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一장. 평양성 전투. (4)
어제와 똑같이 포격을 시작으로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 공격을 개시했다.
북쪽 모란봉 쪽에 집중된 명군을 막기 위해 고니시 군 전력 대부분이 집중되었기에 조선군은 쉽게 외성으로 진입하는 성벽을 넘을 수 있었다.
“각 조는 산개해서 진격해라.”
“백성들과 왜군을 철저히 구별하도록!”
한 번 성내 매복에 의해 호되게 당한 바 있는 조선군은 신중하게 평양성 남쪽 외성을 차근차근 점령해갔다.
문제는 고니시의 본진이 있는 중성까지 가는 길에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길을 완전히 차단했군.”
선봉에 선 상호는 중성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항구문으로 향하던 중에 일단의 왜군과 마주쳤다.
지난번과 같은 매복은 더는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전략 수정에 따라 외성 부분을 지키는 임무를 띤 약 3천의 왜군은 수백 명 단위의 부대로 나뉘어 주요 길목을 지켰다.
조총 부대가 있어 대포 없이 돌파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그래도 뚫고 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항구문으로 가는 다른 길목도 이렇게 왜군에 의해 막혀 있을 터였다.
지금으로선 어떻게든 돌파를 해야만 했다.
“정면 돌파는 어떻게 봐도 무리입니다.”
“피해가 무척이나 클 게 분명합니다.”
상호의 뜻에 남준을 비롯한 휘하 군관들은 반대 의견을 내놨다.
하지만 상호에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걱정 마. 저들은 결코 조총을 쓰지 못할 테니깐.”
“네?”
상호는 의문을 품는 이들 앞에서 가볍게 웃었다.
한 편, 상호가 속한 조선군을 막아선 왜군 측 지휘관인 마쓰라 시게노부는 일찌감치 자신의 애도를 뽑아들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목숨으로라도 이곳을 사수해야 한다.”
“넷!”
언젠가 원군이 온다.
그것을 믿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휘하 제장들에게 성의 방어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어제의 야습만 성공했다면 이곳까지 뚫리는 일이 없었을 터인데.”
원군이 올 때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해 첫 날 전투를 벌이고 긴장이 풀려있는 틈을 야습을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해 결국 바로 다음 날인 오늘도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것이다.
“어디 올 테면 와 봐라!”
주군에 대한 충의로 불타며 마쓰라 시게노부는 약 300보 거리 밖에서 멈춰 있는 조선군을 노려보았다.
투둑.
그런데 이 때, 그의 손등 위로 빗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뭐, 뭐냐?”
마쓰라 시게노부는 놀라며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다소 구름이 끼었지만 비가 올 날씨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지금 계절이면 비가 아닌 눈이 와야 정상이었다.
쏴아아.
“비?”
“우왓, 차가워.”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
영하의 날씨였기에 무척 차가웠지만 그것은 분명 비였다.
더욱이 놀라운 일은 그 비가 왜군이 진형을 갖춘 일대에만 한정해서 내린다는 사실이었다.
“이, 이런! 뭘 멍하니 있는 것이냐! 당장 화승에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해라!”
마쓰라 시게노부의 일갈에 뒤늦게야 휘하 무사들과 왜병들은 사태 파악을 할 수 있었다.
겨우 부슬비 정도지만 이 습기가 화승에 스며든다면 조총을 쓰는 게 불가능해진다.
비가 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조총을 무방비로 해놓고 있던 조총병들로선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왜 저기에만 비가 오는 거지?”
“천지신명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건가?”
사정을 모르는 조선군 병사들은 이 난데없는 기현상을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코 이것은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대놓고 쓸 수 없을 때는 이런 식으로 능력을 써먹으면 되지.’
상호는 방금 전에 자신이 가진 ‘물의 속성력’을 사용했다.
일전에 이치 전투에서도 바로 이런 방법으로 조총병들을 무력화시켰는데 그 수법을 좀 더 은밀하게 바꿔 왜군들이 있는 상공에 물방울을 응집시켜 비처럼 내리게 한 것이다.
“토포사 나리께서 하신 겁니까?”
“후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적의 조총이 잠시 무력화된 지금이 절호의 돌격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으음, 그 말씀대로입니다.”
상호는 허리의 검을 뽑고 왜군을 향해 제일 먼저 돌격했다.
이에 남준을 비롯한 토벌대원들도 그 뒤를 따랐다.
“가자!”
“와아아아!”
돌격하는 조선군을 보고 왜군은 부랴부랴 무력화된 조총 대신 장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를 본 상호는 뛰면서 숨을 깊게 삼킨 뒤에 그대로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단순히 검을 휘둘렀을 뿐이지만 그로인해 발생한 검풍은 창을 내세웠던 창병들이 뒤로 넘어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우아앗!”
상호는 와르르 무너지는 왜병들을 밟으며 단숨에 왜군 진형 한가운데로 뛰어드는데 성공했다.
사방이 적인 상황.
두정갑을 입고 있고 또 그간 쌓아올린 능력치 덕에 어지간한 공격은 피해낼 자신도 있었지만 그래도 방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죽기 싫으면 무기를 버리고 물러나라!”
상호는 이렇게 외치면서 몸을 계속 회전시켰다.
한 번 몸을 돌릴 때마다 그의 지척에 있던 왜병들은 피분수를 뿌리며 쓰러졌다.
“으아앗!”
“밀, 밀지 마!”
순식간에 상호의 주변으로 시체만 즐비했다.
이런 가운데, 뒤따라 온 토벌대원들과 여러 조선군 병사들이 혼란에 빠진 왜병들을 덮쳤다.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양측의 병사들은 서로를 향해 필살의 각오로 무기를 휘둘렀다.
“우오오오!”
“물, 물러서지 마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상호를 막기 위해 다수의 왜병들이 한꺼번에 덤볐다.
그렇지만 덤벼든 왜병들은 모두 상호가 내지른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전부 시체가 될 뿐이었다.
“이익! 내가 막겠다.”
상호를 막기 위해 두꺼운 갑주를 입은 무사가 원월도와 흡사한 나기나타를 들고 길을 막아섰다.
조선인보다 체격은 작은 편인 다른 왜병들과 다르게 상당한 거구인 무사는 두 손으로 창대를 잡고 그것을 사선으로 힘껏 휘둘렀다.
서컹!
“엑?”
“방해다, 비켜.”
단숨에 나마나타와 팔 한 짝을 벤 상호가 옆을 지나쳐갔다.
단숨에 무사를 격퇴한 상호의 눈에 왜군 지휘관 마쓰라 시게노부가 보였다.
‘저 자가 지휘관이군.’
등에 꽂은 깃대며 번쩍번쩍한 갑주만 봐도 대강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적 지휘관을 베어 쓰러뜨린다면 남은 왜군은 금방 와해될 터!
“그렇다면 적장을 내가 쳐야 하겠지!”
상호는 이참에 적장의 목을 베는 공을 세워볼 참으로 과감히 마쓰라 시게노부가 있는 쪽으로 달렸다.
그런 상호를 막기 위해 마쓰라 시게노부의 주변에 있던 무사들이 여러 무기를 들고 덤벼들었다.
“흐라차!”
상호가 기합을 발하며 한 명의 무사를 왼손 주먹으로 가격해 뒤쪽으로 날려 보낸다.
이어 몸을 돌리며 다른 방향에서 왜도를 내리쳐오던 무사를 베고 그를 방패삼아 두 명의 무사가 휘두른 검격을 방어했다.
“죽어라!”
뒤에서 들린 외침에 그대로 뒤로 발차기를 날렸다.
세 명의 무사를 쓰러뜨렸지만 어느새 열 명 가까이 되는 무사들이 주위를 포위했다.
‘쉽게 지휘관을 잡게 놔두지 않겠다는 건가.’
상호는 무리하지 않고 신중하게 자신을 에워싼 무사를 보았다.
이런 그의 귓가엔 양측 병사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척에서 전투가 펼쳐지고 있지만 지휘관인 마쓰라 시게노부의 주변에는 아직까지 상호 한 사람만 다다른 상태였다.
‘뭐 도움은 없어도 돼.’
전국 시대를 거쳐 오면서 무수한 실전을 치른 무사들의 실력은 분명 대단했다.
조선시대에 갓 와서 왜군과 처음 싸울 때 그 실력을 얕봤다가 호되게 데인 적도 있다.
하지만 그 뒤로 계속해서 숱한 몬스터들을 무찌르며 능력을 올리고 싸움 실력을 향상시킨 상호 앞에서는 더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덤벼!”
상호는 과감히 무사들 앞에 뛰어들어 검을 출수했다.
이에 표적이 된 두 명의 무사가 반응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한순간 눈을 시리게 하는 섬광뿐이었다.
“커헉!”
“보이···지가 않았······.”
상호는 쓰러지는 무사들을 등지며 다음 상대를 쫓았다.
이런 그를 향해 무사들이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전후좌우에서 예기를 뿜으며 날아드는 왜도!
‘그렇다면!’
상호가 택한 도주로는 바로 하늘이었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무사들의 머리 위로 훌쩍 뛰어올라 포위망 바깥으로 착지했다.
“허억!”
“뒤다, 뒤!”
황급히 상호가 있는 쪽으로 무사들이 몸을 돌렸다.
그런데 막상 몸을 돌린 그들이 본 곳에는 상호의 모습이 존재하지 않았다.
“바람?”
한 무사가 살결을 통해 느껴진 바람을 인식한 그 순간.
그제야 상호가 자신들의 뒤로 이동했다는 사실과 그의 검에 베였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털썩.
동시에 쓰러지는 무사들.
상호는 천천히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이제 남은 것은 그대뿐이군.”
“이 마쓰라! 설령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주군의 명에 따를 것이다!”
지켜줄 호위 무사가 없게 된 상황이었지만 마쓰라 시게노부는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왜도를 상호에게 겨누며 투지를 불살랐다.
그 모습에 상호 역시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진지하게 임했다.
“이렇게 나오는 상대를 두고 설렁설렁 대할 수는 없지.”
상호는 준비 자세를 취하고 마쓰라 시게노부를 바라봤다.
방금 전에 홀로 무사들을 간단히 쓰러뜨린 상호의 믿을 수 없는 실력을 봤음에도 먼저 달려든 것은 마쓰라 시게노부이었다.
“우오오오!”
왜도를 앞세운 돌격!
서 있는 상호를 일격에 베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었다.
“······.”
이에 상호는 비스듬하게 검을 옆으로 두고 기다렸다.
간격이 좁혀지고 먼저 상호의 머리를 향해 왜도가 쾌속하게 떨어졌다.
물론 그것은 마쓰라 시게노부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앗!”
자신의 머리가 쪼개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상호 역시 검을 앞으로 그어나갔다.
분명 나중에 출수했음에도 너무나 빠른 검은 마쓰라 시게노부의 몸을 가로질렀다,
“분, 분하다.”
정수리에서 한 뼘 떨어진 위치에서 멈춘 왜도가 부들부들 떨리다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주인이었던 마쓰라 시게노부도 가슴에 큰 상처를 입고 상호 옆으로 쓰러졌다.
“대장이 적장을 물리쳤다!”
마침 상호가 싸우는 곳까지 진격해온 조선군 병사 중에 김태진이 상호와 그 앞에 쓰러진 왜장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것을 기점으로 아직까지 싸우던 왜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퇴각해라!”
살아남기 위해 항구문 쪽으로 왜군들은 후퇴했다.
상호는 구태여 바로 그들을 뒤쫓지 않았다.
지금 이곳의 인원만으론 항구문을 수비하고 있는 왜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다른 아군을 도우러 간다.”
“네!”
상호는 다른 길목에서 왜군과 싸우고 있는 다른 조선군을 돕고자 병력을 움직였다.
상호가 이끄는 부대가 가세하면서 조선군은 차례차례 왜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외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은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힌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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