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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조선시대에 가다-40화 (40/127)

八장. 이치 전투 2. (4)

포위된 의병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엔 기마 무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중갑에 말을 탄 그들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은 사실 상 무리였다.

“이쪽으로!”

상호는 평탄한 길 대신 일부러 길 옆쪽의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움직였다.

촤르르륵.

발이 끌리면서 자갈과 흙이 무수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위태롭게 비탈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상호의 시야에 왜병들에게 포위되어 힘겹게 버티는 의병들이 들어왔다.

약 이삼십 명 정도만이 간신히 살아남아 자신들을 포위한 왜병들은 상대로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다.

몇 배나 되는 왜병들이 포위진을 갖추고 점점 조여오고 있어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상황이었다.

“서두르죠!”

“음!”

비탈을 따라 걸음은 재촉한 세 사람은 마침내 의병들을 포위한 왜병의 후방에까지 당도했다.

갑자기 나타난 세 사람을 보고 뒤쪽에 있던 왜병들이 몸을 돌렸지만 그보다 먼저 세 사람의 공격이 빠르게 번뜩였다.

“크아악!”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연거푸 왜병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그 사이로 세 사람이 빠르게 돌파해갔다.

앞서 달려가는 임충이 검을 내리그으니 왜병이 가슴팍에서 피가 강하게 분출되었다.

쓰러지는 시체를 건너뛰며 상호는 옆에서 오는 창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왼쪽 주먹으로 상대의 턱을 올려쳤다.

부러져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이빨과 함께 공중을 떠오르는 왜군을 뒤로 하고 상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에 율 역시도 상호와 함께 다른 측면의 적을 막아내니 무사히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자, 자네들은?”

“무사하셨군요.”

상호는 자신들을 보고 놀라는 고인후를 보며 안도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고인후 앞에 누워있는 고경명의 모습을 본 것이다.

몸 곳곳에 총탄을 맞은 고경명은 피투성이였지만 고통스러운 표정이 아닌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부친께서는······.”

“적에게 수치를 보이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다 그만···전사하셨네.”

고인후는 슬픔을 억누르며 말했다.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최후까지 떳떳하게 싸우고자 했던 고경명은 조총병들의 사격으로 몸에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 그대로 절명했다.

본래 역사에선 금산성 전투에서 최후까지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했을 운명이었지만 상호의 개입으로 그것을 피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나, 운명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타앙!

총성과 함께 상호의 근처에 총탄이 지나갔다.

고경명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할 여유도 주지 않고 왜병들은 상호 일행의 난입 때문에 잠시 주춤했던 공격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슬퍼할 시간도 안 주겠다는 거냐.”

날아드는 총탄 때문에 허리를 깊게 숙이고는 상호는 분통을 터트렸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모두 죽임을 당할 게 분명했다.

상호는 고인후에게 말을 전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시죠.”

이러한 재촉에도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고인후는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부친을 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상호를 보더니 이와 같이 말했다.

“부친의 시신을 이렇게 두고 갈 수는 없네. 나를 대신해 여기 있는 이들만이라도 데리고 여길 빠져나가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고인후의 말에 상호는 울컥하며 대꾸했다.

아무리 가족이 죽어 슬프다고는 해도 시체를 두고 갈 수 없어 여기서 죽겠다는 말은 그로선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과 조선 시대의 사람 사이의 가치관 차이가 가져온 갈등이었다.

부모를 깍듯이 모시는 효孝를 아주 중요하게 보는 유교관이 뼛속 깊이까지 박힌 조선의 양반인 고인후는 이런 곳에 부친의 시신을 두고 그냥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호로선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각오!”

“위험합니다, 나리!”

등을 보인 상호를 노리고 하급 무사가 달려오는 것을 율이 간발의 차로 가로막았다.

율은 날아든 왜도를 흘려내듯 빗겨 쳐내고는 곧장 칼날을 올려붙였다.

이렇게 휘둘러진 검은 무사의 턱을 쪼갰고 피를 뿜게 만들었다.

“크아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무사는 악착같이 왜도를 휘둘러 율을 베고자 했다.

율은 날아드는 일격을 간신히 받아내면서 자리를 지켰다.

이를 상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얼른 쓰러져버려!”

외침과 함께 발로 무사의 배를 강하게 걷어찼다.

이 발차기에 무사는 왜병들이 있는 곳까지 날아갔고 그들과 부딪쳤다.

“대, 대단하다.”

“사람은 저렇게 멀리까지 날려 보내다니.”

의병들은 물론이고 왜병들까지도 상호가 행한 일에 놀라 싸움을 잠시 멈출 정도였다.

덕분에 여유가 생긴 상호는 다시 고인후를 보았다.

아직도 부친의 시신을 곁에 있는 그를 본 순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고인후의 팔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이 행동에 고인후는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무, 무슨 짓인가!”

“당신이 이렇게 죽는 것을 부친이 원했을 것 같습니까? 어떻게든 살아서 복수를 할 생각은 어째서 못하는 겁니까!”

“······!”

상호의 일갈에 고인후의 눈이 살짝 떨렸다.

부친의 죽음에 자괴감에 빠져있었지만 상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고인후도 모르지 않았다.

여기에 고경명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도 떠올렸다.

바로 이때, 적을 막아서던 임충도 검을 연신 휘두르면서 고인후에게 말을 전했다.

“이 부위의 말을 옳습니다. 이런 곳에 목숨을 바치자고 의기로 병사를 일으킨 것은 아니지 않소이까.”

“물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한데 여기서 포기할 참입니까. 부친의 유지를 잇지도 않고 말입니다.”

“으음.”

임충의 말은 고인후는 더욱 흔들렸다.

여기에 쇄기를 박듯 상호가 다그치듯 말했다.

“자, 어서 결단을!”

고인후는 바닥에 고이 눕혀진 부친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마음을 고쳐 부친의 유지를 잇기로 결심했다.

“모시고 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버님.”

눈물을 흘리며 부친의 시신에 고개를 숙인 고인후는 옆에 놓았던 검을 쥐고 일어나더니 주저 없이 그것을 휘둘러 무언가를 잘라냈다.

검이 벤 것은 다름 아닌 고경명의 상투였다.

비록 시신을 갖고 돌아가지 못해도 몸의 일부인 머리카락이라도 가지고 돌아가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결의를 보인 고인후는 몸을 일으키고는 상호를 보며 말했다.

“나 때문에 시간을 지체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어서 서두르세.”

고인후의 말에 상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상호 일행이 합류한 지 불과 10여분이 흘렀을 뿐이지만 상황은 매우 안 좋아졌다.

“커허억!”

“아악, 내 팔!”

더 이상 물러날 길이 없는 가운데, 의병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나가고 있었다.

임충과 율이 힘을 내서 거리를 좁혀 공격하는 왜병을 대신 상대해 그들을 베며 막아내고 있지만 사방에서 오는 무수한 적을 이 두 사람으론 막는 것이 한계가 있었다.

“큭!”

상호는 다급히 자신들이 왔던 방향을 보았다.

저 멀리 왜군의 기마 무사를 상대로 분투하는 정담과 관병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곳까지 저들이 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역시 돌파밖에 방법이 없는 건가.”

말이 쉽지 아군이 있는 곳까지 가는 길목에 쫙 깔린 왜병들은 이쪽보다 몇 배나 더 많았다.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제가 앞장 서지요.”

어느 때보다 더 결연한 표정을 보이며 임충은 상호의 앞에 섰다.

그것을 본 상호도 마음속으로 용기를 발휘했다.

“까짓 한 번 여길 뚫고 탈출해보죠.”

상호는 그리 말하면서 검을 잡은 손을 천으로 묶었다. 이것은 혹여나 난전 중에 검을 놓치지 위한 조치였다.

상호가 임충의 왼편에 서자 어느새 왜병의 피로 피칠갑을 한 율도 그의 옆에 섰다.

든든한 조력자를 양 옆에 둔 상호는 길을 막아선 무수한 왜병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우리가 길을 열 테니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뒤따라와요.”

상호는 살아남은 의병들에게 이리 외치고 왜병들을 향해 곧장 돌진하였다.

그와 동시에 임충과 율도 함께 뛰니 앞에 서 있던 왜병들은 우선적으로 이들 세 사람을 막고자 했다.

“비켜! 비켜!”

상호는 큰 소리로 외치면서 앞에 서 있는 왜병을 향해 단숨에 검을 내리그었다.

단칼에 몸이 베인 왜병은 가로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내 앞에 있는 놈은 죽는다! 죽기 싫은 녀석들은 알아서 비켜라!”

상호의 경고는 왜병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었지만 말을 외칠 때 내뿜는 기백만으로도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

단순히 말뿐만 아니라 상호는 검을 마구잡이식으로 휘둘러 왜병들을 쫓아냈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서툴고 형편없었지만 워낙 기세가 흉흉한 지라 왜병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길을 비켜주고 말았다.

여기에 좌우에서도 임충과 율이 왜병들을 베면서 뛰어가니 길은 자연스레 열리게 되었다.

“어서 가자!”

고인후는 다친 의병을 부축하여 그 뒤를 따랐다. 그 모습에 살아남은 다른 의병들도 전력을 다해 뛰었다.

“저, 저! 어서 막아라!”

다 잡은 조선군이 탈출하려는 모습을 본 무사가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지휘관의 닦달에 왜병들은 이번엔 상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길을 비키지 않았다.

창이 줄지어 겨눠진 모습을 본 상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걸음을 급히 멈췄다.

“어딜 길을 막고 난리야!”

상호는 소리치며 옆으로 검을 길게 그었다.

검은 줄지어진 창과 부딪치며 옆으로 나아갔다.

이때, 검에 실린 거력이 창을 든 왜병들을 휘청거리게 했다.

“으라차!”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상호는 육탄으로 왜병들을 쓰러뜨려갔다.

“쿠억!”

“우아아악!”

상호의 손발에 왜병들이 자비 없이 날아가고 땅에 처박혔다.

그제야 상호가 아까도 괴력을 발휘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왜병들은 벌벌 떨며 그에게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다.

“좋았어.”

지금 이 틈이 기회였다.

상호는 다시금 길을 열기 위해 뛰고자 했다.

그런데 이때, 뒤쪽에서 조총병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지면에 대고 사격을 하려 했다.

“제길!”

총격이 펼쳐지기 전에 지면에 납작 엎드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리하면 돌파는 어렵게 되고 만다.

찰나에 판단한 상호는 총격이 올 방향을 향해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내밀었다.

“하아아앗!”

상호가 미간을 좁히며 기합을 발하자 마른 땅에서 갑자기 물줄기가 솟구쳤다.

곧 이 물줄기는 넓게 퍼져 장막을 만들어냈다.

물의 장막이 펼쳐진 그 순간!

총성과 함께 탄환이 조총에서부터 발사되어졌다.

날아온 탄환은 얇은 물의 장막을 통과하면서 힘을 잃었고 상호가 있는 곳까지 가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졌다.

“요, 요술이다!”

“음양사가 나타났다!”

그 광경을 본 조총병들은 대경질색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심지어 어떤 자는 너무 놀라서 엉덩방아까지 찧으며 주저앉기도 했다.

“으윽.”

총탄을 막아낸 상호는 신음을 흘리며 갑자기 휘청거렸다.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력이 거의 없던 상황에서 무리해 능력을 쓴 반동이 온 것이다.

“쓰, 쓰러지면 안 되는데······.”

코피가 콸콸 쏟아지는 가운데 상호는 어떻게든 몸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몸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시야는 거의 까매진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기절해도 이상할 게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어렴풋이 들려온 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그 말에 대답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상호는 결국 전장 한복판에서 의식을 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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