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五장. 마도구를 제작하다. (4)
아까 전에 임충과 한바탕해서 조금 지쳤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색하지 않고 율과의 일전에 진지하게 임했다.
파캉!
격렬하게 교차한 검이 달빛을 받아 번쩍거린다.
율이 선보이는 검술은 화려하면서도 또 빨랐다.
강화된 ‘민첩’과 ‘매의 눈’ 능력이 아니라면 율의 검을 쫓아 상대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끼리릭.
“역시 검술로는 못 따라가겠네.”
“그래도 전보다 많이 실력이 늘어나셨어요, 나리.”
검을 부딪치며 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았다.
상호는 검을 부딪치면서 암암리에 ‘물의 속성력’을 끌어올렸다.
“수룡시!”
근접한 거리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율 또한 자신의 능력을 발동시켰다.
파앗!
‘포스’의 능력이 둘러진 검은 호선을 그리며 상호의 머리 위에서부터 날아든 ‘수룡시’를 파괴했다.
‘역시 막히는군.’
상호는 임충도 막아낸 공격을 율이 못 막아낼 리 없다고 생각했기에 당황하지 않고 다음 공격을 이어갔다.
그 공격은 임충에게 했던 것과 같은 다수의 ‘수룡시’를 사방에서 날리는 것이었다.
‘자, 과연 어떻게 대응할까.’
율의 대응을 기대하며 일제히 ‘수룡시’를 날렸다.
이러한 상황에 율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그렇지만 곧 그녀는 냉정하게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을 취했다.
“음?”
상호는 율의 주변으로 투명한 장벽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 주인의 변화와 상관없이 ‘수룡시’들이 장벽과 부딪쳤다.
퍼버벙!
꽤 큰 소리와 함께 ‘수룡시’가 장벽에 부딪쳐 비산되었다.
상호는 아무리 위력을 일부러 낮췄다고는 하지만 이리 간단히 장벽에 맞히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가르쳐주긴 했지만 벌써 포스 실드를 저 정도까지 견고하게 만들어낼 줄이야.’
상호는 율이 ‘포스’ 스킬을 얻고 난 뒤에 그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틈틈이 해주었다.
그 중엔 ‘포스’ 능력으로 발동시킬 수 있는 ‘포스 실드’에 대한 조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능력은 결코 쉽게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서 현대의 헌터들 중에 ‘포스’ 스킬을 익힌 자들도 거의 1,2년은 스킬을 꾸준히 연마해야 다룰 수 있는 그런 능력이었다.
그런데 율은 가르쳐준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포스 실드’를 완벽하게 다룬 것이다.
‘이런 게 가능한 것도 율이 뛰어난 덕이겠지.’
순간, 상호는 재능이 얼마나 무서운 지 절실히 느꼈다.
그런데 능력을 펼친 율의 낯빛은 다소 창백해져 있었다.
“이런, 괜찮아?”
“네에.”
“아직은 포스 실드를 펼치기엔 정신력이 부족해서 어지럼증이 있는 모양이네. 오늘은 이만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상호의 말에 율은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걸음을 떼려던 율이 잠시 휘청거렸다.
“어이쿠.”
상호는 그런 그녀를 반사적으로 붙잡아주었다.
부축을 받은 율은 순간 돌처럼 굳었다.
상호는 말했다.
“방까지 데려다줄게.”
“아······.”
율은 뭔가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전과 같았다면 황급히 자신의 몸을 붙잡고 있는 상호의 팔을 뿌리쳤겠지만 지금은 그러지도 않았다.
좀 떨어진 율의 방까지 두 사람은 함께 나란히 걸었다.
이윽고 방문 앞까지 오게 되었고 상호가 먼저 살짝 떨어지면서 말했다.
“그럼 들어가서 쉬어.”
“저기···나리.”
“응?”
가려는 자신을 붙잡는 율의 말에 상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침 달빛이 율을 비췄다.
율에 대해 어리게만 봤던 상호지만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으윽, 정신 차리자!’
현대인의 사고를 가진 상호로선 미성년자인 율에게 흑심을 품는 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율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나리, 괜찮다면 제가 수청을 드리고 싶어요.”
“뭐?”
“지난번에 절 구해줬을 때부터 전 나리를 사모했었어요. 그러니 부디 소녀의 뜻을 거절하지 말아주시어요.”
“쿨럭!”
율이 설마 이런 말을 해올 줄 몰랐던 상호는 크게 당황했다.
수청을 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와, 미치겠네.’
솔직히 싫지는 않았다.
율은 충분히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싶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조선 시대에서 여성 쪽에서 먼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만큼 율이 지금 그만큼 자신을 많이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거저 들어온 이런 좋은 기회를 두고 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아까도 생각한 것이지만 상호는 율의 나이가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조선 시대에는 그런 게 상관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지금은 스스로도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다시 미래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희망의 끈을 아직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만약 자신이 훌쩍 떠나고 나면 남겨진 율은 어찌 된단 말인가.
완전히 책임도 질 수 없는데 율의 처음을 가져간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답을 망설였던 상호는 곧 율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미안, 율. 네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구나.”
“···아니에요, 나리. 저 같은 것이 감히 언감생심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이 잘못이지요.”
“아니, 아니야!”
자격지심에 빠지려는 율에게 황급히 말한 상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도 율이 싫지는 않아. 동생처럼 생각하는 것도 있지만 여자로서도···꽤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어. 그러니 나한테 시간을 좀 더 줬으면 해.”
“나리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어요. 전 언제까지고 나리의 대답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제 마음은 걱정 말고 천천히 생각하시어요.”
“고맙다.”
율은 상호를 향해 밝은 미소를 한 번 보이고는 곧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한 것을 보며 상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끄응, 괜히 점잔 뺀다고 일생일대의 실수를 한 게 아닌지 모르겠네.’
조선에 온 뒤로 남자로서의 욕망을 한 번도 푼 적이 없기에 상호의 뒤늦은 후회는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마지막으로 기다리고 있을 노유명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상호의 걸음은 어느 때보다 망설임이 가득해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아니오.”
우두커니 공터에 서 있었던 노유명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며 상호는 말했다.
“지금 자네를 부른 것은 실력을 보고 싶어서다.”
“그렇소?”
“그 전에 하나만 묻지. 자네는 왜 내 밑으로 들어와 싸우지?”
상호는 진지하게 질문했다.
범죄 집단인 검계 출신이라는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터라 노유명에게 기회를 주는 것을 망설였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는 없는 일이기에 이렇게 단 둘이 있을 때 노유명의 진솔한 속마음을 알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한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 노유명이 대답했다.
“나랏님이나 이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외다. 그저 이 전쟁 때문에 원치 않게 고아가 되어 나처럼 불행한 삶을 사는 아이들이 늘지 않게끔 하기 위해 검을 들고 싸우기로 결심한 것뿐이오.”
“남을 위해 싸운다는 건가?”
“나 같은 게 그러는 게 의외라 생각하오?”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금전을 위해서나 또는 공을 세워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상호가 더 잘 알았다.
실제로 그가 직업으로 삼았던 헌터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기보단 돈을 벌기 위해 생겨난 직업이기 때문이다.
‘내가 편견을 가졌던 것일까.’
겉보기엔 무뚝뚝할 뿐이지 속마음은 따뜻한 남자였던 것을 몰라 본 것은 배경이 안 좋아서 그것만 보고 평가를 내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상호는 자신의 그러한 잘못을 속으로 반성하며 이내 자세를 고쳤다.
“그럼 한 번 검을 겨뤄보지.”
“좋소.”
노유명은 장검과 함께 다른 손에 길이가 짧은 단도를 들었다.
먼저 선공을 취한 것은 상호였다.
쉬릭!
두 차례나 연거푸 싸워 지친 상태였지만 여전히 상호의 움직임은 보통 사람보다 빨랐다.
하물며 그의 검은 찰나에 노유명을 향하였다.
하지만 검은 허공만 갈랐다.
‘간파한 건가.’
미리 공격이 올 곳을 몰랐다면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호는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옆으로 돌아 움직이는 노유명의 기척을 읽고 뻗었던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어라?”
이번에도 검은 허공을 가를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게 노유명은 지면에 옆으로 엎드린 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태에서 노유명은 단도로 상호의 발등 위를 노렸다.
“우악!”
황급히 발을 빼는 상호를 쫓아 노유명이 몸을 일으키면서 재차 검을 휘둘러왔다.
상호는 가까스로 그것을 피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 때, 노유명은 몸을 날리며 찌르기를 펼쳤다.
“큭!”
피할 수가 없었기에 상호는 맨 손으로 검을 붙잡아야만 했다.
손바닥에서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검을 버리다니.’
공격이 실패하자마자 노유명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검을 버리고 좌우로 몸을 흔들더니 한순간 옆으로 움직였다.
겨우 1단계 ‘민첩’ 능력을 올린 능력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철저하게 이쪽의 허를 찌르는데 집중하는 노유명의 방식은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아무리 내가 그에게 맞춰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다지만 이 정도까지 몰릴 줄이야.’
상호가 이렇게 생각할 때, 단도가 곧 어둠 속에서 불쑥 날아들었다.
빠르고 소리 없이 날아드는 이 공격은 그야말로 암살자의 암습과도 같았다.
그렇지만 상호는 그것을 간단히 피하고 그쪽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크흑!”
노유명은 발로 지면을 끌며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넘어질 듯 했지만 용케 자세를 다잡는 그를 향해 상호가 달려가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이에 대응하여 노유명도 단도로 맞섰다.
카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과 부딪친 단도가 위로 쳐올려져 멀리로 떨어져 박혔다.
그리고 곧 상호의 검이 노유명의 목 가까이에 다가갔다.
노유명은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의 패배를 인정하겠소.”
“후우, 좋은 대련이었다.”
상호는 긴 숨을 내뱉으며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갓 능력자가 된 노유명을 상대로 이긴 것이니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서 두 번 다 승부를 내지 못했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아 기뻤던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목적한 바는 달성하게 되었다.
‘세 사람 다 충분히 소질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아직 확정할 수는 없었다.
오늘 살핀 실력과는 별개로 저마다 한 가지씩 걸림돌이 있기 때문이다.
‘임 무관의 경우엔 유사시 토벌대를 이끄는 부대장의 역할을 맡겨야 하고 율은 아무래도 여성이라는 게 걸려. 그리고 노유명은 아직 성장이 충분하지 않다.’
그만큼 한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노유명이 말했다.
“그런데 나리.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소?”
“나한테 말인가?”
“그렇소.”
자신에게 질문이 있다는 말에 살짝 눈을 크게 뜬 상호는 이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유명은 다시 말했다.
“아까 나한테 했던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 묻겠소. 어째서 당신은 목숨을 걸고 이 싸움을 하는 것이오?”
“······.”
설마 자신이 한 질문이 되돌아올 줄 몰랐던 상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유야 있었다.
다시 원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다.
율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도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였다.
그를 위해 지금까지 이 조선 땅에서 함께 싸울 사람들을 모으고자 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선뜻 대답을 못한 것일까.
‘그저 그런 막연한 희망 하나만 갖고 지금 나는 싸우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뭔가가 분명 있었다.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상호 본인도 아직 깨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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