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七장. 구원자. (2)
상호가 강에서부터 끌고 온 방대한 양의 강물은 내성 성벽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촤아아앗!
“살려줘!”
“우아아악!”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에 셀 수 없이 많은 왜병들이 넘어지고 물살에 휩쓸려 자기들끼리 뒤엉켜 부딪쳤다. 반면에 생존한 조선군과 백성들이 있는 쪽은 직접적으로 물이 쏟아지지 않았고 세차게 흘러내린 물에 넘어져 자잘한 부상을 입은 정도의 피해만 입었을 뿐이다.
이렇게 조선 백성들을 학살하려 했던 왜군들을 막아낸 상호는 홀로 한 집의 지붕 위에 착지하였다.
눈에 들어오는 성내의 풍경.
무참하게 살해된 백성들의 시신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죄없는 백성들까지 저리 살해하다니······."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어린 아이까지 희생된 것을 보고 있자니 울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주위를 살피던 상호의 눈에 포박된 고인후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무사했구나.'
앞으로 함께 몬스터 토벌을 해줄 조력자로 선택했던 고인후가 무사한 사실에 적잖게 안도하는 상호였다.
그를 결코 왜군 손에 넘길 수 없기에 지붕 위에서 단숨에 아래로 몸을 날리며 그에게 향했다.
"막, 막아라!"
"비켜!"
아까의 그 난리통에서 조선인들의 근처에 있었던 덕에 무사하였던 왜군이 상호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힘으론 상호의 전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왜병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이번엔 무사들이 나섰다.
“죽어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 무사의 왜도가 수직으로 내리그어온다.
이를 피하면서 상호가 그대로 상대를 베고 지나쳤다.
“컥!”
그야말로 순살!
상호의 검은 이후로도 달려드는 무사와 왜병들을 사정없이 베어갔다.
이제 고인후의 곁에는 한 명의 무사만 남게 되었다. 상황이 이리되자 무사는 손에 든 왜도를 고인후의 목에 대고 협박했다.
“가, 가까이 오면 이 자를 죽이겠다!”
왜어로 떠들어대는 말이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상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봐.”
“오, 오지 마라!”
상호의 거침없는 행동에 무사는 당황해했다.
바로 그 틈을 찌르고 상호는 순식간에 ‘수룡시’를 만들어서 그것으로 무사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괜찮습니까?”
“자네가··· 어떻게······.”
“세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죠.”
상호는 포박을 풀어준 다음에 성문 쪽으로 보았다.
그곳에는 연신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율 혼자서 성문 너머에서 오는 적을 막는 것도 한계가 있어.’
지금 내성 안쪽으로 들어왔던 왜병들은 거의 다 물벼락에 죽거나 부상 입은 상태였기에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상호는 살아남아있는 조선군을 보며 소리쳤다.
“아직 싸울 수 있는 자들은 무기를 챙겨 내 주변에 모여라.”
“원군은 언제 옵니까?”
부상 입은 한 무관이 상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에 상호는 그를 향해 시선을 보내며 이렇게 대답했다.
“수천의 지원군을 기대했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건 없다.”
“예?”
“참고로 이곳까지 온 것은 나를 비롯해 고작 수십 명에 불과하다.”
이어진 상호의 말에 그의 주변으로 모인 사람들의 표정에서 좌절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상호는 호통치듯 말했다.
“그래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다 같이 죽겠다는 건가?”
“어차피 발버둥 쳐도 우리가 살 길은 없지 않소!”
“그래! 그래!”
상호를 향해 일부 군졸들과 백성들은 분노를 나타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상호는 비릿한 조소와 함께 말했다.
“그럼 여기서 죽든가.”
“······!”
“어차피 이곳에서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까지 싸우려 한 것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와 원군이 없다고 지레 포기하고 무기를 손에서 놓을 참이냐?”
신랄한 상호의 말에 방금까지 분노하던 이들이 찔끔했다.
사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애당초 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이 진주성을 떠나지 않고 남았던 것이 아니었던가.
이 때, 고인후가 말했다.
“수천의 원군이 없다고 해서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방금 보지 않았던가. 수백이 넘는 왜군을 일거에 쓰러트린 아까 전의 그 힘을 말이다.”
아까 벌어졌던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던 거대한 물기둥이 나타난 일을 상기시키자 사람들은 그제야 그것이 상호가 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신통력을 부리는 도사님이시라면 분명 우리를 구할 수도 있을지 몰라?”
“그려!”
금방 태도를 바꾸는 사람들의 모습이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잠깐의 희망이 깊은 절망이 되어버렸던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상호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저들은 내게 아까와 같은 일을 더 기대하고 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들의 기대에 맞춰주지 못할 것 같네.’
강물을 조종해 성 안까지 끌어올리는 일은 위청홍에게 받은 코어를 통해 정신력을 강화했어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랬기에 같은 일을 또다시 할 수 없을뿐더러 남은 능력도 제한적으로 써야하는 처지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진주성으로 쳐들어온 왜군을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사지에 미쳤다고 일부러 들어올까.’
남준을 비롯한 토벌대원들이 성에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될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홀로 성문을 지키는 율을 도울 필요가 있었다.
“가자.”
상호가 먼저 달리니 곧 병사들과 무기를 든 백성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성문을 돌파해라!”
지휘관의 명령에 창을 앞세우고 삿갓을 쓴 왜병들이 성문을 지나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찰나에 뿜어진 빛에 양단되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저, 저!”
“한낱 계집이 어떻게.”
무사들은 검 한 자루를 들고 성문 앞을 막아선 율을 보고 침음을 터트렸다.
벌써 몇 번이나 돌파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성벽을 넘고자 해도 아까 갑자기 위에서 떨어진 물세례에 사다리를 비롯한 도구가 거의 다 망가져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에이잇! 길을 비켜라!”
이 때, 유독 덩치가 큰 무사 한 명이 용감하게 나섰다.
그는 양 손에 각각 왜도를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이 몸, 시코쿠의 호리마가 저 계집의 목을 따오겠다!”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힌 거구의 무사는 멧돼지처럼 저돌적인 돌진을 감행했다.
“······.”
이를 본 율은 비스듬히 서면서 검을 곧게 세웠다.
격돌은 그야말로 한 순간에 이뤄졌다.
촤캉!
어느새 다섯 보 정도 앞으로 나아간 율의 검은 앞으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칼날엔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분, 분하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거구의 무사는 부러진 두 자루의 왜도와 함께 땅에 쓰러졌다.
이렇게 자신 있게 나선 무사까지 쓰러지니 어느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했다.
“후우.”
그것을 보며 율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계속해서 ‘포스’를 사용하면서 숱한 적을 상대하느라 꽤 몸과 정신력을 혹사한 터였다.
상호가 올 때까지 어떻게든 왜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율은 적들에게 약해보이지 않으려 했다.
다그닥. 다그닥.
왜군들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곧 모여 있던 왜군들이 좌우로 갈라지면 길을 열었다.
그러자 그 길을 따라 검은 갑주를 입은 무장이 말을 타고 지났다.
“호오, 전에 본 그 계집이구나.”
“······.”
가토 기요마사의 말에 율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문 채 검을 고쳐 잡았다.
한 편, 가토 기요마사는 강한 능력자인 율과 싸우는 것을 흥미를 보였다.
어느새 그의 전신에서 강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팟!
먼저 움직인 것은 율이었다.
그녀는 성문 옆 벽을 차고 그대로 위쪽으로 낙하하며 검을 휘둘렀다.
“어림없다!”
가토 기요마사는 내리치는 검격을 한 손으로 든 왜도를 막아냈다.
순간 그가 딛고 있는 지면이 움푹 파이고 충격이 주변으로 미쳤다.
“핫!”
율은 공중에서 뒤로 몸을 날리면서 재차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포스’의 기운이 검에 실렸고 그것은 곧장 무형의 칼날이 되어 가토 기요마사를 향해 뻗어 나갔다.
하지만 가토 기요마사의 갑옷 위로 붉은 빛이 어른거리며 포스에 의해 만들어진 검기를 막아냈다.
“제법 매서운 검기다만 내게는 통하지 않아!”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가토 기요마사는 공중에 아직 있는 율을 향해 힘껏 참격을 날렸다.
콰아아아!
성문 안쪽에서부터 거센 폭풍이 몰아치고 위쪽에 자리한 성루가 크게 흔들리며 그나마 남아있던 기왓장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호오.”
일격을 날렸던 가토 기요마사는 살짝 감탄어린 눈빛을 보냈다.
분명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율이 멀쩡한 모습으로 성문 반대편 쪽에 서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큭.”
율은 살짝 비틀거리면서 입가에 피를 흘렸다.
순간 가토 기요마사의 공격에 대항해 포스를 방패처럼 펼쳐 방어를 해 치명상을 면했지만 내상을 피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런 그녀를 향해 가토 기요마사는 천천히 걸어왔다.
‘그가 들어오게 해선 안 돼.’
율은 성문을 지나려는 가토 기요마사를 막기 위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 때, 그녀의 손을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혼자서 막느라 고생했어.”
“나리.”
“저 자는 내가 상대할 테니 뒤에 가서 몸을 추스르도록 해.”
상호의 말에 율은 잠시 망설였다.
그렇지만 상호를 믿기에 눈빛을 한 번 교환한 뒤에 천천히 물러났다.
이윽고 가토 기요마사를 앞에 두게 된 상호는 목을 좌우로 풀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 자가 바로 가토 기요마사란 말이지.’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떠올린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현대에서 함께 레이드를 뛰었던 헌터들 중에서도 일급에 해당되는 헌터들이었다.
‘지금의 율로도 상대가 할 수 없다고 해서 설마했는데. 최소한 하나의 능력은 7단계까지 돌파한 게 분명해보이네.'
7단계의 능력은 그야말로 초인의 능력을 가리킨다.
근력, 민첩성, 체력, 정신력.
6단계에서 7단계의 격차가 크기에 이 중 하나만이라도 7단계까지 도달한다면 단독으로 상급 몬스터도 토벌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하나의 능력만 편중해서 키웠어도 7단계까지 가려면 엄청나게 코어의 힘을 흡수해야 했을 텐데. 그동안 대체 얼마나 몬스터를 잡아댄 거야?'
6단계까지는 한 개의 몬스터 코어만으로도 각성이 가능하지만 초인이 될 수 있는 7단계부터는 여러 개의 코어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상호도 아직 7단계의 힘을 갖지 못한 것이다.
'위청홍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군.'
그가 준 코어의 힘을 모두 받아들인 결과, 체력을 뺀 나머지 세 개의 능력을 모두 6단계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평균적인 능력만 놓고 본다면 상호가 가토 기요마사가 훨씬 높은 것이다.
'그래도 7단계의 능력을 우습게 볼 수는 없지.'
상호는 자신이 봐온 일급 헌터들의 괴물 같은 힘을 기억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쨌든 여기서는 자신의 능력자로서의 경험을 믿고 싸워볼 수밖에 없었다.
"후! 그럼 어디 한 번 붙어볼까."
상호는 각오를 다지며 검을 옆으로 든 채 자신을 향해 마주오는 가토 기요마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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