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제9화 나라를 잃었다는 건 (1)
경비병들의 흉갑에는 크레본 제국을 상징하는 블랙 드래곤이 그려져 있었다.
나라가 패망했다는 걸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왕국의 군대가 해산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심사가 뒤틀린다.
안채에 원수가 들어앉은 기분.
확실히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차이가 크다.
그렇다고 보이는 족족 벨 수도 없는 일.
나는 불편함을 참은 채 성문을 넘었다.
경비병들의 이목쯤이야, 천천히 걸어도 속일 수 있었다.
도시는 다양한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자연스레 전생이 떠오르는 풍경.
당연하게도 중원과는 건물부터 사람까지 모두 달랐다.
나는 느려 터진 세 녀석을 기다리며 지나다니는 이들을 구경했다.
지나다니는 이들 또한 나를 유심히 살폈다.
내 복색이 워낙 특이한 탓이다.
세 녀석이 도착한 건,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지루하다 못해 화가 뻗칠 지경이 되어서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검문소를 통과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프레디가 내 표정을 보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너희들의 꼬질꼬질한 얼굴이 보고 싶을 정도로 오래 기다렸다. 우선, 의류점으로 가자. 지나가는 사람마다 나를 보지 않고 가는 이가 없구나.”
우리는 시내로 걸음을 옮겼다.
숙소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시간 후였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식당.
자그만 홀은 취한 놈들의 입이 모여 정신없이 시끄러웠다.
늦은 저녁이다 보니, 술 한잔 걸친 이들의 쓸모없는 농담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우리는 방에 짐을 두고 1층 식당에 내려와 있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머리카락도 자르고 발렌시아 대륙의 의복을 입고 있으니 뭔가 어색하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은 평소 입던 무복과 달리 몸의 체형이 잘 드러나는 고급스러운 정장이었다.
과거 왕세자로서 입었던 취향 때문인지 모험가 같은 옷들은 마음에 차지 않아 이것을 골랐는데, 생각보다 불편함도 없고 귀족스러운 것이 마음에 들었다.
머리도 발렌시아 대륙의 사람처럼 깔끔히 쳐 냈다. 인물이 훤하다 보니 뭐든 잘 어울렸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굉장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들의 초라함 때문이다.
이걸 먹으라고 내놓은 건가?
나는 포크로 딱 봐도 딱딱해 보이는 빵을 푹푹 찔렀다. 바위처럼 단단하다.
과거 거지의 삶을 살았던 나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에 관해 상당히 까탈스러운 편이다.
그때의 기억이 서러워 그렇다.
나는 바위를 두드리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자금이 많이 부족하냐?”
“……네. 제네스 님의 의복이 비싸기도 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돈도 적다 보니 맛있는 음식을 먹을 형편은 안 됩니다.”
체스가 빵 조각을 뜯으며 말했다.
“수프에 찍어 먹으면 보기보다 맛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빵 쪼가리를 접시에 가져왔다.
천하제일이라도 돈 없으면 서러운 건 매한가지다.
빌어먹을.
나는 푸석한 빵을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식당에 있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구조는 객잔과 달랐지만, 이곳 또한 숙박과 식당을 함께 운영하다 보니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비슷했다.
게다가 술 한잔 걸친 사내놈들의 대화 주제는 무림과 어찌나 비슷한지,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인 듯싶다.
갑작스런 소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쾅!
때아닌 큰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 근원지로 집중되었다.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식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문을 어찌나 세게 걷어찼는지, 반쯤 뜯어진 문이 고주망태처럼 해롱거렸다.
“뭘 봐 새끼들아! 구경났어?”
가장 앞서 있던 녀석이 사방에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그들의 가슴팍 왼편에는 블랙 드래곤이 수놓아져 있었다.
제국군이었다.
한껏 거들먹거리며 가운데 테이블에 앉는 이들.
그들의 등장에 시끌벅적했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었다.
“X발. 프렌치 새끼들의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군.”
“오늘 하루만 참아 보세. 다른 곳은 자리가 없는 걸 어쩌겠나.”
현재 우리가 묵고 있는 작은 여관은 깊은 골목길 구석에 있는, 싼 가격만큼 허름한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주 고객이 프렌치아 사람들이었다.
“프렌치라는 말이 뭐지?”
나는 그 의미를 대충 예상하면서도, 접시에 코를 박고 있는 알렌에게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분한 듯 콧김을 뿜어 대며 속삭였다.
“제국 놈들이 저희를 조롱하듯 얕잡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예상대로였다.
“어이, 주문 받아!”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놈들이 앉은 테이블에서 들려왔다.
주변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소곤소곤 대화를 이어 나가는 상황이라 그들의 행패는 내 귀에 더욱 거슬렸다.
“……참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프레디가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웬만해서는 그럴 작정이다.
저들을 죽이는 건 단순한 화풀이밖에 안 되니까.
그리고 나는 내일 이곳에 세 녀석을 두고 따로 볼일이 있었다.
의복을 구매하면서 우리를 감시하는 이의 시선을 느낀 까닭.
까마귀 녀석들의 척후병이 분명했다.
아마 이 근방에 와 있겠지.
까마귀 기사단은 단원 모두가 익스퍼트 경지에 이른 기사단이라고 했다.
총독 휘하에 있으며, 현 프렌치아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기사단이라고 하니 어느 정도의 수준일지 흥미가 일었다.
“크하하! 그게 참말인가?”
“그렇대도! 내가 한소리 하면서 프렌치 새끼 목덜미를 잡으니까, 이 자식이 덜덜 떨면서―.”
상념을 방해하는 목소리에 눈썹이 절로 꿈틀거렸다. 또 그 새끼들이었다.
옥수수를 털어야 하나.
“그만 올라갈까요?”
체스가 내 표정을 살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술이 들어가니 제국군들의 횡포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놈들의 주위는 다들 자리를 떠난 탓에 휑했다.
“푸하하, 천한 종자들 같으니라고. 나도 최근에 아주 재밌는 일화가 있었지. 내가 요번에 도둑놈 하나를 잡았는데 말이야.”
“저······.”
대화를 나누는 녀석들에게 접시를 든 종업원이 다가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종업원이 그들의 테이블 위로 음식을 내려놓자, 신나서 얘기하던 이가 싸늘히 표정을 굳히더니 그를 쏘아보았다.
“이봐, 우리는 베이컨소시지를 주문한 적이 없는데?”
“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주문에 실수가 있었나 봅니다. 바로 치워 드리겠습니다.”
굳은 얼굴의 종업원이 재빨리 그릇을 치우려 하자, 그는 종업원의 손을 쳐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것들이 감히 바가지를 씌우려고 해?”
“그, 그것이 아니라―.”
당황한 종업원이 말을 더듬거리자,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재빨리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서 실수가 있었나 봅니다. 베이컨소시지는 서비스로 드릴 테니,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하, 이 새끼가 누구를 거지로 아나. 서비스는 됐고 사기를 쳤으면 벌을 받아야지.”
사내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종업원의 손목을 잡았다.
“네놈들은 그래야 정신을 차리더라고. 그냥 넘어가면 또 사기를 치려고 할 거 아니야.”
우스운 일이다.
베이컨소시지는 주문 실수가 아니었다.
워낙 크게 소리친 탓에 모두가 들었다.
여관 주인과 종업원도 당연히 자신들의 실수가 아님을 알고 있을 거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약자이기 때문이다.
“자, 잠시만요!”
손목을 잡힌 종업원이 다급히 비명을 질렀다.
제국군의 우악스런 손길이 종업원의 팔을 비틀려는 찰나, 내가 녀석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뭐야?”
녀석의 불손한 눈길이 나를 향했다.
나는 그런 녀석의 팔목을 세게 움켜쥐며 비틀었다. 콰드득, 하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명이 홀을 울렸다.
“끄아아악!”
비틀어진 자신의 팔을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은 녀석을 나는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손목은 여전히 놓아주지 않은 채였다.
“벌은 이렇게 주면 되는 건가?”
“이 개X끼가!”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이 몸을 일으키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주저앉아 신음을 흘리고 있는 녀석의 손목을 내팽개친 뒤, 그들이 박차고 들어온 문을 향해 턱짓했다.
“따라 나와.”
달빛이 은은히 드는 골목길.
그 위로 음영 진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새끼 멱은 내가 딴다.”
부러진 팔을 부여잡은 채 뒤따른 녀석이 이를 갈았다. 다른 녀석들 또한 한마디씩 거들며 으름장을 놨다.
“울고 불며 살려 달라 비명을 지르게 해 주지.”
“역겨운 프렌치 놈. 감히 제국군인 우리를 건드려?”
나는 녀석들을 보며 콧방귀를 끼었다.
“검을 쥔 녀석들이 쫑알쫑알 말도 많네.”
나는 맨손이었다.
“오늘 좀 맞자. 많이 아플 거야.”
오른 주먹을 감싸 쥐며 우두둑 소리를 내 주었다.
“이 새끼가!”
한 놈이 먼저 튀어나오자 옆에 서 있던 두 놈도 일제히 달려들었다.
어둠을 가르며 번뜩이는 검광.
내게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검이었다.
몸을 틀어 검을 흘리는 동시에 한 걸음을 걸었다.
그것으로 나는 이미 녀석의 간격 안에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을 크게 키운 녀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렸다.
콰직!
주먹이 안면에 틀어박히자, 물레방아처럼 제자리를 돈 녀석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나는 이에 멈추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새하얀 궤적이 나의 그림자를 베며 지나쳤다.
허공을 벤 녀석의 복부에 주먹이 꽂혔다.
“크어억!”
몸을 반으로 접으며 숨을 삼키는 녀석의 뒤통수를 부여잡고 그대로 바닥에 찍는다.
쾅!
녀석은 그대로 기절한 개구리처럼 축 늘어졌다.
그때 용맹한 기합이 등 뒤에서 들렸다.
“흐아압!”
나는 몸을 돌려 떨어지는 검을 피한 뒤, 그 회전력을 이용하여 발을 뻗었다.
채찍처럼 쏘아진 발길질이 녀석의 안면을 후려쳤다.
빠각!
마치 수면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바닥을 튕기며 날아가는 녀석.
“…….”
내 멱을 따겠다고 공헌하던 놈은 찰나에 정리된 상황을 보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으, 으아!”
사색에 질려 도망치는 녀석.
나는 놈의 앞을 막았다.
“어디를 가려고.”
“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그는 조금 전까지의 기개는 온데간데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어 댔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친절히 진단을 내려줬다.
“죽이지는 않을 테니 운이 좋다 여기거라. 의식은 일주일 뒤쯤 찾을 테고, 병상에서 3년은 요양하게 될 거다. 하지만 그 후로도 정상적인 삶은 살 수 없을 거야. 내가 그쪽으로는 도가 텄으니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함께할 동료들이 있으니 외롭지는 않을 테지.”
저기 쓰러진 녀석들 모두 같은 병실을 쓰게 해 줄 작정이었다.
죽이는 게 깔끔하지만, 그렇게 되면 범인을 잡는답시고 애먼 사람들이 이래저래 피해를 입는다.
그러니 범인을 지목할 수는 있을 만큼, 반쯤 죽여 놓는 게 낫다.
내가 이쪽으로는 선수거든.
어둠에 잠긴 도시 위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파르페 상사님!”
이른 아침부터 네르텔시의 경비대가 시끄러웠다.
머리가 반쯤 까진 중년의 사내, 윌슨이 복도를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이야?”
파르페는 문고리를 잡은 채 말했다.
집무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달려오는 윌슨을 보고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윌슨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게 어젯밤에 비번이었던 부하 놈들이 습격을 당했답니다. 새벽에 발견됐으나 부상의 정도가 심각해, 현재 병동으로 옮겨진 상태입니다.”
“어떤 미친놈들이 감히 제국군을 건드려!”
경위서를 쓸 생각에 두통이 찾아온 파르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용의자가 있기는 한데, 아직 신원 확인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체포했어?”
“아니요, 그것도 아직······.”
“그럼 여태 뭐 하고 있었어!”
파르페가 다시 한번 고함을 치자 윌슨은 휑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다급히 말했다.
“그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먼저 보고를 드린 후에 움직이려 했습니다.”
파르페는 신경질적으로 말해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게 용의자가 도망가지 않고, 아직도 여관에 투숙 중이라 합니다.”
“뭐?”
파르페의 눈썹이 사납게 비틀렸다.
제국군을 뚜드려 패 놓고도 도망치지 않다니,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허름한 여관에 투숙하고는 있으나 시중을 드는 자가 무려 셋이나 된다고 합니다. 혹여 고위직 관계자일 수도 있을 듯해 출동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윌슨의 말에 파르페는 자신의 턱을 붙잡았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네르텔시는 주르아든 왕국에서 내려오는 이들과 프렌치아에서 올라가는 이들로 항상 복작거렸다.
그 때문에 운이 안 좋으면 돈이 있어도 허름한 숙소에 머물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리고 간혹 신분을 숨긴 채 임무를 수행 중인 고위직 관계자도 있다.
숙소의 허름함으로 신분을 판단하는 건 경솔한 짓인 거다.
안 그래도 지금껏 네르텔시 경비대에 근무하면서 이와 비슷한 일이 두어 번 있었던 까닭.
이거 왠지 냄새가 난다.
고위급 인사와 연줄을 놓을 수 있는 냄새 말이다.
파르페는 잔뜩 찌푸렸던 인상을 펴며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