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제4화 끊겼던 전생이 이어지다 (2)
담벼락이 성벽처럼 둘러진 저택.
그 주위로 빼곡한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구릉 위에 올라 저택의 전체적인 전경을 보았다.
구릉이 별장의 측면 쪽에 솟아 있어 내부 상황을 살피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슥 훑어본 나는, 복면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 맞아?”
“……네, 맞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목소리에 당황스런 기색이 역력하다. 복면을 내리며 드러난 이들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별장은 적막했다.
경계하는 병사도, 어둠을 밝히는 등불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택만 휑하니 있을 뿐,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이상한데.
예상과 다른 상황에 수상한 냄새가 났다.
별장에 병사들까지 끌고 온 녀석이 밤중에 사라졌다? 단순한 변심은 아닐 거였다.
나는 얼이 빠져 있는 복면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이놈들이 무서워서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 같고.
상황은 둘 중 하나였다.
다급한 일이 생겨 돌아갔거나, 애초에 다른 목적으로 이곳에 왔거나.
내 감은 후자로 기울었다.
나는 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여기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복면인들 또한 다급히 내 뒤를 따랐다.
구릉에서 별장까지는 가파른 비탈이 이어졌지만, 나는 평지를 걷듯 손쉽게 걸어 단숨에 별장을 두르고 있는 담까지 넘었다.
적막이 나를 반겼다.
인기척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둘러보니, 마당 군데군데 놓인 화로에는 불을 피웠던 흔적이 있었다.
은은한 미열이 느껴지는 게 떠난 지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다.
“이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는 중에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흔적을 발견했나 보다.
가볍게 발을 구르자, 나는 어느새 녀석의 옆에 서 있었다.
“헉.”
그는 나의 등장에 놀랐는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느 쪽인데.”
“저, 저깁니다. 여기 보시면 다수가 지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제멋대로 꺾이고 밟힌 풀들이 보였다.
복면인의 말이 맞는 듯했다.
추적술과 깊은 연은 없지만, 이 정도는 알 수 있다.
누군가 뒤따를 거라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우리는 그 흔적을 손쉽게 따랐다.
와중, 복면인들에게 암살에 나서게 된 정황을 물었다. 아무래도 팔체라토란 놈의 행보가 수상한 까닭.
이야기를 들어 보니, 확실히 수상한 점이 여럿 보였다.
녀석은 이미 복면인들의 암습을 예상한 듯했다.
칠인대라는 숨겨진 전력이 있었고, 이들을 걸러 내자마자 자리를 옮겼다.
팔체라토는 자신을 감시하는 독립군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그렇다고 복면인들을 꿰어 내기 위한 작전은 아니었다.
남겨진 흔적을 보면 녀석은 어딘가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별장에 온 건 이 행보를 감추기 위한 연막이었다고 봐야겠지.
팔체라토는 감시자들을 떨쳐 내야 할 상황에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런 놈들이 하는 짓이야 빤하다.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될, 은밀한 일을 진행하고 있는 거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지?”
이들도 바보는 아니었는지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상황을 추론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 이 자식한테는 우리에게 들키지 않아야 할 무언가가 있구나, 라는 결론에.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들 또한 알아내지 못했다.
* * *
프렌치아 왕국의 북부를 흐르고 있는 크테러산맥.
그 장중한 줄기가 뻗어 나가기 시작하는 프레아스산(山)에는 그 산의 이름을 딴 마을이 있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거리.
그 위로 절그럭거리는 소음이 바람처럼 조용히 번졌다.
30여 명에 이르는 기사들의 무장이 그들의 걸음을 따라 내는 소리였다.
기사들의 걸음이 멈춘 곳은 평범한 가정집 앞이었다.
그들이 온 이유가 바로 이 안에 있었다.
“끄집어내.”
한 사내의 말에 주변의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일상이 부서졌다.
“누구요!”
집 안에서 당혹스러운 노인의 고함이 들려왔다.
하지만 시골의 촌부가 감당할 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노인은 별다른 반항도 못 한 채 자신의 거실로 끌려 나왔다.
오늘 저녁만 해도 평안한 식사를 즐겼던 식탁에는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턱이 각진 중년의 남자.
사내의 이름은 팔체라토 아이아스.
은은한 등불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탐욕과 함께 기대가 서려 있었다.
팔체라토가 말했다.
“어디에 두었느냐?”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노인의 당황스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팔체라토는 괘념치 않고 제 말만 이어 갔다.
“괜히 연기할 필요 없다, 아이데할. 나는 모두 알고 자네를 찾아온 것이야.”
노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자, 팔체라토의 입꼬리에 만족스런 미소가 걸렸다. 그가 질문을 바꿔 물었다.
“국새는 어디에 두었지?”
노인의 주름진 얼굴 위로 체념이 자리했다.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을 알고 찾아온 게 분명했다.
10년 동안 숨겨 왔던 본명이 불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그랬다.
“망국의 인장이다. 마을 사람들을 모두 찢어 죽여야 내놓을 텐가.”
눈을 지그시 감은 아이데할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곳에 머문 지도 근 10년.
모든 것을 묻고, 여생을 보낼 수 있길 기도했건만.
신은 그 바람을 들어주지 않으려나 보다.
아이데할은 고민했으나,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우려했던 끔찍한 순간이 현실이 된 것뿐이었다.
팔체라토의 말이 맞았다.
왕국은 무너졌다.
죽은 것을 위해 산 자들을 죽일 순 없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을 내준다면, 마을 사람들은 무사한 것인가?”
“물론.”
“어떻게 믿지?”
“우리도 이 문제를 가지고 괜히 소란 피울 생각이 없거든.”
아이데할은 그 말에 담긴 진위를 생각했다.
물론, 답은 없었다.
칼자루는 그들이 쥐고 있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팔체라토가 덧붙인 말에 아이데할은 눈빛을 번뜩였다.
기사의 맹세는 기사들에게 강한 언약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하는 말이 진심일지도 몰랐다.
“믿어 보겠네…….”
“좋은 생각이야.”
“국새는 내가 베고 있던 베개 속에 있네.”
팔체라토는 의외라는 듯 이마의 주름을 좁히더니, 고갯짓으로 기사들을 보냈다.
침실에서 부욱 하고 찢기는 소리가 들리고, 상기된 표정의 기사가 함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함을 바라보는 아이데할의 눈빛에는 여러 감정이 묻어 있었다.
팔체라토는 건네받은 함을 열어 그 안에 담긴 황금 인장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네모반듯하게 각이 진 인장은, 손바닥만 한 면적에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었고, 그 위로는 흰사자, 레오니랜서의 얼굴이 손잡이로 조각돼 있었다.
프렌치아의 국새(國璽)였다.
팔체라토는 국새를 이리저리 돌리며 유심히 바라보았다.
독립군과 변절자들이 지난 10년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국새가 고작 노인의 베개 속에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크크큭.”
그의 웃음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팔체라토는 역사에 남게 될 이 순간이, 자신의 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아이데할이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 주게.”
“아직. 진품인지 확인을 해 봐야지.”
아이데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는 확실히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진품 여부에 대한 정보까지 있는 것을 보면 이자의 뒤에 누군가 있음이 분명했다.
아마도 그는…….
우웅.
마나를 집어삼킨 국새는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바닥 부분에 ‘프렌치아’라는 붉은 글귀를 새겼다.
팔체라토는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아주 조심스레 국새를 함에 넣었다.
“좋아, 약속을 지켜 주어 고맙군.”
팔체라토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데할은 그 미소를 긴장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배웅은 하지 않겠네.”
“배웅은 필요 없어.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건 내가 아닌 당신이니까.”
웃음을 머금고 있던 팔체라토의 표정이 싸늘히 식었다.
그의 갑작스런 변심에 아이데할은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혹시나 했건만.
그는 역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홀로 외롭게 보내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라. 이 마을은 오늘부로 사라질 것이야.”
팔체라토의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꿈쩍 않던 아이데할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
“네 이놈! 기사 된 자가 기사의 맹세를 하고도 어찌 말을 손바닥 뒤집듯 바꾼단 말이냐!”
아이데할의 분노가 거실을 흔들었다.
“내가 기사의 맹세를? 누구 들은 자가 있더냐?”
팔체라토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거실에 서 있던 기사들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팔체라토는 입매를 비틀며 아이데할을 보았다.
“네놈이 나이를 먹더니 노망이 났나 보구나. 쯔쯧.”
고개를 내저은 그는 아이데할을 바라보며 뒤편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한 살배기건, 다 죽어 가는 노인이건, 기르는 개X끼건, 마을에 남아 있는 생명이 없게 해라.”
절도 있게 명을 받든 뒤, 집을 나서는 기사들을 보며 아이데할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인간쓰레기들.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모자라 이런 극악무도한 짓까지 벌인단 말이냐! 하늘이 두렵지도 않더냐!”
팔체라토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늘? 나이를 그만큼 먹고도 아직도 몰라? 그딴 건 없어. 나라에 목숨 바친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 텐데.”
그는 허리춤에 매단 검에 손을 가져가며 이죽거렸다.
“걔네들, 다 이름 모를 들판에서 죽었어. 그들의 시체를 까마귀와 들개가 뜯어 먹었지. 하지만 나를 봐. 여전히 살아남아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잖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는 너무 간단한 문제 아닌가?”
스릉.
털을 곤두서게 하는 마찰음과 함께 곧게 뻗은 강철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을 마주한 아이데할은 움켜쥔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마지막을 각오하고 있었다.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의 죽음이 비통할 뿐.
“죽엇!”
아이데할은 검을 든 그에게 맨몸으로 달려들었다.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분노만을 쥔 채 몸을 던졌다.
내지른 주먹이 팔체라토에게 닿지 못할 것은 아이데할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었다.
“질척거리긴.”
팔체라토가 조소로 화답하며 검을 그었다.
새하얀 검광이 명멸했다.
선홍빛 핏물이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