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七장. 구원자. (1)
진주성이 함락되기 직전이 되고 고인후가 왜군에게 산 채로 붙잡히게 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거대한 물기둥과 함께 나타난 것은 바로 상호였다.
북방에서 언데드 몬스터를 상대하던 그가 과연 어떻게 이곳에 나타나게 된 것일까?
모든 것은 나흘 전의 일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으어어!”
“더럽게 끈질긴 놈일세.”
하반신을 잃고도 손을 뻗는 좀비의 머리통을 명군 병사가 철퇴로 으깼다.
여기저기서 쓰러트린 언데드들을 뒷정리를 하는 것을 보고 상호는 뽑았던 검을 집어넣었다.
“이걸로 이제 지루한 싸움도 끝이다."
하루마다 조금씩 이동해서 거점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몰려오는 언데드들을 소탕하기를 반복해왔다.
매일 같이 방어전을 치르느라 물자 소모와 병사들의 피로도가 심히 누적되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언데드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데스 나이트 3기와 코어를 가진 상위 개체 20여 마리를 토벌하고 5,000이 넘는 좀비나 스켈레톤 같은 일반 언데드를 처치했다.
"이제 남은 건 그 구울 로드하고 일곱 마리의 상위 개체 정도인가."
이번 게이트의 로드는 구울이었다.
아무래도 게이트 등급이 높다보니 그만큼 놈에게 주입된 힘이 강해 일반 로드보다 위험한 편이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 같은 상급 몬스터가 로드가 아닌 게 어딘가.
남은 일반 몬스터도 이제 얼마 안 남았고 데스 나이트도 더 없으니 큰 피해 없이 토벌이 가능하다고 예상하는 바였다.
“그래도 이만하게 끝내서 다행이지. 솔직히 명군이 내 지휘에 따라주지 않았다면 아주 애먹었을 거야.”
처음엔 지시를 따르지 않던 명나라 군사들이지만 차츰 상호의 지휘가 자신들을 승리로 이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고분고분 지시를 따르게 되었다.
특히나 상호 덕분에 실패를 하고 처벌을 받을 처지였다가 이제는 큰 공을 세우게 된 위청홍은 전과 다르게 큰 호의를 베풀며 의형제까지 맺자고 하는 정도가 되었다.
“으윽! 그럼 좀 쉬어볼까.”
게이트의 활성화 주기를 파악한 바에 따르면 아직 25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상호는 위청홍에게 건의해 이곳 마지막 방어 거점에서 12시간 휴식을 건의하였다.
물론 이 요청은 바로 수락되었다.
상호는 곳곳에 시체 썩는 냄새가 풀풀 나는 장소라도 일단 다리 펴고 쉴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된 병사들 사이를 지나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그런데 그 길에서 남준을 만나게 되었다.
“아직 몸이 완전치 않을 텐데 돌아다니면 어떻게 하나. 내가 말했지만 데스 나이트의 칼날에 음기가 있어 베인 상처가 쉬이 낫지 않는다고 했잖아.”
상호는 전전 날 전투에서 데스 나이트를 상대하다가 칼에 베였고 그로 인해 오늘 전투에 참전하지 않고 구호소에 있었던 그가 이렇게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걱정부터 하였다.
하지만 남준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다급히 말했다.
“토포사 나리, 급히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선전관이 와있습니다.”
“뭐라고?”
상호는 아직 이곳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선전관이 왔다는 말에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의 일도 애당초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 때문에 시작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엔 또 뭘 시키려고 그러지?’
이번 일만 끝나면 무슨 수를 쓰든 바로 남쪽으로 가려고 마음먹었던 바다.
그런데 하필 여기 일이 거의 마무리할 시점에서 선전관이 온 것이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선조의 어명을 전하러 온 선전관을 만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예? 남쪽의 진주성으로 가라고요?”
“주상의 어명이시오.”
선전관이 확답하듯 어명이라는 말을 꺼냈다.
상호는 생각 못한 일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에는 내 행보에 방해를 주더니 이번에는 오히려 도움이 될 줄이야.’
상호에게 어명이 내려온 것은 다음과 같은 배경 때문이었다.
얼마 전, 진주성에 왜군이 대규모 공격이 있다는 소식이 한양의 조정에 당도했고 이에 류성룡과 이항복 같은 대신들은 수만 명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어서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주청했다.
선조가 그래도 이러한 주장에는 동의하며 명군에 출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여송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바로 나서는 것을 주저했다.
게다가 도원수가 되어 조선군의 지휘권을 가진 권율도 수만에 달하는 왜군을 현 시점에 막기가 역부족이라고 차라리 성을 비우고 피난을 하라고 김시민에게 통보를 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을 펼쳤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항복은 선조에게 한 가지 방안을 내놨다.
“올라온 장계에 따르면 김시민은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킬 것입니다. 만약 군대로 도울 수 없다면 소수지만 왜군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선인과 그 휘하의 병력을 보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이러한 이항복의 제안에 조정을 꽤 시끄러웠다.
하지만 명군의 요괴 토벌대가 처한 위기를 일거에 해소시킨 전공이 있어 몇몇 대신들은 찬성의 뜻을 내비쳤다.
여기에 이여송 또한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적극 찬성하니 선조는 결국 상호를 진주성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진주성인가.”
상호는 진주성에 벌어진 두 번째 전투가 어떻게 끝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역사와 다르게 김시민이 아직 살아 있다지만 지금 전해들은 상황만 놓고 보건데 역사대로 진주성의 군민 모두 몰살당하는 것은 거의 확정 사항이었다.
‘물론 내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제이지만 말이야.’
장계와 함께 전해진 서한에는 현재 진주성이 처한 상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 내용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선봉으로 진주성에 가고 있다는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디어 그 자를 만날 수 있겠구나.’
곽재우와 율마저도 어찌 할 수 없었다던 가토 기요마사를 상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상호는 바로 휘하 토벌대원에게 떠날 준비를 서두르게 하고 자신은 위청홍을 만나러 갔다.
“자네가 가다니. 참으로 아쉽군 그래.”
“어명이니 어쩔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제가 없어도 장군과 장군의 병사들만으로도 충분히 남은 요괴를 소탕할 수 있을 겁니다.”
“자네가 그리 말해주니 안심이 되는군. 내가 자네 덕에 전공을 거뒀으니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
위청홍은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앞에 작은 보따리를 내놨다.
“내 작은 성의네.”
“이것은······.”
상호는 조심스레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놀랍게도 4개의 몬스터 코어가 있었다.
상호가 놀란 눈으로 보자 위청홍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세운 공이 있는데 어찌 전리품을 독식할 수 있겠나.”
“하지만 이건 상관인 이여송 장군에게 바쳐야 하는 물건이 아닙니까?”
“하하! 걱정 말게. 애초에 이것은 자네에게 줄 몫을 따로 떼어놓은 것이라 장군께는 보고하지 않았네. 그러니 안심하게 가져가게.”
일부러 상호를 위해 자신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을 위청홍이 할 줄이야.
새삼 첫 만남 때를 떠올리며 격세지감을 느낀 상호는 그의 선물을 감사히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몬스터 코어의 힘을 취할 필요가 있었는데 잘 됐네.’
가토 기요마사가 얼마나 강한 지 알 수 없기에 상호는 이 코어들로 자신의 힘을 강화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Ⅲ단계 게이트의 처리를 위청홍과 그의 부대에 맡기고 서둘러 남쪽으로 향했다.
“미리 배를 수배해놓다니. 이항복 대감의 도움이 큰 걸.”
육로로 이동하는 것보다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게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기에 이항복은 아예 선전관을 보내면서 경기수영의 맹선 한 척을 가장 가까운 대동강 상류 쪽에 준비해놓았다.
덕분에 상호는 서해를 따라 호남 지방까지 내려가고 다시 남해로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진주성에서 검은 연기가 내뿜어지고 성이 함락 직전이었다.
“빨리 배를 육지에 대지 못하나?”
“지금 최대로 노를 젓고 있는 겁니다.”
상호의 재촉에 선장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대로 배가 강가에 당도하기까지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일단 나 혼자서라도 먼저 갈 테니 자네들은 뒤따라 오도록 해.”
“혼자서 저 사지에 가시겠다니요?”
“내 한 몸을 지킬 자신이 있으니 염려 안 해도 돼.”
이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수만의 왜병에게 포위되어도 상호는 살아나올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율이 상호에게 가까이 와서 말했다.
“다수의 적이 있는 곳에서는 등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니 저도 같이 가겠어요.”
“나야 율이 함께 하면 든든하지.”
상호가 율을 허락하자 곧 네 명의 군관들도 저마다 말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소관도 함께 데려가주십시오.”
“미안하지만 내가 데리고 갈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이 한계다.”
상호의 말에 군관들은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들이 아니라 율이 상호와 함께 가는 것에 이의를 하지 않았다.
'여기서 헤엄쳐서 강가에 도착해 성으로 가는 것도 시간이 걸린다. 단번에 성 안으로 들어가려면 힘을 다소 쓰더라도 강물을 이용하는 게 최선이다.'
상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뱃머리 위에서 ‘물의 속성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강가의 물을 자신의 제어 하에 두었다.
“율, 내 옆으로 바싹 오도록 해."
“네.”
상호가 시키는 대로 율이 상호 곁에 섰다.
이 때, 그녀의 허리로 팔이 감싸졌다.
“······!”
“이렇게 안 하면 안 되거든.”
상호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는 율에게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율을 옆구리에 낀 채로 배에서 뛰어내렸다.
첨벙.
“어엇?”
“헤엄쳐 갈 셈인가?”
상호에 대해 모르는 선원들은 의아해했다.
그런데 이 때, 갑자기 배가 크게 출렁이며 흔들렸다. 그러자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은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갑판 위에 넘어졌다.
“갑자기 무슨 일이래?"
“어서 키를 잡아!”
허둥대며 선원들은 배가 거칠어진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게끔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자 선원들은 잠시 손을 놓고 위를 올려보았다.
“허억!”
“시상에!"
선원들은 수십 장이나 솟구친 물기둥을 보고 놀라 자빠졌다.
그러는 사이에 물기둥은 주변에 거친 물살을 일으키며 진주성 쪽으로 빠르게 접근해갔다.
"좋았어!"
상호는 물기둥의 꼭대기에서 신이 나서 소리쳤다.
세상을 발 아래에 두고 파도 타기를 즐기니 잠시 상황을 잊고 희열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진주성 위까지 도달하였고,
"율, 꽉 잡아!"
"예."
상호는 자신의 옷자락을 와락 잡는 율을 안은 채 방대한 물을 진주성 내부에 퍼부으며 성 안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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