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五장. Ⅲ단계 게이트. (4)
휴식 시간도 없이 중노동을 한 끝에 제법 그럴싸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적의 존재가 지척에 있었지만 아직 움직임이 없었기에 노동으로 파김치가 된 병사들은 짧게나마 교대로 쉴 수 있도록 조치가 이뤄졌다.
하지만 상호는 다른 이들처럼 편하게 쉬지 않았다.
‘그나마 체력이 좋은 내가 이 정도로 지쳤다고 편하게 쉬면 염치없는 일이지.’
이리 생각하며 상호는 진지를 돌아다니며 부실한 부분을 직접 보강하였다.
밤이 깊어지고 마침내 멀리서 서성거리던 언데드 군세가 이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짧게나마 쉰 병사들은 각자 위치에서 대기하며 전투 태세를 갖췄다.
물론 상호와 토벌대도 만전의 준비를 갖추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보름달이 떴고 주변 시야가 훤하였기에 접근하는 언데드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이런 적을 보면서 상호가 율에게 말했다.
“율, 전날 힘을 많이 썼으니 오늘은 되도록 무리해서 능력을 쓰지 말고 딱 필요할 때만 쓸 수 있도록 해."
"네, 나리."
사실 이런 걱정은 실전을 숱하게 겪어온 율에게 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어디까지나 긴장을 풀기 위함이었다.
이윽고 좀비, 스켈레톤, 구울 같은 언데드들이 진지 바로 아래까지 당도했다.
“모두 기다려.”
성벽으로 지켜지던 전 날의 전투와 다르게 오늘은 목책과 고지대라는 지형적 이점만 갖고 싸워야 하는 형편이다.
그런 만큼 더욱 일치단결해서 싸울 필요가 있었다.
“꿀꺽.”
"하아, 하아."
상호의 지시가 있기를 기다리며 토벌대원들은 긴장된 눈빛으로 자신들을 향해 오는 언데드들을 보기만 했다.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조금씩 다가오는 언데드들!
이들은 눈앞에 장애물이 있어도 옆으로 돌아간다는 판단을 못했다. 그랬기에 장애물에 걸려 앞으로 못 오는 놈들도 적지않게 있었다.
하지만 그런 놈들을 뺀 나머지는 마침내 두세 걸음 간격까지 왔다.
“지금이다!”
상호의 외침에 토벌대원들은 창을 내질러 좀비의 가슴 한가운데를 찔렀다.
“크윽! 얌전히 있으라고!”
“창을 놓치지 마라!”
버둥거리는 좀비의 움직임이 거셌지만 전원이 능력자인 토벌대원들은 그대로 좀비를 뒤로 밀었다.
이에 뒤따르던 좀비들이 떠밀려졌고 경사를 따라 대거 구르게 되었다.
“바로 이 때다! 어서 던져!”
“에이잇!”
뒤에서 항아리가 던져졌다.
거기엔 미리 준비한 기름이 채워져 있었고 넘어진 좀비들의 몸을 흠뻑 젖게 했다.
쉬융!
여기에 불화살이 날아드는 고지로 오르는 한쪽 면이 삽시간에 불탔다. 이로인해 이쪽으로는 언데드들이 접근은 못했다.
“좋아, 이쪽은 됐다.”
상호는 대비한 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우선 언데드 군세가 제일 처음 다다른 쪽을 불로 막았으니 이제 다른 곳을 지킬 차례다.
“여긴 위쪽의 명군에게 맡기고 다른 방면을 지키러 가자.”
“옛!”
상호와 그를 따르는 토벌대원들은 일종의 유격대로서 고지를 향해 오는 언데드들을 막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으로 위로 오는 길은 하나로 좁혀졌고 언데드들은 그리로 집중되었다.
“쏴, 쏴라.”
명군 지휘관의 명령에 고지 위쪽에서 아래를 향해 놓인 불랑기포가 불을 뿜었다.
자그마한 탄환을 한꺼번에 쏘는 조선군과 다르게 큰 탄환을 한 발만 발사하는 명군의 화포는 머리를 부서야만 움직임이 멈추는 언데드들에게 썩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언데드들이 밀집되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지직.
피륙이 박살나는 소음과 함께 다수의 언데드들이 형체를 잃고 부서졌다.
“와아!”
“좋았어!”
화포가 굉장한 효과를 내자 내내 겁에 질렸던 명군의 사기가 올랐다.
곧 이들도 불화살을 쏘며 응전을 펼쳤다.
‘그래, 딱 이 정도만 해주면 된다.’
상호는 명군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그와 유격대의 목표는 어보미네이션이나 코어를 가진 상위 언데드들을 발견해 바로 처치하는 것이 되었다.
혼란스런 전장 속에서 그러한 위협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엔 믿음직한 눈이 둘이나 있다.
“찾았습니다.”
“나도 찾았다.”
상호는 ‘암시’ 능력으로 상위 개체를 발견한 유길준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답했다.
좀비들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거한의 좀비.
놈은 무기를 갖지 않은 다른 좀비들과 다르게 손에 거대한 해머를 들고 있었다.
“불화살을 쏠까요?”
“아니, 저 녀석한테 불화살 정도는 통하지 않는다.”
상호는 저 좀비를 쓰러트리는 것은 목을 치는 것밖에 없다고 직감했다.
바로 이 때,
“나리, 제가 놈을 처치하겠습니다.”
결의 가득한 눈빛으로 율이 상호를 보았다.
이를 본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허가를 내렸다.
“금방 다녀올게요.”
율은 상호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그대로 무기를 든 좀비 워리어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놈과의 사이엔 다수의 좀비와 구울들이 포진한 상황.
상호는 직접 활을 잡고 토벌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녀가 목표에 다다를 수 있게끔 엄호하는 거다.”
“네!”
쏘아지는 화살 세례에 율을 향해 팔을 뻗던 좀비들이 쓰러져갔다.
점차 속도를 낸 율은 한 번의 도약으로 뭉쳐 있는 좀비들의 머리 위를 날아 좀비 워리어의 근처에 당도했다.
“으어어어어!”
좀비 워리어는 자기 앞에 나타난 율을 향해 지면에 끌었던 해머를 들어올렸다.
율은 머리 위로 거대한 쇳덩어리가 떨어지는 상황이었지만 침착하게 그것을 피하면서 검으로 무릎 뒤쪽을 빠르게 베었다.
“으어어.”
무릎을 꿇는 좀비 워리어의 뒤로 돌아간 율이 그대로 목을 노리고 검을 힘껏 그었다.
그러자 좀비 워리어의 머리는 몸통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단 2합 만에 저 요괴를 쓰러트리다니.”
“역시 여인이라고 얕볼 수 있는 아이가 아니야.”
첫 대면 때는 미덥지 않았고 상호의 여인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전 날의 전투에서 보여준 활약과 그리고 지금의 모습을 통해 남준을 비롯한 군관들은 율을 한 사람의 무인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율이 있으니 내 부담이 한결 덜 수 있어 좋구나.’
상호는 자신을 대신해 강한 몬스터를 쓰러트려주는 율의 존재에 속으로 감사하며 자신은 토벌대의 지휘에 전념했다.
불과 사십 명에 불과하지만 상호의 토벌대는 위기에 처한 명군을 계속해서 구했고 강력한 언데드를 차례대로 격파해나갔다.
그 덕분에 고지에 세운 방어 진지는 한 번도 무너지지 않고 견고한 방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어둠 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이 기척은?”
스켈레톤의 머리를 검으로 박살내던 상호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세가 다소 줄기는 했어도 아직 꺼지지 않은 불길 너머에서 점차 소리가 커져갔다.
그리고 잠시 뒤,
해골마를 탄 데스 나이트가 불길을 뛰어넘어 나타나게 되었다.
상호는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데스 나이트를 보고 혀를 입술을 핥았다.
그것은 긴장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데스 나이트가 뿜어내는 기세는 무수한 전투를 경험한 토벌대원 조차도 겁먹게 하기 충분했다.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데스 나이트는 붉은 안광이 번뜩이는 검은 투구를 쓴 머리를 돌려 상호 쪽을 보았다.
‘데스 나이트는 여럿의 상대를 맞이할 경우에 가장 강한 존재와 싸우기를 본능적으로 바란다고 했던가.’
현대의 헌터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이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다.
지금 데스 나이트는 첫 상대로 여기 있는 인간 중 가장 강자인 상호를 지목한 것이다.
상호는 주변을 보고 말했다.
“놈은 내가 맡을 테니 다들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해라.”
“하, 하지만!”
“어차피 놈의 표적은 나다. 그러니 괜히 말려들어 죽거나 다치지 말고 이 싸움에 이길 수 있도록 다른 언데드들을 막아내는데 힘을 쏟아.”
상호는 염려하는 남준에게 사전에 약속한 대로 지휘권을 양도하고 근처를 떠나게 했다.
아직 설익은 능력자인 그들이 감당하기엔 데스 나이트가 너무 강한 상대였기에 내린 조치였다.
“전 남겠어요. 부디 그리하게 해주세요.”
“···그래.”
옆에 남아준 율을 보며 상호는 안심하듯 대답했다.
솔직히 데스 나이트 같은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로 혼자 싸운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런 점에서 동등한 수준의 능력자가 된 율이 같이 싸워준다면 그만큼 든든한 일이 없었다.
철컹.
나란히 선 상호와 율을 보며 데스 나이트는 검은 영기로 둘러싸인 장검을 아래로 비스듬하게 내렸다.
“온다!”
상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데스 나이트가 해골마를 몰아 두 사람을 향해 돌진해왔다.
이를 피해 좌우로 흩어지는 두 사람!
이 순간!
데스 나이트의 검이 아래서 위로 강하게 휘둘러졌고 그 검압에 땅에 갈라졌다.
“크으윽!”
이렇게 오는 검압에 상호가 뒤로 밀려났다.
이때, 율이 반대편에서 몸을 날려 검을 찔러갔다.
사각지대에서의 확실한 일격이기에 충분히 닿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참 잘못된 생각이었다. 언데드인 데스 나이트는 시야와 청각이 없지만 일정 영역 안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초지각 능력이 있었기에 사각지대는 존재치 않았던 것이다.
채앵!
놀라울 만큼 빠르게 몸을 돌리며 검을 내지른 데스 나이트.
검이 부딪치면서 율이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율!”
상호는 율이 반격을 받아 날아가는 것을 보고 지체없이 ‘수룡시’를 날렸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는 가볍게 타고 있는 해골마를 움직여 방향을 잡고 검을 연달아 휘두르는 것으로 공격을 무력시켰다.
‘우리 공격이 모두 통하지 않다니.’
새삼 상위 몬스터의 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율이 다시 자세를 갖추고 일어선 것을 확인한 상호가 머릿속에 내내 갖고 있던 대책 하나를 사용했다.
“수룡의 승천!”
상호는 땅에 한 손을 대고 행주산성에서의 싸움 이후로 새로 개발한 신 기술을 사용했다.
드르륵.
데스 나이트와 그가 탄 해골마가 서 있는 지면 아래가 위아래로 흔들리더니 간헐천이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위로 솟구치는 수압에 두 존재 모두 꼼짝도 못했다.
“지금이야, 율!”
상호의 외침에 율은 최대한 포스의 힘을 검에 부여하고 곧장 달려 물줄기와 함께 적을 베었다.
일격에 베인 것은 데스 나이트가 탄 해골마였다.
머리가 부서진 해골마의 뼈뿐인 몸은 마력을 잃고 산산이 부서져서 물줄기에 의해 위로 올라갔다가 사방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 해골마에 탑승했던 데스 나이트는 율의 일격을 피하고 물줄기에서도 탈출하였다.
그것을 본 상호는 능력 발동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놈을 말에 끌어내리는 것은 성공했군.”
기동력이 좋고 좋은 위치를 잡을 수 있는 기마 상태보다는 훨씬 상대하기 쉬워진 것이다.
상호는 정신력을 상당히 소모케 한 ‘수룡의 승천’ 때문에 어지러움을 느끼며 검을 잡았다.
율 또한 신중하게 데스 나이트를 보며 자리를 지켰다.
‘놈의 움직임이 빠르고 사각지대가 없다고 해도 둘이 동시에 덤비면 빈 틈을 만들 수 있다.’
데스 나이트를 가운데에 두고 상호와 율은 멀지만 고갯짓으로 의사소통을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데스 나이트를 향해 돌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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