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八장. 퇴로를 지켜라! (3)
진주성을 떠나 달리기를 반 시진(1시간).
추격해오는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와는 상관없이 상호와 그 휘하 토벌대원들은 쉬지 않고 말을 몰았다.
슬슬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서 주변이 환해졌고 횃불의 불빛에 의지하지 않고 길을 달릴 수 있었다.
“워워!”
선두로 달리던 상호가 말을 멈췄다.
작은 야산을 넘는 길목에서 남준과 일단의 병력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남 군관.”
“무사히 귀환하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피난민들은?”
“약 한 시진 전쯤에 여길 지났습니다.”
“다들 열심히 움직여준 모양이군."
힘없는 노약자나 어린이들도 많은데 여기까지 제 시간에 맞춰 이동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이 때, 상호는 남준 뒤로 고인후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원래라면 피난민들을 통솔하여야 할 그가 이곳에 남은 것을 보고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피난민들과 함께 가지 않은 것입니까? 장군이 없으면 피난민들의 이동이 수월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장수된 몸으로 피난민들을 통솔하는 임무를 방기한 것을 죄스럽게 생각하네. 하지만 내가 가진 힘이 가등청정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 부득불 우겨서 남은 것이네."
"하아, 마음은 알지만 그러면 대피 계획이 자칫 틀어질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 말게. 내 믿을 수 있는 부관에게 뒤를 맡겨 놓았으니 일이 틀어지는 일을 없을 것이네."
"할 수 없군요."
수만 명이나 되는 피난민을 질서정렬하게 이동시키기 위해서 고인후를 통솔자로 보내놨던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뒷일을 적절히 처치하고 뒤에 남았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진주성에서 희망 없는 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 가토 기요마사를 확실히 잡기 위한 싸움이니 고인후 정도의 능력자가 한 명 느는 게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자처해 여기에 남은 사람은 고인후뿐만이 아니었다.
“대사, 그리고 허 의원님까지? 어째서 두 분까지 남으신 겁니까?”
"소승 또한 싸움에 보탬이 되려고 남았다네. 나름 승병으로서 무예를 익혔고 요괴의 힘을 받아들인 몸이니 방해는 되지 않을 것이네."
"비록 본인은 싸움에는 참여하지 못하겠지만 의술로서 다친 자를 살필 수 있으니 도움이 될 것 같아 남았네."
두 사람의 말에 상호는 할 말이 없었다.
사명대사야 충분히 강한 능력자이고 또한 희귀한 회복 능력을 가졌으니 그의 잔류를 반길만 했지만 허준까지 남은 것은 이래저래 골치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당부의 말을 해두고 작전에 합류시키게 되었다.
"자, 그럼 마지막 작전에 대해 설명하죠."
상호는 모두를 모아놓고 가토 기요마사를 잡을 최종 작전에 대해 설명했다.
시종일관 다들 집중해서 얘기를 들었다.
모든 설명이 끝나고,
"분명 그리만 된다면 그 자를 잡을 수 있을 것 같긴 하군."
"다소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왜적을 상대하는데 그런 것을 따질 필요는 없겠지."
이러한 반응을 보이면서 다들 상호의 작전에 찬성하였다. 다만 한 사람, 율만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상호를 보았다.
이어서 상호는 말했다.
"그럼 추격대가 올 때까지 다들 최대한 푹 쉬도록. 조금이라도 기력을 회복해둬야 싸움에서 더 버틸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상호의 말에 대부분이 환하게 웃었다.
밤새도록 전투를 하고 말을 달렸기에 모두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여기에 있던 병력에게 경계를 맡기고 자신과 달려온 대원들은 잠시 갑옷까지 벗고 쉬게 했다.
그리고 상호 자신도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앉아 쉬었다.
"후우."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잠을 자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밤 동안 소모한 정신력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해 명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 상호는 바로 자신 곁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떴다.
“이것 드세요.”
"주먹밥이잖아. 이런 것을 여태까지 지니고 있었어?"
성을 탈출하기로 하고 성내에 있던 쌀과 잡곡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모두에게 나눠준 바 있다.
상호는 자기 몫을 싸움 직전에 그냥 먹어치웠던 바다. 그런데 그와 다르게 율은 내내 자기 몫을 품 안에 챙기고 있다가 그것을 상호에게 전한 것이다.
"내가 어떻게 먹겠어. 율이 먹어."
"전 괜찮아요."
극구 사양하며 자신에게 주먹밥을 건네는데 도저히 마다할 수 없었다.
주먹밥을 받고 상호는 율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보였다.
"여기와서 앉아 쉬어.”
“어찌 제가 나리 옆에 앉을 수 있겠어요.”
“어허! 얼른 앉으라니깐.”
상호가 팔목을 붙잡고 이끄니 율은 마지못해 그의 옆에 앉았다.
시선을 향하니 여기저기 자잘하게 입은 상처가 보인다. 다행히 크게 다친 상처는 아니어서 따로 치료할 필요는 없었지만 아녀자로서 저렇게 칼에 베인 상처를 몸 곳곳에 가진 것이 못내 안쓰러웠다.
하여 상호는 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다.”
“아니어요.”
“본래라면 평범하게 살아야 할 텐데 괜히 이런 험한 길로 들어서서 몇 번이고 목숨이 위태로운 경험을 하게 했어.”
상호는 율을 이미 마음에 두고 있었다.
나이 차야 여기 조선에서는 큰 문제가 아닐 테고 또 서로 마음이 있어 이미 거사까지 치른 상황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침략해온 왜군을 몰아내고 조금 여유가 생기면 청혼도 생각하고 있었다.
상호는 자신을 보는 율의 시선을 마주하며 이어서 말했다.
“앞으로도 너에게 더 신세를 지게 될 거야.”
“예, 전 나리를 끝까지 보필할 것이에요.”
"그러한 너에게 당장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없어. 하지만 이 모든 게 끝나면, 반드시 받을 것 이상으로 너에게 돌려주도록 할게."
“···예.”
아직 확답을 해줄 수가 없어 이렇게 돌려 말하기는 했어도 율에게 뜻이 전해지기에는 충분했다.
상호는 자신이 받은 주먹밥을 반으로 쪼개 율에게 건넸다.
"자, 나 혼자 먹기는 그러니 반씩 나눠먹자고."
"예."
추격대와의 싸움을 앞뒀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일각 정도 시간이 흐르고,
“적이 옵니다!”
“쯧! 생각보다 일찍 왔네.”
분위기를 깨는 보고에 상호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런 그보다 먼저 일어난 율이 손을 조심스레 뻗었다.
그 손을 잠시 빤히 본 상호는 곧 그것을 잡고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어디 볼까.”
상호는 직접 ‘매의 눈’ 능력으로 저 멀리부터 논 사이의 협로를 따라 질주하는 기마를 보았다.
예상대로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으로 편성된 추격대여서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달려오는 기병들의 위로 보이는 깃발에는 낯익은 한자가 적혀 있었다.
"역시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네."
상호는 이 시대에 오기 전, 헌터로서 활동하면서 다양한 인물들은 마주했었다.
그렇기에 한 번 봤을 뿐이지만 가토 기요마사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 나는 지금의 당신과 같은 인간들을 여럿 봤지.’
상호가 떠올린 사람은 바로 갑자기 얻어진 힘에 취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구는 헌터들이었다.
힘을 믿기에 위험에 대한 경계심이 거의 없고 다른 인간을 하찮게 본다. 물론 그들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어 항상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오만함이 치명적인 실수를 야기해 몰락하기도 했다.
'당신은 바로 지금 그 실수를 저질렀어.'
상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멀리 보이는 칠흑의 갑주를 입은 가토 기요마사를 응시했다.
두두두두.
전력질주로 달려오던 기마무사들이 고갯길 위의 조선군을 보고 속도를 줄였다.
"그럼 마중을 나가볼까."
상호는 이리 중얼거리며 뒤를 보았다.
남준을 비롯한 4명의 군관, 율과 고인후, 그리고 사명대사.
모두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었다.
"자네, 날 따라오게."
"예, 옛!"
이곳에 남은 자들 중 유일하게 왜국어를 할 줄 아는 부산포 출신의 병사가 상호와 동행해 고개 아래로 내려갔다.
상호가 이런 움직임을 보이자 멈춰 선 왜군 측이 웅성거렸다.
“주군, 제가 가서 목을 따겠습니다.”
“아니 기다려라.”
가토 기요마사는 그 행동을 제지하고 흥미어린 시선으로 상호를 보았다.
진주성에 비록 길지는 않았지만 대등하게 실력을 겨눴던 상호의 모습을 한 번에 알아본 것이다.
마침내 상호는 가토 기요마사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거리까지 걸어와 멈춰 서서는 입을 열였다.
“싸우기 전에 한 가지 제안이 있다.”
이 말은 곧 통역을 통해 가토 기요마사에게 전달되었다.
“제안이라고?”
"그대와 나, 전 날에 못 다한 승부를 지금 이 자리에서 내보자는 제안이다.”
놀랍게도 상호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일기토를 제안한 것이다.
통역을 통해 전해진 말에 가토 기요마사 휘하 무사들이 목소리를 냈다.
“저런 요구에 따라줄 이유가 없습니다.”
“보나마나 달아나는 진주성의 백성들을 위해 시간을 끌려는 수작입니다. 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제안일랑 무시하시고 바로 짓밟아버리는 게 좋습니다.”
여기 있는 조선군 때문에 도망친 진주성의 백성들을 놓친다면 기껏 만류를 뿌리치고 온 가토 기요마사의 입지가 안 좋아지게 된다.
이것을 알기에 그의 가신들은 상호의 일기토를 받아들이지 말고 단숨에 조선군을 섬멸하자고 간언했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인간을 초월한 강함을 갖게 된 자신이 진정 즐길만한 싸움을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능력자인 상호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좋다!”
“주, 주군!”
이러한 대답에 상호는 슬쩍 미소 지었다.
여기까지 모두 예상과 조금도 빗나간 게 없다.
'일대일 일기토까지 유도해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상호는 슬쩍 위를 올려다보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통역을 통해 말했다.
"싸우기 전에 한 가지만 묻지. 그 힘을 갖고 앞으로 무엇을 할 생각아지? 단순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에 남아 이 전쟁이나 할 것 같지 않은데 말이야?"
이에 가토 기요마사는 대답했다.
"평화롭게 살아온 너희와 다르게 우리 일본국은 얼마 전까지 맹자들이 전국을 통일하기 싸웠다. 무릇 강자가 천하를 얻는 법, 응당 앞으로 그리될 것이다."
역시 가토 기요마사는 저 힘으로 천하제일을 노리고 있었다.
상호는 재차 말했다.
"그렇다면 이대로 조선 땅을 떠나지 않겠는가?"
"그럴 수는 없지. 보다 큰 힘을 얻기 위해서 이 조선 땅에 있는 요괴들을 모두 내 손으로 잡아야 하니 말이다."
"조선과 명국의 군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자들만 처치하면 이 전황을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우리를 죽이겠다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죽이기 보다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다. 어때, 날 따르겠는가? 만약 그리 한다면 1만석의 영주 자리를 주지."
"···그런 것에 현혹될 것이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는다."
"크큭,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너희 조선 놈들은 충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니 말이다."
"말이 길어졌군."
상호가 먼저 검을 빼자 곧 가토 기요마사는 말에서 내려 천천히 걸음을 옮겨왔다.
이에 통역하던 병사는 부랴부랴 고갯길 위로 줄행랑을 쳤다.
심상치 않은 기세가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오고,
“······.”
“······.”
말없이 서로를 보며 거리를 좁힌 두 사람은 이윽고 검의 간격 내로 들어간 바로 그 때!
동시에 상대를 향하여 빠른 출수를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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