나도 알아, 인마.”
빡!
“끄악!”
나는 건방진 알렌의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문을 나섰다. 녀석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문 앞에 쪼그려 앉아 고통을 삭였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미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결할지 방도 또한 정해 놓았고.
이럴 때는 어설프게 나가는 것보다 막 나가는 게 최선이다.
내가 많이 해 봐서 안다.
계단을 따라 식당으로 내려가니 제국군들이 홀을 차지하고 있었다.
개중 한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짧은 빨간 머리에 오른쪽 뺨에 길게 난 상흔을 가진 사내.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고, 계급은 상사였다.
이자가 지휘관인 듯하다.
나는 그의 방문 이유를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했지?”
“어젯밤 제국군이 폭행당했다. 그 사건에 관해 이야기 좀 나눴으면 하는데.”
짜악!
홀에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사의 얼굴이 틀어져 있었고 한쪽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뒤쪽에 있던 병사들이 나서려 하자 상사가 손을 들고 막았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무례함을 못 견뎌 하는 사람이다.”
“……성함을 밝혀주시겠습니까.”
녀석은 뺨 한 대에 곧장 기세를 죽였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순응이 훨씬 빨랐다.
어떤 증거도 보이지 않았는데, 바로 고개를 숙일 줄이야.
뭐 하는 놈이지?
예상외였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고 미리 준비한 이름을 내었다.
“크레온 바스티스.”
내 말에 홀이 한차례 들썩이는 듯했다.
바스티스 가문의 이름은 그토록 무거웠다.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이니 당연했다.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그것이 내 이름이다.”
말을 끝내는 동시에 기세를 끌어올려 일대의 공간을 장악했다.
묵직한 위엄이 사위를 짓눌렀다.
병사들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질려간다.
전신을 짓눌러오는 위압에 숨쉬기조차 어려울 터.
식은땀을 흘리던 상사는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며 우렁차게 인사를 해왔다.
“저는 네르텔시 경비단 북부기동대 대장, 상사 파르페라고 합니다! 알아보지 못한 무례를 깊이 사죄드리겠습니다!”
과연, 기세를 드러낸 효과는 확실했다.
녀석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대로 속아 넘어갔다.
내가 말했다.
“현재 가문의 일을 보는 중이다.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다.”
“부하 놈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탓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식사라도 대접하면서 제대로 사죄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파르페의 붉은색 동공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연줄이라도 한번 놓아 보려고 혈안이 된 눈동자.
나는 그것을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녀석에게서 돈 냄새가 났다.
내가 이런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거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점심이나 한 끼 하지. 장소를 알려 주면 채비하고 가도록 하마.”
중원에서 관리들을 등쳐 먹던 솜씨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방으로 오르는 내 뒤를 세 녀석이 쪼르르 쫓아왔다.
“제네스 님 대체 어쩌시려고요? 이러다 걸리면 제대로 큰일 납니다.”
알렌이 내게 바짝 붙으며 속삭여 왔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
“걱정할 거 없다. 여비 벌어 올 테니 얌전히들 기다리고 있어.”
나는 불안에 떠는 녀석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목숨도 구해 줘, 여비도 벌어 와.
이 녀석들이 내 시중을 드는 건지 내가 이놈들의 시중을 드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재주를 썩힐 수도 없고.
능력이 많아도 참으로 고달픈 일이다.
잠시 후, 채비를 마친 나는 녀석이 남겨 둔 주소로 걸음을 옮겼다.
허름한 건물들이 늘어선 골목을 빠져나오자 반듯이 닦인 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의 건물은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고작 몇 걸음 차이만으로 건물부터 사람들의 표정까지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달랐다.
이 거리를 거니는 이들의 대부분은 프렌치아 사람이 아니었다.
우습게도 입은 옷과 표정만으로 그것이 구분되었다.
“이곳이군.”
시야에 꽤 고풍스러운 건물이 잡혔다.
‘스레안 레스토랑.’
딱 봐도 돈깨나 있는 자들이나 이용할 법한 고급 식당이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상사 놈이 어디서 이런 돈이 났을지는 빤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종업원들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파르페 상사에게 안내해 주겠나.”
종업원은 이미 언질을 들었는지 곧장 깊고 은밀한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으로 발을 디디자, 기다리고 있던 파르페 상사가 몸을 일으키며 나를 맞이했다.
“앉지.”
방 중심에는 둥그런 식탁이 있었고, 새하얀 식탁보 위로 분위기를 내는 은색 촛대와 작은 꽃병이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양한 전채 요리들이 식탁을 풍요롭게 채웠다.
상당히 공을 들인 티가 났다.
느긋하게 식사를 하며 상투적인 대화가 오갔다.
나는 왕세자 시절 지겹도록 익힌 식사 예절을 상기하며 귀족스러움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
“와인 한잔하시겠습니까?”
“좋지.”
방 안에 있던 여성 종업원이 빈 와인 잔에 레드 와인을 따랐다.
향이 깊고 묵직한 와인이었다.
“레인하오 지방에서 주조된 와인인데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파르페가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
나는 와인을 한 모금 음미한 뒤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쁘지는 않군.”
“입맛에 맞으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곧 본가로 돌아가신다고요.”
겉돌던 이야기가 슬슬 본론으로 방향을 틀었다. 녀석도 나도 원하는 바가 명백했으니까.
“그렇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어젯밤 누추한 곳에 주무셔서 여독이 풀리셨나 모르겠습니다.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성심껏 모셨을 텐데요.”
“공무 중에는 어쩔 수 없지. 말했듯, 은밀히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
파르페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편에서 시중을 들던 종업원에게 손짓을 했다.
종업원은 작은 함을 내게 전했다.
“가시는 길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 작게나마 성의를 준비해 봤습니다.”
“뭘 이런 것을 다.”
함을 슬쩍 당기며 무게를 느껴 보니, 제법 묵직했다. 내가 현재 여비가 없다는 것을 이미 파악한 듯했다.
어제 먹은 저녁 메뉴만 봐도 손쉽게 알 수 있을 거였다.
별다른 공작을 벌이지도 않았는데, 파르페는 별다른 의심 없이 술술 넘어왔다.
그만큼 욕망에 눈이 멀었다는 증거.
나는 그를 보며 호의의 눈짓을 보냈다.
“자네의 성의는 본가에 돌아가서도 잊지 않을 것이야.”
“크레온 님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제게는 영광입니다.”
“안 그래도 눈치 빠른 자가 하나 필요했었는데 말이야.”
그는 내 말에, 눈을 부릅뜨며 관심을 내비쳤다.
나는 냅킨으로 입 주변을 정리하며 선심 쓰듯 말했다.
“아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내 장담하지.”
“감사합니다!”
파르페는 테이블에 코를 박을 것처럼 허리를 깊이 숙였다.
고개를 든 녀석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나 본데, 지금의 기쁨은 훗날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팍에 틀어박힐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연락을 기다리며 아주 피가 바짝 마를 테지.
“그럼 후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옆에서 식사를 돕던 여종업원이 테이블에 놓인 그릇을 하나씩 치워 갔다.
파르페 녀석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말을 꺼내며, 몸을 돌렸다.
“별것은 아닌데, 제가 따로 또 준비한-”
그런 파르페와 부딪힌 여종업원이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놓쳤다.
쨍그랑!
떨어진 그릇이 산산이 부서지며 음식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색에 질린 그녀는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했고, 파르페는 자신의 옷에 튄 음식물을 보며 표정을 구겼다.
“이 개 같은 년이!”
벌떡 일어난 파르페가 종업원에게 가차 없이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손은 보기 좋게 허공을 갈랐다.
내가 종업원의 옷자락을 슬쩍 끌어당긴 탓이다.
“뭐, 뭐야?”
그는 헛손질한 자신의 손을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종업원이 바닥에 바짝 엎드려 바르르 떨었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제가 와서 부딪쳐놓고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잘못도 하지 않은 이들이 죄를 빌고 있었다.
“천한 년이 감히.”
나는 다시 나서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
“상사.”
내 부름에, 그는 금세 흥분을 가라앉히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밖에서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는 벽에 장식되어 있던 검을 한 자루 뽑아 들고는, 바짝 엎드린 종업원의 머리칼을 움켜쥐기 위해 손을 뻗었다.
“감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알고.”
이딴 말을 지껄이면서.
그는 자신의 출세가 달린 이 자리가 더럽혀진 것에 몹시 화가 난 듯싶었다.
턱.
나는 조용히 일어나 파르페의 어깨를 잡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파르페는 나를 당황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물었다.
“제국민 아닌가?”
“아아. 하하, 아닙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서 일하는 연놈들은 요리사와 지배인을 제외하곤 모두 프렌치 녀석들입니다.”
나의 물음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이.
나는 종업원이 프렌치아 사람인 걸 몰라 물은 것이 아니었다.
내 질문은 그녀가 제국민이었으면 어떻게 했을 것이냐, 였다.
파르페는 환한 미소로 그 답을 해 줬다.
예상하던 바였다.
세상은 본래 약육강식의 논리로 흐른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다.
강자는 약자를 짓밟는다.
그나마 그런 본성을 억제시키고, 약자를 지켜 주는 울타리가 법이다.
하지만 나라를 잃은 국민에게는 그 울타리가 없다.
“제발,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나는 바짝 엎드린 채 두 손을 싹싹 빌고 있는 종업원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는 무슨 잘못을 하여 이리 사죄하고 있는가.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패망한 왕국에서 태어난 죄가 전부일 것이다.
내가 이 나라에 왕세자였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던 것처럼.
현재, 프렌치아 국민들은 초원에 풀어진 양 떼와 같았다.
배고픈 이리들이 그들을 마음껏 뜯어먹었다.
그들의 삶은 늑대의 배고픔에 따라 결정됐다.
나라가 있어도 억울한 일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나라까지 없는 국민의 삶이란, 참혹할 수밖에.
흉포한 포식자 앞에 놓인 발가벗은 피식자.
나라를 잃었다는 건, 그런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