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장. 요괴 토포사. (1)
마지막 와이번 토벌을 끝내고 상호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손에 꽤 큰 부상을 입은 상호는 사명대사의 ‘힐링’ 스킬을 통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곳의 일이 정리되었으니 우리 승병들은 관군을 돕기 위해 향할 것이오.”
“평양으로 가시는 겁니까?”
“조정에서 내려온 지시에 따른다면 그리 될 것 같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따르는 2천여 명의 승병들은 의주에 있는 조정에서 내린 지시에 따라 이미 실패한 바 있는 평양성 공략에 재도전하는 조선군에 합류하기로 했다.
본래 역사에서도 이들이 4차 평양성 전투에 참가해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을 격퇴하고 평양성을 수복하기에 이들의 출진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물론 이 지방의 요괴 토벌은 손 놓지 않을 생각이네. 우선 집결지로 가는 동안에 확인되는 피해 지역을 돕고 요괴 토벌을 해나갈 생각이네. 그리고 우리와 뜻을 함께 하는 여러 사찰에도 연통을 넣어 요괴들의 둥지를 파악하고 그들을 막을 수 있도록 힘을 쏟아달라고 요청할 것이네.”
“대사의 뜻대로 하시지요.”
이미 평안도 지방의 토벌은 사명대사에게 일임하였다. 그랬기에 상호는 사명대사의 뜻을 존중했다.
사명대사 덕에 회복도 금방 할 수 있었지만 상호는 굳이 하루를 사찰에서 더 묵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부르는 게 곧 값인 황금색 코어를 이렇게 갖게 되다니.”
상호는 자신의 손에 들린 황금색 광채를 뿜어내는 몬스터 코어를 보며 히죽 웃었다.
<황금색 코어>는 그 희귀성만큼이나 특별하다.
다른 코어가 능력치를 강화시켜주거나 스킬을 획득하게 해준다면 이 코어는 사람을 ‘각성’하게 해준다.
워낙 얻은 자들이 적어 그 ‘각성’이라는 게 뭔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적어도 이것을 얻은 자들 모두 헌터로서 이름을 날렸다.
“이것만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는 없지.”
그렇지 않아도 빠르게 성장하는 율이나 임충을 곁에 두고 추월당할까 못내 걱정하던 차에 이것은 둘도 없는 기회였다.
다만 소문으로 듣던 각성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에 우려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일정까지도 하루 늦춘 터였다.
“꿀꺽.”
코어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 평소와 다르게 많이 떨린다.
그렇지만 상호는 코어를 자신의 이마에 가져대고 의식을 집중했다.
파아앗!
순간 머릿속으로 엄청난 기운이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이것은?!’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는 가운데, 상호는 낯선 어떤 남자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보게 되었다.
남자는 마른 체구에 둥근 모자에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품에 한 아름 두루마리를 안고선 앞을 보며 처음 듣는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금속 갑옷을 입은 수백, 수천의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이들이 상대하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들이었다.
제 3자로서 이 광경을 보는 상호한테는 명백히 인간 측이 불리하게 보였다.
그런데 결과의 뜻밖에도 인간 군대의 승리였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군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움직였다.
하나로 응집해 몬스터들의 돌격을 굳건히 버텨내고 때론 여러 가지 소집단으로 분산하여 고래 무리를 사냥하는 범고래처럼 몬스터 집단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적을 분열시켰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병사라도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적을 두고 철저하게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 것은 맨 처음 상호가 본 남자의 지휘 능력 덕분이었다.
‘단순한 강력한 힘으로 적을 물리치는 게 아니라 몇 천의 수하를 수족처럼 다루며 전장을 지배하는 존재.’
왠지 모르지만 나는 남자의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커맨더 Commander.
군대나 집단을 적절하게 지휘하여 적을 무찌르는 형태의 영웅.
바로 눈앞의 남자는 그러한 영웅이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보이던 풍경이 사라지고 어둠뿐인 공간이 나타났다.
그 공간에 자리한 상호의 앞으로 아까 봤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곧 상호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이름은 아르모스. 그대가 본 것은 생전에 내가 치렀던 전투 중의 하나이네.
“아르모스?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몬스터 코어에서 느닷없이 사람의 정신(?)이라고 의심되는 게 나타나니 상호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를 향해 아르모스가 다시 말했다.
-지금 멸망해 사라진 망국의 군사였었지. 총 56회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으나 결국 무자비한 마족의 손에 나라를 뺏기고 결국 나 또한 그들에게 살해당했네.
“잠, 잠깐. 그 말인 즉 당신은 다른 세계의 인간이란 말인가?
이제껏 게이트를 통해 몬스터만 넘어왔기에 저쪽에 지성을 가진 우호적 존재, 특히 인류는 없다고 알려진 터였다.
이러한 자신의 상식이 틀렸다는 것에 상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황금색 코어를 취한 이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
불확실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상호는 이어질 아르모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비록 목숨을 잃었지만 추악한 마족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네. 하여 다른 영웅들처럼 날 죽인 마족의 일부가 되기로 했네.
“그럴 수가.”
-그렇게 함으로써 언젠가 마족을 처단한 인물에게 내 기억과 능력을 전수하기로 한 것이네.
참으로 놀라운 얘기였다.
<황금색 코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저쪽 세계에서 활약했던 영웅들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앞서 황금색 코어를 취했던 자들이 ‘각성’이 어떠한 것인지 안 상호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부디 나의 영혼을 받아들여 날 대신해 마족에게 복수해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딱히 못할 약조도 아니기에 상호는 흔쾌히 대답했다.
이러한 답을 들은 아르모스는 만족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빛이 되었다.
곧 그 빛은 상호를 향해 다가왔다.
“우아아앗!”
갑자기 빛을 받아들이게 된 상호는 소리를 질렀다.
바로 이때, 까마득하게 멀리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리! 나리!”
“헉!”
걱정을 한가득 갖고 상호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던 율은 상호가 기함하며 눈을 뜨는 것을 보고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상호는 바로 상체를 일으키고는 가슴 속에서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의 소리를 몸으로 느꼈다. 그러면서 크게 확장된 동공으로 주변을 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야심한 밤이었는데 지금 창호지 문 너머는 밝았다.
대체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던 상호는 불현듯 머리에서 느껴지는 두통에 신음을 흘렸다.
“나리, 괜찮으시어요?”
“난 괜찮아.”
“대사님이라도 불러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그보다 찬 물 좀 주겠어.”
상호의 말에 율은 미리 떠둔 찬 물을 담은 그릇이 건네주었다.
그것을 단번에 들이킨 후에 상호는 비로소 정신을 바로 차릴 수 있었다.
“후, 이제야 좀 낫네. 그나저나 율은 언제 내 방에 온 거야?”
“약 두 식경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셨는지 와서 그대로 쓰러져있던 것을 발견했어요.”
율은 이부자리도 펴지 않고 쓰러진 상호를 보고 황급히 그의 상태를 살폈다.
의식만 없을 뿐, 맥박이나 호흡 모두 정상이었기에 일단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고 지금까지 곁에서 간호를 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상호는 고마움을 담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경 써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그리고 나리가 제게 들려줬던 말, 여러모로 생각해보았어요.”
“그런가.”
“저 같은 미천한 것의 목숨 같은 것을 신경 써주는 나리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앞으로는 결코 이 목숨을 함부로 하지 않겠어요.”
“그래, 잘 생각했어.”
“하오니 나리, 제 청도 한 가지 들어주세요.”
“청?”
갑작스런 말에 나는 율을 뚫어져라 잠시 보았다.
그런 상호를 향해 율이 간곡하게 말했다.
“나리께서도 부디 목숨을 소중히 여겨주시고 위험한 일에 함부로 뛰어들지 말아주세요.”
“나를 걱정해주는 것이야?”
상호에게 있어 율이 해준 말은 생소할 따름이었다.
현대에 있을 때에도 누구 한 명 그를 신경써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율은 계속 말했다.
“나리는 막중한 사명을 갖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신 만큼 더욱 자신을 소중히 해줬으면 해요.”
“···그래, 알았어.”
자신이 이토록 걱정해주는 율이 기특하였다.
하여 상호는 율의 정수리 쪽에 손을 얹고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율이었다면 남정네 손길이 자신의 머리에 닿는 것을 흠칫 경계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호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다만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고개만 살짝 숙일 뿐이었다.
“그럼 전 임 무관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부탁할게.”
둘 만의 오붓한 짧은 시간을 보내고 상호는 율에게 임충에게 떠나는 시간을 한 시진만 늦추겠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율이 나가고 상호는 곧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모스의 영혼은 완전히 내 속으로 흡수된 것일까.”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빛이 된 아르모스의 영혼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설마 몬스터 코어에 다른 세계에 살던 인간의 영혼이 깃들어 있을 줄이야.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놀라움이 컸지만 그것보다는 아르모스의 영혼을 받아들임으로써 어떠한 능력이 생겼는지 그것부터 알고 싶었다.
사실 능력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스킬처럼 본능적으로 그 힘을 쓰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얻은 능력은 그냥 혼자서는 쓸 수가 없는 힘이었다.
끼익.
문을 열고 상호는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승병들이 매일같이 훈련하는 마당이었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전장을 가는 마당에도 승병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훈련에 열을 쏟고 있었다.
“좋아.”
대열을 갖추고 훈련 중인 수백 명의 승병들을 보며 상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입을 떼었다.
= 멈춰라.
평상시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뭐랄까 기백이 담긴 느낌이 목소리가 상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순간, 놀랍게도 연무장에 있던 수백 명의 승병 모두가 정확히 동일한 자세로 정지했다.
“헛?”
목봉을 앞으로 찌르는 동작으로 멈춘 승병들의 모습에 막 입을 닫았던 상호는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모두가 조종된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언령.
대규모의 인간을 말로서 통솔할 수 있는 이 능력은 어떤 의미에선 ‘커맨더’로서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능력이었다.
= 각각 좌우로 절반씩 나눠져서 서로를 봐라.
이러한 ‘언령’에 승병들은 그대로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기어스와 같은 능력인가.”
인간이나 생물을 조종하는 스킬인 ‘기어스’와 얼핏 보면 비슷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게 있었다.
“핫!”
투지를 기합으로 발하며 봉을 앞으로 겨누는 승병들.
그들의 눈빛에선 이지를 상실한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상호의 지시를 우선시 해 따르도록 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이 바로 ‘언령’의 힘이었다.
“놀라운데.”
사람들이 모인 게 바로 집단이다.
저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효율적으로 움직이는가.
그것이 ‘커맨더’의 자질을 평가하는 근본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가진 능력은 무척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검증해야 할 것도 많고 또 반대로 약점이 될 부분도 있기에 당장 쓸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앞으로 이러한 능력을 상호 본인이 얼마나 잘 활용할 지가 큰 관건이었다.
그리고······.
“각성이 이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다. 내가 더욱 성장한다면 영웅 아드모스의 능력을 잠재력으로 끌어낼 수 있게 된다.”
영웅 아드모스는 분명 전장의 책사로 활약했던 영웅이다. 따라서 그의 영혼을 받아들임으로써 얻은 특수 능력 또한 ‘커맨더’로서의 능력을 중점적으로 두고 있다.
하지만 영웅의 능력은 거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번의 각성이 자신을 헌터로서 한 단계 더 끌어올려 줄 것이라고 상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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