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제1화 환생 후 귀환했다 (1)
내 나라 프렌치아는 평화로운 왕국이었다.
광활한 들판에는 황금빛 벼가 물결치고, 드높은 산악에는 푸르른 나무와 색색의 꽃들이 가득했으며, 그곳을 다스리는 왕과 왕비는 백성을 사랑했다.
나는 그곳의 왕세자로 태어났다.
내 꿈은 모두 이 나라에 담겨 있었다.
나는 매일같이 학식을 쌓으며 내가 통치하게 될 프렌치아를 상상했고. 검술을 익히며 부국강병을 꿈꿨다.
이제는 모든 것이 덧없어졌지만.
* * *
바닥이 얼음장처럼 차다.
뼈마디가 시려 절로 몸을 움츠렸다. 사위는 칠흑처럼 어두웠고 케케묵은 불결한 냄새가 코를 괴롭혔다.
이 작은 독방은 더럽고 눅눅한 석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도 없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는 방.
이곳은 왕궁의 지하 감옥이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깊숙이 위치한.
나는 그 안에서 토악질처럼 올라오는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들이 비웃을까 싶어 더러운 의복을 입에 문 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위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들렸나 보다.
굳게 닫힌 철문.
작은 창살 안으로 불빛과 함께 음영 진 얼굴이 드리웠다.
“왕세자란 놈이 애새끼처럼 질질 짜긴. 왜? 젖이라도 주랴?”
병사가 어깨를 들썩이며 낄낄거렸다.
표정은 어둠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보낸 모욕은 가슴 속에 선명히 틀어박혔다.
옆에 있던 이들도 그를 거들며 웃어 댔다.
내가 왕세자임에도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죄를 지어서도 누군가 반역을 꾀해서도 아니었다.
나라가 패망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게서 나라를 빼앗은 제국의 병사들이고.
“이딴 나라의 왕세자로 태어나 죽느니 차라리 내가 낫지 않아?”
자기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에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네 이놈들! 감히 이딴 나라라고 하였느냐!”
당장에 녀석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손과 발에 채워진 족쇄 탓에 소리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X발, 깜짝이야!”
내 호령에 펄쩍 뛴 병사는 사나운 눈을 부라리며 들어 본 적도 없는 상스러운 욕을 뱉어 댔다.
내 나라가…… 왕과 왕비였던 부모님이…… 그의 가벼운 혓바닥 아래 짓밟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
나는 마음이 찢어진다는 말을 그때 처음으로 이해했다.
“참아. 어차피 내일 죽을 새끼인데.”
거친 욕설을 퍼부으며 감옥 안으로 들어오려던 병사를 누군가 말렸다.
나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철창 안에서 떨었다.
비참하고 참담했다.
이미 왕궁의 가장 깊숙한 지하에 있음에도, 나는 그보다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물이 흘러내릴 만큼 세게 쥐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어차피 나는 내일 죽는다.
내 나이 열다섯.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그저, 원통하고 원통할 뿐.
다음 날.
밖으로 나와서 본 하늘은 푸르렀다.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니 햇볕에 눈이 시린다.
그럼에도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지금 보는 것들은 모두, 내 생애 마지막 풍경이니까.
찬란했던 왕성은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웅장함을 자랑하던 건물들은 허물어지고 그슬려 앙상한 뼈대만이 남았다.
나는 그 잔해 위를 맨발로 걸었다.
두 손을 단단히 포박당한 채, 가축처럼 끌려갔다.
나의 걸음을 붉은 발자국이 따랐지만, 아프지 않았다.
이런 고통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무너진 왕궁을 보며 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는 것 같았다.
왕성을 벗어나 바라본 도시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수도, 마그네트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희망을 노래하던 도시에 울음이 넘쳐흘렀다.
살아남은 국민들은 나를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언젠가 나의 꿈이었던 이들을······.
“똑바로 걸어!”
기력이 쇠해 휘청거리는 나를 우악스러운 손길이 끌었다.
내 뒤를 미처 죽지 못한 왕족들과 귀족들이 줄줄이 따랐다.
프렌치아의 마지막 행렬이었다.
저 멀리 테나스타 광장에 세워진 처형대가 보였다.
사방에서 볼 수 있게, 우뚝 세워진 처형대.
나는 그 위에서 무릎이 꿇렸다.
“제네스 쿤 프렌치아!”
옆에 선 자가 나를 큰 소리로 호명하더니 내 죄에 대해 낱낱이 알렸다. 내가 이 나라의 왕세자라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나의 죄였다.
광장은 나를 지켜보기 위해 모인 국민들로 빼곡했다. 그들의 시선에 담긴 비통한 슬픔이 선명히 전해진다.
그들은 이제 나라를 잃었다.
서늘한 검날이 목덜미에 닿았다가 들어 올려진다.
의연하려 했지만, 차갑고 낯선 감촉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무너진 궁을 눈에 담았다.
왕국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내가 공부했던 대륙의 수많은 왕국처럼.
나는 그렇게 프렌치아와 마지막을 함께했다는 것을 위안 삼아 죽었다.
……가, 환생했다.
유복하게 자란 왕세자에서, 지독히 배고픈 거지로.
젠장.
“한 푼만 주세요. 동생이 죽어 가고 있어요…….”
나는 두 눈에 처량함을 가득 담아 비단옷을 입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마 적선하지 않고는 못 배길걸.
지금 내 나이 여덟.
전생까지 포함하면 스물셋.
나는 성인의 정신을 가진 요망한 어린아이였다.
그런 나의 구걸 신공은 이미 하늘에 닿아 있었다.
“썩 꺼지지 못해!”
하지만 간혹 안 통하는 놈도 있다.
인성 쓰레기 새끼.
동생이 죽어 가고 있다는데(물론 거짓이지만),
어린애가 이렇게 처량하게 구는데(비록 연기지만), 어떻게 이 돼지 새끼는 이따위로 매몰차게 굴 수 있단 말인가.
겹겹이 늘어진 비곗덩어리를 유지하기 위해 매달 은자 1냥은 족히 쓰고 있을 건데.
그 몇 푼이 아까워서야, 쯧쯧.
나는 멀어지는 돼지 새끼의 등 뒤로 있는 욕, 없는 욕 모조리 뱉어 대며 저주를 퍼부었다.
물론, 속으로만.
큼큼.
왠지 알 수 없는 시선이 느껴지는 게 나의 인성에 대해 작은 변명 정도는 해야 할 듯싶다.
왕세자로서의 기억과 지켜 왔던 품위?
내가 여기서 가장 먼저 버린 게 그거다.
거지 소굴에서 1년만 살아 봐라.
뱃가죽과 등가죽이 하나가 되면 그따위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닫게 될 테니.
그리고 이곳은 내가 살던 발렌시아 대륙이 아니었다.
중원.
기사 대신 무림인들이 날뛰는 세계.
나도 그들을 몇 번이나 봤다.
무림인이란 자들이 싸우는 광경 말이다.
사실 궁에서 기사들을 많이 봐 왔기에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내가 여기 와서 진심으로 놀란 것은, 그런 위험한 이들을 제어할 고삐가 없다는 것이다.
약육강식이란 논리 아래, 관무불가침(관부와 무림은 서로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이란 조약 아래, 이런 위험천만한 놈들을 제멋대로 풀어놓은 나라가 나라냐!
그런데 그런 나라가 바로 여기 있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거지새끼의 목숨은 길가의 돌멩이만큼 하찮은 세상이었다.
빌어먹을.
기왕 환생할 거면 명문세가의 자제로 태어나든가. 거지새끼가 뭐냐!
더럽게 꼬여 버린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해, 빈곤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내게도 드디어 나를 지옥에서 구해 줄 인연이 찾아오게 된다.
사부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천살성(天殺星)의 기운을 가진 아이로구나. 나와 함께 가겠느냐?”
나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물음에 주름진 손부터 꼬옥 잡았다. 그러고는 최대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는 뭐라도 잡아야 했으니까.
이 사람이 사기꾼이건 뭐건, 일단 거지 소굴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다행히 사부님은 사기꾼이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인자한 분이셨다.
덕분에 거지 소굴을 구르며 망가질 대로 망가졌던 나의 인성은 조금이나마 수복될 수 있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시장 바닥에 굴러먹는 무협지처럼 빤했다.
나는 무공을 익혔다.
천령신공(天靈神功)이라는 절세의 무공을.
수련이라는 고통을 땔감 삼아 청춘을 활활 불태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직 검만을 휘두르며 긴 세월을 흘려보냈다.
천상의 재능을 가지고 있던 내가 절세의 무공을 만났으니 어떻게 됐겠는가.
나는 세찬 바람을 탄 연처럼 훨훨 날아올랐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무림에 발을 디딘 것은 사부님이 돌아가시고 1년 뒤인 내 나이 24살 때였다.
나는 그렇게 무림과 첫 연을 맺었다.
그 후, 무림에 출두한 지 21년 만인 내 나이 45살에 정마대전의 끝에서 천마의 목을 베었고, 그때부터 검성이란 정파의 상징적인 별호를 얻는 동시에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랐다.
그로부터 다시 1년 후.
“나 은거한다.”
“네? 참말이십니까!”
눈을 반짝이며 답한 이는 무림맹주, 권왕 황보준이었다.
어찌나 눈을 반짝이던지, 배알이 꼴려 뱉은 말을 번복하고 싶은 지경이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찾지 마.”
“네네! 알겠습니다.”
“맞을래?”
“……왜 또 그러십니까.”
“왜 또?”
“아, 아닙니다.”
누가 보면 중년의 사내가 젊은 청년에게 쩔쩔매는 것으로 보일 테지만, 사실 그보다 내가 두 살이나 많다.
나는 막대한 내공으로 인해 20대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주란 놈이 표정 좀 숨겨라. 아주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구나.”
“티 났습니까?”
“엄청.”
“……하하. 그럴 리가요.”
녀석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 꼴을 계속해서 보고 있다가는 은거하지 못할 것 같아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청춘을 불태웠던 고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제 산속에 틀어박혀 화려하고 평안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단꿈도 잠시.
나는 고향을 목전에 둔 길목에서 모든 사건의 원흉인 녀석들을 만나게 된다.
마교의 잔당들이었다.
이놈들이 천라지망을 어찌 헤치고 살아남았는지 몰라도, 내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놈들.
갑자기 요상한 말들을 지껄이더니 제 목을 그어 자결한다.
그렇게 흩뿌려진 피가 바닥에 떨어지자 땅에서 빛무리가 뿜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알 수 없는 문양을 새겼다.
그때까지 난 뭐 하고 있었냐고?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흥미로워서.
현경(玄境)에 이른 나의 무위는 격이 달랐다.
오기조원(五氣調元), 삼화취정(三花聚頂)을 넘어온 내게 이런 잔재주는 그저 여흥에 불과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디디고 있던 지반이 찰나에 사라지며 무저갱보다 더욱 짙은 어둠이 아가리를 벌린 것이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었다.
찰나를 쪼개고 쪼개어 멈추다시피 한 세상을 감각할 수 있는 나조차도 그 순간을 감지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알 수 없는 곳에 떨어졌다.
말 그대로 눈 한번 깜박했을 뿐인데, 시야에는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이 담겨 있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