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장. 요괴 토포사. (2)
상호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루 정도 늦어지긴 했지만 일행은 본래 계획대로 광해군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이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광해군은 그곳에 없었다.
안전한 곳에만 있지 않고 왜군과 싸우는 병사들을 위무하고자 경기도 쪽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상호 일행도 서둘러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와아아아!”
“공격하라!”
격렬하게 싸우는 조선군과 왜군.
경기도 지방과 강원도 지방의 경계에 해당되는 위치의 고을 하나가 전장이 되어 있었다.
조총병을 앞세워 공격해오는 왜군들을 맞아 조선군은 지대가 높은 곳에 진지를 세우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대부분이 관군인 조선군은 조금만 승기가 없다 싶으면 패주하기 급급했던 이전의 모습 대신 투지를 불사르며 왜군이 더 오지 못하게 막아냈다.
“왜적을 몰아내자!”
“우오오!”
이렇게 조선군 모두가 기세가 높은 것은 한 사람 덕분이었다.
조선국을 상징하는 깃발이 높게 자리한 그곳엔 말에 올라탄 광해군이 있었다.
직접 전장의 병사들의 독려하기 위해 세자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왕족 중 유일하게 직접 전장에 나온 광해군은 아직 약관의 나이도 되지 않았음에도 의연함을 유지하며 자리를 지켰다.
단순히 그러는 것만으로도 조선군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크윽! 후퇴하라!”
결국 왜군 측 지휘관은 피해를 감수하지 못하고 철수를 명령했다.
왜군이 물러나고 병사들은 두 팔을 높게 들어 보이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모두가 전장에 친히 나온 세자 광해군을 찬양하는 목소리뿐이었다.
그런데 정작 광해군의 얼굴은 기뻐하면서도 어딘가 살짝 굳어 있었다.
군영으로 돌아가는 길.
말을 타고 천천히 이동하면서 광해군은 말했다.
“병사들의 환대를 진심으로 기뻐할 수 없다니. 참으로 가슴이 아프구나.”
“세자 저하.”
광해군을 곁에서 호위하는 내금위의 군관은 짐짓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토록 광해군이 우울해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며 한강 이남의 지역에 잔존한 조선군의 통솔에 힘쓰는 한 편, 조선 각지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와 만주, 중원까지 사람을 보내 몬스터들의 발생 상황을 파악했다.
여기에 의주에 있는 부친이자 이 조선국의 국왕인 선조에게 몬스터 출현의 위협성과 그것들을 토벌해야 할 것을 주청했다.
하나, 돌아온 결과는 선조의 꾸짖음이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삿된 정보나 믿어 나라의 전력을 쪼개려 한다고 힐책하고 더 나아가 제대로 왜군과 전쟁할 마음이 있는지 의심하는 내용을 서신으로 보냈다.
이것을 받아본 광해군이 울적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최근 광해군이 민심을 크게 얻는 것에 대해 명백한 불쾌감을 드러내기까지 해 광해군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저하!”
“음, 자네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 돌아온 광해군은 군영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상호를 보고 놀람과 반가움이 반반씩 섞인 눈빛을 취했다.
상호 옆에 있던 임충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광해군에게 이렇게 말을 전했다.
“세자 저하, 소인 임충 내려주신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나이다.”
“고생 많았네. 이렇게 두 사람 다 몸 성히 돌아온 것을 보니 기쁘군.”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자자, 일단 들어가서 자세한 얘기를 나누세.”
“예.”
자리에 낄 수 없어 미리 빠진 율을 제외하고 상호와 임충은 광해군이 머무는 막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거의 두 달 만에 다시 만난 광해군을 보며 상호는 그간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은 광해군은 이렇게 말했다.
“요괴 토벌도 순조롭게 하고 왜군은 무찌르는데 일조하다니. 두 사람 다 큰 공을 세웠구나.”
“하하, 과찬의 말씀입니다.”
“헌데 저하, 제가 부탁했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아직 외국의 상황을 전해 받지 못했지만 각 지방으로 보낸 이들에게선 인편을 통해 장계를 받았네.”
광해군은 자신이 직접 살핀 팔도의 요괴 출현 동향에 대한 보고서를 상호에게 건네주었다.
“으음.”
한자를 전혀 모르는 상호는 빼곡하게 적힌 글자를 보며 난감해했다.
그런 그를 대신해 임충이 대신 내용을 읽고 설명해주었다.
“각 지방마다 요괴들의 출현 건수와 둥지가 있다고 의심되는 곳들에 대해 적혀 있습니다.”
우선 몬스터가 제일 목격된 지역을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지역이었다.
한반도의 등줄기라 할 수 있는 태백산맥이 길게 가로지르고 있기에 그만큼 다수의 몬스터 게이트가 나타난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또 장계에 따르면 각 지방의 상황과 반응도 처음과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피해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으로 처음엔 외진 곳에 위치한 작은 고을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최근엔 현감이 있는 현까지 공격받아 해당 지역의 주민이 대피하는 일까지 벌어지기까지 했다.
또한, 조선군과 왜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에서도 몬스터 습격이 발생해 양측이 충돌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장계엔 적혀 있었다.
게이트 출현 이후로 시간이 꽤 흐른 까닭에 거의 대부분의 백성들은 요괴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로인해 최근 후군에 속하는 왜군들이 북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보급로와 점령지를 지키는데 애를 먹고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왜군도 이제는 요괴의 존재를 완전히 인식하고 있겠군요.”
왜군의 움직임이 변한 데에는 점령지에서 왜군의 보급로와 점령지를 공격하는 의병들의 활약도 컸지만 분명 몬스터들의 움직임 또한 큰 영향을 준 것은 확실했다.
왜군은 이제 조선군뿐만이 아니라 몬스터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겪을 터였다.
“우리 쪽은 어떻습니까? 제가 알려드린 내용을 각지의 조선군에게 알려 대책을 마련했다면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었을 텐데요?”
“권율 대감이나 진주 판관 김시민, 전라좌수사 이순신 같은 이들은 신중하게 왜군의 동향을 살피며 요괴들로부터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손을 쓰고 있다고 들었네.”
“그러하군요.”
앞서 직접 만났던 권율이나 이순신뿐만 아니라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진주 대첩이라는 임진왜란 3대 대첩을 이끈 장수인 김시민까지 몬스터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을 전하는 광해군의 안색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을 눈치챈 상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하, 뭔가 저희에게 할 얘기가 있는 것입니까?”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지만 아바마마와 조정에서는 아직 요괴들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네.”
“······.”
선조의 얘기에 상호는 입을 쉽사리 열지 못했다.
역사를 아는 상호는 선조와 광해군의 사이가 어땠는지를 드라마나 책을 통해 알고 있어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전쟁 이후로 부쩍 의심이 많아진 선조로선 직접 보지 못한 몬스터의 존재를 쉽게 인정하지 못할 테지.’
그런 점을 생각하면 선조나 의주에 있다는 조정의 협력을 받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분명했다.
그저 훼방만 놓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광해군이 들려준 얘기는 그런 기대를 접게 만들었다.
“아바마마께서는 명국의 지원군이 도착하는 즉시, 다시 한 번 평양성을 탈환하고자 하시네. 그런 이유로 한강 이북에 있는 병력들을 모두 안주에 집결하고 있으며 또한 다른 지방의 병력도 평양성에 있는 왜군의 방어를 약화시키기 위해 각지의 왜군을 공격하라는 어명을 받았다네.”
“이것 참.”
평양성을 점령하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을 상대하기 위해 군을 모으고 한 편으로 다른 왜군을 제지하는 것은 군사적으론 지극히 옳은 판단이었다.
다만 각지에서 점차적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는 몬스터 세력을 빼놓고 이러한 전략을 수립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관군의 도움은 어차피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니 나로선 크게 상관없지만······.’
관군이 왜군과의 전쟁에 치중된다면 자연스레 후방 쪽 군이 없는 지역에 있는 주민들이 위태로워질 터였다.
그나마 상호가 지금까지 활동을 통해 정문부나 고인후 같은 의병장들을 만나 그들을 몬스터 토벌에 나서게끔 한 덕에 그들이 활동하는 지역은 관군이 없다고 해도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그들 의병장들의 손에 뻗지 못하는 다른 지역들이었다.
이러한 지역에 사는 백성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아직 포섭하지 못한 의병장들을 만나 그들로 하여금 몬스터를 막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저희도 서둘러야겠군요.”
“그래준다면 나로썬 고마울 따름이네.”
상호가 지금까지 낸 성과를 알기에 광해군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또 이렇게도 말했다.
“미안하구나. 나라의 국본이 되는 자로서 백성들을 지키는 일을 그대에게만 떠넘기게 되어서 말이다.”
“아닙니다, 저하.”
상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광해군은 상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 도움이 되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실제로도 이번에 얻은 정보는 처음 이천을 떠나올 때에 얻었던 정보보다 더 세밀하여 차후 계획을 짜는데 큰 도움이 될 수준이었다.
광해군은 상호를 보다가 뭔가 결심한 듯 말했다.
“여태까지 쌓은 공과 그리고 앞으로 더 큰 역할을 해줄 그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구나.”
“그런 말씀 안 하셔도 세자 저하의 마음은 충분히 제게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반쯤은 진심을 담아 상호는 광해군에게 좋게 말하였다.
그러한 대답에 광해군은 흡족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새하얀 종이에 붓으로 글자를 정성스럽게 써내려갔다. 그리고 말미에는 분조를 이끌게 되면서 직접 선조로부터 받은 직인을 꾹 눌러 종이에 새겼다.
“저하?”
“지난번엔 자네에게 정 9품의 효력부위의 관직을 임시로 내렸었지. 하나,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하는 자네에겐 보다 걸맞은 관직과 위치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네.”
광해군의 말에 상호는 속으로 크게 동요했다.
보다 높은 관직과 권한을 주겠다는 제안 자체는 분명 솔깃해할 만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광해군은 어디까지나 세자일 뿐이지 국왕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괜히 받았다가 탈나는 것 아냐?’
안 그래도 방금 전에 국왕인 선조와 광해군이 불편한 관계인 것을 알게 된 터였다.
선조의 재가도 아니 받고 내리는 관직을 후에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이 컸다.
하여 상호는 궁리 끝에 이렇게 말했다.
“세자 저하의 제안을 참으로 기쁘지만 행여 저로 인해 정치적으로 곤혹스런 일을 세자 저하께서 당하실까 우려되니 부디 청을 거둬주십시오.”
“나를 걱정해주는 것인가.”
“······.”
“자네의 뜻은 알겠다. 하지만 본인은 조선국 국왕인 아바마마의 대리로서 분조를 이끄는 자이다. 예조의 권한을 일부 끌어다 써도 큰 문제를 없을 것이다.”
상호의 속내를 알아주지 못하고 광해군은 뜻을 꺾지 않았다.
아무리 분조를 이끈다고 해도 광해군에게 주어진 권한은 왜군과의 전쟁에 대한 부분 만이었다.
선조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예조의 교첩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게 후일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을 상호도 광해군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무리를 해서라도 상호에게 걸맞은 자리를 주고자 결심했다.
이것을 아는 상호는 광해군이 내리는 관직과 지위를 받아들였다.
“그대를 정 5품 과의교위(果毅校尉)에 임명하고 요괴 토포사로서 각지의 의병들을 통솔한 권한과 군의 물자를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내리겠노라.”
“헉!”
상호는 광해군이 내린 관직과 지위에 깜짝 놀랐다.
품계가 무려 12단계나 뛰어올라 내금위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우익위(右翊衛)를 겸임하고 있는 임충과 동등한 품계가 되었다.
하지만 진짜로 놀랄 것은 뒤에 언급된 요괴 토포사였다.
토포사(討捕使)는 일반적인 관직이 아니라 도적을 토벌하기 위해 수령들에게 부여하는 일종의 특수 관직이었다.
광해군은 상호에게 도적이 아닌 오직 요괴, 즉 몬스터를 토벌하는 토포사로 임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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