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四장. 적과의 제휴. (3)
다리만 해도 사람 키보다 크고 길이만 20여 미터에 달하는 중생대의 공룡과도 다름없는 덩치에 모든 것을 태우는 불까지 뿜어내는데 가죽에 튕겨나갈 뿐인 조총이나 창으로 무장한 왜병들을 상대로 자이언트 리자드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
이런 놈을 상대로 울며 겨자 먹기로 싸워야만 했던 왜군은 이제 두 자리 숫자가 될 만큼 피해가 막심했다.
그런 그들을 구원한 것은 바로 방금까지의 적이었던 조선 의병들이었다.
상호를 필두로 한 의병들은 용감하게 자이언트 리자드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
“절대 뭉쳐 있지 말고 분산해서 내가 알려준 그곳을 노려라.”
“네!”
상호의 말에 대답하며 의병들은 죽은 왜병들이 흘린 장창을 잡은 다음, 자이언트 리자드의 몸 아래로 위험하게 진입했다.
그렇게 밑으로 들어간 의병들은 숨 쉴 때마다 들썩거리는 뱃가죽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다른 부위에 비해 두께가 얇은 뱃가죽은 방어력이 약하였기에 창날이 어느 정도 들어갔다.
이에 자이언트 리자드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구부려 몸을 지면에 바짝 붙였다.
“흐미!”
“어서 빠져나가!”
깔리기 직전에 의병들은 분분히 사방으로 탈출하였다.
몸을 낮추게 되면서 움직임을 멈춘 자이언트 리자드.
이때를 기회 삼아 율이 전력으로 질주해 꼬리 부분부터 자이언트 리자드 몸 위로 달렸다.
널찍한 등판 위에 선 율은 균형을 잡으면서 검을 머리 위까지 높게 들었다.
우웅.
검신이 떨리기 시작하고 포스의 기운이 검에 한가득 담기기 시작했다.
“이야압!”
검이 견딜 수 있을 때까지 포스를 담아낸 율은 기합과 함께 등판에 칼날을 깊숙이 찔렀다.
검의 손잡이만 남을 정도로 깊게 칼날이 박히고 이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니 상처가 크게 벌어져 뼈까지 드러났다.
“카아아앗!”
지금껏 입은 상처 중 제일 큰 상처를 입은 자이언트 리자드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놈의 격렬한 움직임에 인근 지형이 바뀔 정도였으니 그 위에 타고 있던 율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꺅!”
“걱정 마, 내가 받아줄게!”
위험하게 머리부터 떨어지는 율을 향해 외치며 상호가 전력질주로 달려왔다.
다행히 늦지 않고 떨어지는 것을 중간에 받아내는데 성공하였고 몇 미터를 더 이동한 끝에 멈출 수 있었다.
“아, 나리······.”
“무사해서 다행이다.”
상호를 올려다본 율은 곧 자신이 지금 괴물의 피로 피범벅이 된 상태임을 깨닫고 황급히 상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송구합니다.”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 그것보다 잘 해주었어.”
“나리.”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조심하는 것 잊지 마.”
상호는 지난 묘향산의 일을 상기시키며 이와 같이 걱정했다.
그러한 상호의 마음을 느낀 율은 결연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네.”
“그래. 나는 저 작자들이 제대로 안 싸우려하는 것 같으니 가서 엉덩이를 차 싸울 마음이 들도록 만들러 갔다 올게.”
“저도 같이 가겠어요.”
“아니 그 일이 나 혼자면 충분하니 율은 임 무관을 도와 자이언트 리자드의 움직임을 막아줘.”
“···알겠어요.”
살짝 아쉬움이 묻어 나오는 대답을 하며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는 다른 일반 의병들에게 공격이 가지 않게 하면서 자이언트 리자드 발을 묶는 중인 임충을 돕기 위해 방금 잃은 검 대신 주변에 떨어진 무기를 들고 움직였다.
상호 역시 율이 움직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대범하게도 격전이 치러지는 전장 한복판을 가로질러 단숨에 왜군들이 있는 곳까지 갔다.
접근하는 그를 향해 다행히 총격은 없었다. 아마도 휴전 내용이 일반 병졸에게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왜군들 앞에 당도한 상호는 잠시 멈춰 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과연 언어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아르모스의 능력이 통할까?’
성공 가능성이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상호는 심호흡을 한 다음 왜병들의 귀에 똑똑히 들리게끔 외쳤다.
= 조총병은 눈앞의 괴물로부터 사람들을 엄호하고 나머지는 눈과 배 아래를 집중 공격해라.
상호의 목소리가 널리 퍼지자 수십여 명의 왜병들은 잠시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 직후에 왜병들 전체가 상호가 말한 대로 움직였다.
처처척!
조총을 든 왜병들은 마치 한 몸이 된 것 마냥 동시에 화약과 탄환을 장전한 조총을 들어서 의병들에게 정신이 팔린 자이언트 리자드를 향해한 일제 사격을 가했다.
총격을 받은 자이언트 리자드는 사격을 피해 몸을 옆으로 크게 젖혔다.
이때, 창을 든 보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창을 앞세워 돌격해 옆구리와 머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수십 명의 왜병들이 개미 떼처럼 달려드니 자이언트 리자드도 자신의 몸을 지키기 급급했다.
한 편, 상호의 말이 갖는 영향력에 들어가지 않은 무사들은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 당황해했다.
“갑자기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건가. 저 괴물이 죄다 달려가서 싸우다니······.”
“이잇! 아직 명령도 안 내렸는데 멋대로 싸우다니. 어서 돌아오지 못할까!”
무사들이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병졸들을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러한 것을 상호는 무사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외쳤다.
= 너희들도 병사들을 도와서 괴물을 쓰러뜨려라.
“······!”
상호의 목소리를 들은 무사들은 태도를 급변하여 왜도를 뽑아들고 싸움에 가세했다.
“카아앗!”
자잘한 상처를 입으며 자이언트 리자드는 수세에 몰렸다.
그 때문일까. 놈의 움직임은 더욱 거칠어졌고 주변에서 싸우는 병사들이 놈의 몸뚱이에 채여 쓰러져갔다.
왜군 병력을 말 한 마디로 싸움에 이끌었지만 이것만으론 자이언트 리자드를 쓰러뜨릴 수 없었다.
상호는 이 명령의 힘을 보다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골똘히 생각했다.
‘제대로 명령을 내리려면 좀 더 전장을 파악하고 병력을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전장을 파악하는 것이라면 ‘매의 눈’ 능력을 쓰면 된다. 문제는 지금 싸우는 병력을 운용하는 방식이었다.
이 순간, 문득 현대에 있을 때에 했던 전략 게임이 떠올랐다.
‘프로게이머들은 많은 유닛을 여러 개의 소부대로 나눠 개별적으로 작전을 수행케 해 적을 상대하였었지.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컴퓨터 화면 속 유닛을 단축키로 조종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러나 방법은 있을 것 같았다.
‘아까 목소리가 전파되었을 때, 병사들만 따랐고 무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이유가 바로 해결의 실마리다.’
상호는 아까 말을 전할 때의 자신을 떠올려보았다.
그 때 인식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조총을 든 조총병과 일반 병사였던 것 같다.
따로 무사들까지 인식하지 않았던 게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상호는 지금 싸우고 있는 의병과 왜병들을 자세히 관찰한 다음 앞으로 내릴 명령에 맞게 인원을 나눠 인식했다.
임의의 코드 네임까지 붙여 인식을 편하게 한 다음에 명령을 위한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 건너 조는 두 눈을 향해 집중 사격하라. 그리고 실드 조는 건너 조를 엄호하도록.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건너’와 ‘실드’라는 소부대로 상호에게 인식되었던 왜병과 의병들은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행동했다.
‘건너’에 속한 조총병들이 장전을 하는 사이에 ‘실드’에 속한 창을 든 왜병과 의병들은 삼열로 쭉 조총병들 앞에 서서는 창을 줄마다 드는 각도를 달리 해서 세웠다.
이런 이들을 보고 자이언트 리자드가 뭉쳐 있는 그들을 공격하고자 했다.
쉬리리릭!
위협의 행위로 혓바닥을 내보이며 크게 움직이는 자이언트 리자드.
“절대로 돌파하게 두지 않는다.”
“오오!”
상호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실드’의 병사들은 창을 들고 자리를 지켰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자이언트 리자드가 당황해서 공격을 주저했다.
“사격 준비 완료.”
“눈을 노려라.”
조총병들은 일제히 머리를 향해 조준했다.
타타탕!
머리, 정확히 양쪽의 눈을 향해 수십 발의 탄환이 쇄도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노려졌지만 한 번도 공격받은 적이 없던 자이언트 리자드의 오른쪽 눈에 처음으로 탄환 한 발이 정확히 적중하였다.
“캬아아앗!”
비명을 토하는 자이언트 리자드를 보며 상호는 재차 멀리를 보며 외쳤다.
= 지금이다! 불랑기포를 쏴라!
언제든 발사를 할 수 있게 준비를 하도록 지시를 했기에 무기를 담당한 조인환과 떡쇠는 상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방포하였다.
쾅!
발사된 탄환은 차원석 탄환이 아니라 일반적인 탄환이었다.
이 탄환은 자이언트 리자드의 턱에 적중했고 그 충격에 놈은 벌러덩 뒤집어졌다.
이것을 본 상호는 과감하게 명령을 내렸다.
= 소드 조는 모두 놈의 몸에 올라타 일어나지 못하게 막으면서 공격해라.
이러한 명령에 왜군 무사들과 함께 율과 임충이 뒤집어 쓰러진 자이언트 리자드의 몸 위에 올라탔다.
푹. 푹.
약해진 뱃가죽을 뚫고 창칼이 들어갔다.
= 소드 조는 이탈! 건너는 다시 한 번 일제 사격으로 배를 노린다!
몸을 일으키려는 자이언트 리자드의 움직임을 파악한 상호가 지시를 하자 배 위에 있던 인원들 모두 재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져 탈출했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뒤집히려는 자이언트 리자드의 배를 향해 다시 한 번 일제사격이 가해지고 총격이 있을 때마다 상처에서 피가 뿜어졌다.
“우리가 왜?”
“어째서 내가······.”
물러났던 무사들은 잠시 자신들이 방금 왜 싸웠는지 영문을 몰라 혼란에 빠졌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앗! 놈이 도망친다!”
누군가의 외침처럼 자이언트 리자드는 더 이상 싸울 뜻을 접고 늪지의 깊숙한 물속으로 도망치려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상호는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도망가게 둘 수는 없지!”
놈을 끝장내기 위해 상호는 불랑기포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가서 두 사람이 겨우 드는 불랑기포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다시 뛰었다.
“이야압!”
“에잇!”
물가로 가는 자이언트 리자드를 막고 처치하기 위해 수십 명이 매달려 무기를 닥치는 대로 휘두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이언트 리자드는 물로 뛰어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후!”
상호는 점차 물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자이언트 리자드의 등을 보며 차원석 탄환에 힘을 부여했다.
아까보다 더 힘을 부여해 폭발 임계까지의 시간을 단축하고 바로 장전을 하였다.
철컥.
자포와 모포를 결합하고 상호는 두 손으로 불랑기포를 들어 각도를 맞췄다.
“이걸로 끝이다.”
말과 함께 심지가 완전히 타들고 차원석 탄환이 발사되었다.
쉬유유웅.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차원석 탄환이 반쯤 물 위로 드러난 자이언트 리자드의 위로 향했다.
잠시 뒤, 굉음과 함께 수면 한가운데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크읏!”
불어오는 후폭풍에 상호를 비롯한 사람들은 정면에서 몸을 돌리고 바람을 견뎌야만 했다. 직후 폭발의 충격으로 일어난 파도가 몸의 절반을 뒤덮었다.
이러한 대폭발에서 자이언트 리자드가 살아남을 확률은 희박했다.
“······.”
“해치운 건가?”
폭풍과 파도에 쓰러졌다가 일어난 이들은 파문이 일어나는 수면을 보았다.
곧 수면은 붉게 물들어갔고 죽은 자이언트 리자드의 시체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이들은 순간 차오르는 기쁨을 참지 못했다.
“와아아아!”
“해치웠다!”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괴물과 싸워 살아남았다는 기쁨에 다들 환호했다.
이 순간만큼은 왜병도 의병도 모두 다 한 마음이었고 잠시나마 서로에 대한 적대심을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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