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제5화 끊겼던 전생이 이어지다 (3)
이질적인 감각이 가슴팍을 가로질렀다.
화끈한 느낌과 함께 거실이 기울어지더니 바닥이 솟아올라 몸을 때렸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아이데할은 거실 바닥을 두 팔로 밀어내 보았다. 역부족이었다. 세상은 그의 손짓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귓가로 웃음소리가 뭉개져 들려왔다.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돌아서는 뒤꿈치가 담겼다가 서서히 전신이 드러났다.
팔체라토가 멀어지고 있었다.
철컥, 문이 열리고 쿵, 닫혔다.
아이데할은 가만히 누워 서서히 깔리는 붉은 카펫을 바라보았다.
그는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약속을 어긴 것은 그만이 아니니까.
팔체라토에게 건넨 국새는 진품이 아니었다.
그 또한 끝끝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아이데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죽음 앞에 서니, 깊게 잠겨 있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는 과거, 왕세자가 머무는 웨일런궁(宮)의 집사였다.
왕세자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 옆에 있었다.
먹먹해지는 귓가로 왕세자의 첫울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자글자글 주름진 조그만 아이.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한 기억에 아이데할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렸다.
시간은 구름처럼 흘렀다.
하얀 겨울이 지나고, 새싹이 자라나 꽃을 피웠다. 세상은 푸르렀다가 알록달록하게 물든 뒤, 다시 흰 눈으로 덮였다.
그 흐름을 따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이가 말을 하고 정원을 뛰었다.
그리고 점차 왕세자의 품위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이는 소년이 되어 있었다.
-아델.
간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오직 그만이 자신을 이리 불렀다.
-자네가 이것을 가지고 가게.
-적들은 결코 나를 놓치지 않을 거야.
-아마 나는 죽게 되겠지.
한참 더 자라야 할 소년의 입에서 죽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왕세자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
안타까웠지만 자신에게는 모진 운명을 막아 세울 힘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국새를 넘겨줄 순 없지 않은가.
-무거운 짐을 지워 미안하네.
-그저, 품고만 있어 주게. 훗날, 나 이외에 누군가 이 나라를 재건해 준다면 그에게 전해 주었으면 좋겠군.
-만일 그런 이가 없다면, 여기가 프렌치아의 끝이라면. 처우는 자네의 뜻에 맡기겠네.
죽음을 앞둔 소년의 의연함을 뒤로하고 아이데할은 먼 길을 떠났다.
그것이 왕세자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얼굴로 손을 뻗어 보았다.
‘……이제야 저하 곁으로 갑니다.’
손끝이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그제야 무겁게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았다.
* * *
은은한 달빛이 흩뿌려진 숲속.
나는 흔적을 뒤쫓는 복면인들의 뒤를 여유롭게 따르고 있었다.
그래도 영 쓸모가 없는 놈들은 아닌지 달리는 모양새가 꽤 민첩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발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코끝에 혈향이 맺혔다.
향이 짙었다. 한두 명이 흘린 피가 아니었다.
나는 복면인들을 앞질러 달렸다.
울창하게 자란 풀숲을 헤치고 나서자, 목책이 둘러진 작은 마을이 보였다.
피 냄새를 동반한 싸늘한 침묵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쉬이 짐작케 했다.
시선이 잠시 입구에 심어진 푸른 나무로 향했다.
느레티 나무.
전생의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나무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목책 안으로 들어섰다.
생소한 듯 익숙한 건축 양식이 눈에 담겼다.
“이, 이게 무슨.”
뒤이어 도착한 복면인들의 침음성이 들려왔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예상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생기를 머금고 있어야 할 거리가 온통 죽음으로 가득했다.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은 노인과 아이를 가리지 않았다.
시체가 쓰러진 방향을 보니 모두 마을의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외부에서부터 포위망을 좁혀 가며 죽였다는 의미.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고자 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대체 무엇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왠지 번거로운 일에 휘말린 듯했다.
잠시 후, 주변을 훑고 있던 내게 한 녀석이 다가와 보고했다.
“저쪽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이놈들은 이제 나를 자기들의 우두머리로 생각하나 보다.
나는 녀석의 안내를 따라 걸었다.
그가 걸음을 멈춘 건 마당이 있는 작은 집 앞이었다.
“이 집에 남은 흔적이 유독 다릅니다. 아마 이들의 목적이 이곳에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당에 찍힌 발자국이나 주변의 동향이 확실히 달랐다.
집으로 들어가니 거실에는 한 명의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흐른 핏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아마 이자가 현 상황에 대해 가장 많은 답을 가지고 있겠지.
“대충 살펴봤는데, 특이한 사항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손을 들어 복면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천천히 노인에게 다가갔다. 미처 스미지 못한 핏물이 자박하게 밟혔다.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의혹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 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데할.
자네가 왜 여기에…….
나는 아이데할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었다.
하얗게 센 머리칼과 세월을 품어 깊어진 주름이 선명히 보였다.
그의 목 뒤로 손을 넣어 상체를 일으켰다. 축 늘어진 몸이 가볍게 딸려 왔다.
나는 내 기억보다 늙어 버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잊은 줄도 몰랐던 순간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기억을 덮고 있던 세월의 먼지가 흩어지고 있었다.
아이데할은 나의 전생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였다.
그때의 인식으로는 세상만큼 넓었던 궁.
나는 그곳을 제멋대로 누비었고, 그는 언제나 내 옆에 있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시간을 따라 흐른 기억은 어느새 그와 헤어지던 순간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래. 나는 그에게 국새를 맡겼었다.
그것이 이제야 기억났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기억을 떠올리자 상황의 얼개가 맞아 들어갔다.
아무래도 마을에 벌어진 참상은 모두 나 때문인 듯했다.
그에게 준 국새가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조금 전 보았던 죽음들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스치듯 지나쳤던 죽은 자들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바람처럼 흘려보냈던 그들의 죽음이 나의 살갗에 스미는 듯했다.
“……아델.”
나는 그를 품에 안았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에게는 10년이 흘렀을 뿐이지만, 나는 40여 년이 넘는 긴 세월을 돌아 이곳에 있었다.
모든 것이 무뎌질 정도로 오래된 인연이었고, 전생의 감정 또한 대부분 풍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타까웠다.
그는 나도 잊었던 내 유지를 받들어 긴 세월을 살아왔을 거였다.
마음이 칼끝에 베인 듯 쓰렸다.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려 줄 수 없음이 미안했다.
나는 그를 안은 채, 뒤를 지키던 복면인에게 말했다.
“죽은 이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 줄 수 있겠느냐.”
“아, 네. 알겠습니다.”
복면인은 나의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한 듯 보였지만, 금세 말귀를 알아듣고는 문을 나섰다.
나는 아이데할을 안고 몸을 일으켰다.
그를 바닥에 둘 수 없어 침상을 찾아 눕혔다.
찢긴 베갯잇과 그 틈새로 흘러나온 솜뭉치들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옆으로 치우고 아이데할의 주름진 손을 포개어 잡은 채 그 옆을 가만히 지켰다.
* * *
화륵.
마을의 중심에서 커다란 불길이 타올랐다.
화마는 순식간에 죽은 이들을 집어삼키며 마을에 내린 짙은 어둠을 밀어냈다.
불꽃의 흔들림을 따라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일렁였다.
생존자는 없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 불길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태우며 한 줌의 재로 화하는 불꽃의 끝에서 불씨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작은 불씨가 되어 허공을 자유롭게 날았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아시는 분입니까.”
나를 아이데할에게 안내해 주었던 녀석이었다.
나는 여전히 불꽃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오래전에 알았지. 아주 오래전에.”
“그렇군요. 이들을 대체 왜 죽인 걸까요?”
“국새.”
“네?”
“아무래도 이곳에 국새가 있었던 듯하다.”
“네에?!”
나의 무심한 발언에 그들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키웠다. 셋 모두 약속한 것처럼 같은 반응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내게 많은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국새를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국새가 어디 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그들이 진짜 국새를 가져간 것이라면, 이대로 보낼 수 없습니다. 그들을 쫓아야 합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녀석이 발끈하여 말을 이었다.
“국새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십니까?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군이 단숨에 반역도가 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바레인 가문에 넘어갔다가는―.”
“잠깐. 지금 뭐라 했느냐? 바레인 가문이라고?”
들어 놓고도 믿기지 않아 바보처럼 되물었다.
당황한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할렌트 바레인이 현 총독이지 않습니까. 변절자들의 수장이기도 하고요. 국새는 분명, 그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나는 하도 기가 차서 헛숨을 뱉었다.
할렌트 바레인이 변절자들의 수장이라니.
바레인가(家)는 어머니의 가문이었다.
할렌트 바레인은 나의 외숙부였고. 그는 내게 검술을 가르쳐 주었던 스승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프렌치아를 배신했다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는 충직한 신하였고 명예로운 기사였다.
나는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발렌시아 대륙에 떨어진 것도 당황스럽거늘, 전생의 인연들까지 얽히고 있었다.
갑작스레 몰아치는 상황들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가지 않으시겠다면, 저희끼리라도 가겠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말했듯,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그들은 다시 돌아올 테니까.”
복면인들의 눈가에 황당함이 스쳤다.
마을을 몰살한 이들이 다시 마을을 찾는다니, 믿기지 않겠지.
돌아올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들이 가져간 국새가 진짜일 경우였다.
“녀석들이 가져간 건 진품이 아니다.”
* * *
“우와악!”
세상이 뒤집힐 듯 커다란 비명이 마차를 흔들었다. 말들도 그 비명에 놀라 앞발을 치켜세우며 걸음을 멈췄다.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를 앞뒤로 따르던 병사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사색에 질린 얼굴로 새된 소리를 냈다.
“없다! 없어!”
갑작스런 난동에 곁을 지키던 기사가 재빨리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내는 허망한 눈빛으로 기사를 바라보며, 손에 쥔 함을 열어 보았다.
“헉!”
그것을 본 기사 또한 숨을 거칠게 들이켰다.
국새가 담겨 있어야 할 함이 텅텅 비어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기사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자신의 상관에게 소리치며 국새의 행방을 물었다.
하지만 팔체라토 또한 그것을 문제 삼을 정도의 정신이 아니었다.
“모른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있었단 말이다!”
그들은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십시일반 머리를 모았다. 그리고 가까스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함에 담겨 있던 국새가 진품이 아니었던 거다.
그들은 급히 말 머리를 돌렸다.
말을 탄 기사들만 추려도 20명이나 되었다.
“가자!”
팔체라토의 외침과 함께 그들은 왔던 길을 다급히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답은 그곳에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들은 마을을 향해 거침없이 말을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