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장. 이치 전투 2. (2)
전투 초반부터 팽팽했던 전황은 시간이 흘러도 달라진 게 없었다.
사전에 고지를 점하고 방어를 단단히 준비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쉽게 무너지지 않고 왜군의 전진을 멈추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길이 그나마 고른 정면에서뿐만 아니라 가파른 낭떠러지인 측면 쪽에서도 왜군들이 밀고 들어오면서 다시 한 번 위기가 찾아왔다.
“놈들이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활을 쏴라!”
권율을 따라 이곳 이치에 온 장수 중 한 명인 황진이 아래서 올라오는 왜병들을 막고자 활을 든 사수들을 독려하며 화살을 계속 쏘도록 했다.
아래로 쏘아지는 화살에 넝쿨이나 바위 틈새를 이용해 위로 올라오던 왜병들이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낭떠러지 아래에서 조총병들이 위를 향해 맹렬히 사격하였다.
피융!
“겁먹을 것 없다! 아래를 향해 계속해서 화살을······.”
말을 잇던 황진이 제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밑에 날아든 총탄이 두정갑을 뚫고 복부에 명중한 것이다.
“장군!”
“어으윽.”
황진이 쓰러지자 주변에 있던 병사는 혼란에 빠졌다.
이 틈에 재차 낭떠러지 아래에서 왜병들이 올라왔고 이를 막지 못했다.
“측면이 뚫렸사옵니다.”
“후위에 있는 부대를 보내서 적을 몰아내게.”
“영감, 그 역할을 제게 맡겨주소서.”
권율의 앞에 자진해 나선 것은 바로 고인후였다.
현재 뒤에 대기 중인 부대는 거의 의병들이었기에 권율은 선뜻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고인후는 바로 삼백의 의병들을 이끌고 측면으로 오는 왜병을 맞아 상대했다.
“날 따르라!”
제일 앞에서 달려가 고인후가 왜병을 연달아 고꾸라뜨렸다.
그의 활약에 고무된 의병들도 함성을 지르며 뒤를 따랐다.
아직 충분한 숫자가 위에 올라오지 못했기에 왜병들은 낭떠러지를 등지게 되었다.
“놈들을 모두 저 아래로 처박아라!”
“와아아!”
고인후와 의병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왜병들이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급기야 절벽 끝에 몰린 왜병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서 비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어떻게든 아래로 내려가려는 자도 있고 이판사판이라는 의병들에게 덤벼드는 자도 있었다.
물론 덤벼든 자들은 여지없이 의병들의 창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결국 위로 올라온 왜병들은 모두 도륙되거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렇게 측면에서의 공격도 실패하니 고바야카와도 군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왜적 놈들이 물러난다!”
“우리가 이겼다!”
“오오!”
물러나는 왜군을 보며 조선군 병사들은 환호성을 터트렸다.
한 차례 큰 싸움이 끝나고 이치 고개엔 고요가 찾아왔다.
양측 모두 수백의 사상자를 낸 싸움이 끝나고 남은 것은 곳곳에 뿌려진 핏자국과 시체들, 그리고 버려진 병장기와 찢겨진 깃발뿐이었다.
어느새 주변은 어두워지고 밤이 가까워졌다.
“다들 긴장 풀지 마라.”
하급 군관이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다.
상호는 나무 등치에 몸을 기대고 잠시 손을 든 주먹밥을 내려다보았다.
“간이라도 좀 맞춰주면 좋은 텐데.”
소금 간이라고 전혀 되어 있지 않아 목구멍으로 집어넣는 게 영 쉽지 않았다.
그래도 허기를 달래려면 어쩔 수 없기에 꾸역꾸역 주먹밥을 뱃속에 집어넣었다.
“후우.”
“여기 물 좀 드세요.”
“아 고마워.”
상호는 물이 담긴 죽통을 건네주는 율에게 감사를 표하고 퍽퍽해진 입 속으로 물을 털어 넣었다.
다 마신 후에 빈 통을 돌려주며 율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 다친 상처는 좀 괜찮아?”
“네. 걱정하실 정도의 상처는 아니에요.”
전투 중에 상대했던 붉은 갑주의 무사를 상대로 싸우다 율은 팔뚝에 경미한 자상을 입었었다.
다행히 피부만 살짝 베인 상처였지만 그래도 상호는 염려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런 곳에선 자칫 관리 잘못하면 파상풍에 걸릴 수도 있으니 틈틈이 상처를 소독하도록 해.”
“알겠어요. 그보다 제가 곁을 지킬 테니 잠시 눈 좀 붙이시는 게 어떠시겠어요.”
“음, 좀 자긴 해야 하는데······.”
상호는 말을 흐리며 고개 아래를 보았다.
퇴각은 했지만 아직 공격을 포기하지 않은 왜군은 고개 아래에 진을 치고 있었다.
언제 또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마음 편히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정신력을 회복하는 일만 아니라면 헌터로 활동하면서 2,3일 잠을 자지 않고 전투를 수행한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딱히 지금 자지 않아도 괜찮은 터였다.
이러하기에 오히려 율에게 권유를 했다.
“난 괜찮으니깐 먼저 자도록 해.”
“제가 어찌······.”
“내 등 뒤를 지켜주는 네가 지쳐있으면 내가 불안하니 그래.”
자신을 위해서라도 쉬라는 상호의 말을 율은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다.
율은 여름이라 밤이라도 쌀쌀하지 않지만 모기를 비롯해 갖가지 날벌레가 귀찮게 달라붙기에 모포를 목까지 끌어올리고 상호에게서 약간 떨어진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투를 치르느라 상당히 지쳐 있었던 것인지 그녀는 금방 잠들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다 상호는 졸린 지 기지개를 크게 펴면서 중얼거렸다.
“으음, 이럴 때 커피라도 마시면 좋은데.”
이 시대에는 없는 기호 식품을 떠올리며 상호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빛이 있는 조선군 진영 너머는 아주 새까맸다.
“이럴 땐 올빼미의 눈 능력이 아쉽단 말이지.”
단순히 멀리 보거나 확대해서 보는 것만 되는 ‘매의 눈’과는 달리 ‘올빼미의 눈’은 야간에도 대낮처럼 시야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었다.
상호는 보초를 서는 병사들을 빼고 다들 잠든 탓에 적막해진 분위기 속에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깜깜한 어둠만 있는 지상과 다르게 하늘은 현대에선 볼 수 없었던 빽빽이 별이 수놓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해가 없으니 별이 참 많네.”
조선 시대에 떨어진 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어간다.
정신없는 일들의 연속 덕에 지금까지 크게 떠올리지 않고 지내올 수 있었지만 밤하늘을 바라보는 중에 자극받은 감성 탓에 새삼 원래 시대가 그리워지는 상호였다.
가족과 그리고 친구들, 그리고 초라하지만 그래도 헌터 일을 하고 돌아와 쉴 수 있던 자신의 집이 차례차례 머릿속에 떠올랐다.
과연 다시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
점차 어긋나기 시작한 이 시대의 역사. 그리고 이레귤러라 할 수 있는 몬스터들의 존재들.
어쩌면 이미 상호가 알던 미래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자신이 정신을 다잡고 이렇게 목적을 갖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이러한 희망이 있어서다.
그러니 미래에 어떤 결말이 기다려도 지금은 굳게 이 희망을 붙잡고 정한 계획에 따라 계속 갈 수밖에 없었다.
“후우.”
공연히 미래에 대한 생각과 향후의 일에 대한 걱정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상호는 한숨과 함께 지금까지 떠올린 것을 애써 잊으려 했다.
사박.
이 때, 아주 작은 소리가 상호의 귀에 들어왔다.
잠든 사람들도, 보초를 서는 병사들도 알아채지 못한 미세한 소리였다. 하지만 감각이 뛰어난 상호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뭐지, 산짐승인가.’
처음 생각해낸 것은 토끼나 너구리 같은 산짐승이 수풀을 건드려 이런 소리가 났다는 쪽이었다.
그렇지만 이 생각은 곧 부정으로 바뀌었다.
‘이토록 사람이 많은데 산짐승이 이렇게 가까이까지 온다고? 그건 말도 안 된다.’
수상함을 부쩍 느낀 상호는 더욱 촉각을 곤두세웠다.
투둑.
이번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정확히 왜군들이 있는 방향에서 들렸다.
이를 통해 상호는 왜군이 야습을 하려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율, 율! 내 말 들려.”
“으음, 네.”
곤히 잠들었다가 상호의 부름에 눈을 뜬 율은 반쯤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율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상호는 속삭여 말했다.
“아무래도 왜군이 야습해오려는 같아. 지금 바로 임충 무관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려줘.”
“아, 알겠어요.”
갑자기 상호가 귓속말을 해와 너무 놀라 얼굴이 벌개졌던 율은 곧 이어진 말은 금방 정신을 바짝 차렸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상호가 부탁한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기에 율은 곧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임충이 있는 곳으로 소리 없이 움직였다.
조치를 이렇게 취해놓고 상호는 아래쪽을 주시하며 고민에 빠졌다.
임충이 상황을 알고 윗선에 보고 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 때까지 왜군이 가만히 있어준다면 다행이겠지만 그 전에 먼저 야습을 해올 가능성이 더 컸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볼까.”
상호는 허리춤에서 단감을 꺼내들었다.
지금 상황에선 거추장스러운 크기가 큰 무기보단 이런 단검이 더 유용했기에 갑옷도 입지 않고 단검만 든 채 은밀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움직였다.
수풀 사이로 최대한 몸을 낮춰 이동하였기에 주변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도 그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크들에게 포위되어 삼일 밤낮을 기어 탈출한 적도 있던 나다. 이 정도는 껌이지.’
상호는 능숙하게 앞으로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제 자리에 멈추고 수풀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숨까지 천천히 쉬는 상호의 앞으로 어둠에 가려졌던 왜병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조선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검은 칠을 한 왜병들은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오고 있었다.
슥.
상호는 그들을 일부러 지나치게 한 다음 소리 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음? 음!”
등 뒤에서 상호가 갑자기 덮치면서 입을 막자 왜병이 몸부림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상호는 그의 목 한가운데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잠시 바르르 몸이 떨리더니 이내 왜병은 축 늘어졌다.
상호는 시체를 조용히 땅에 눕히고 곧장 다른 목표를 향해 은밀히 움직였다.
“억!”
“으윽!”
계속해서 왜병들의 모습이 사라져갔다.
하지만 어둠 때문에 이 사실을 눈치채는 자는 없었다.
털썩.
또 한 명을 해치운 상호는 자세를 낮췄다.
아까보다도 훨씬 많은 왜병들이 주변에 도사리고 있었다.
아무리 어둠이 깔려 있다지만 이대로 계속 암습을 할 수는 없었다.
“쏴라!”
이때! 고개 위쪽에서 외침이 들리더니 불화살들이 일제히 아래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날아온 불화살은 곧 수풀들에 불을 붙였다.
그 덕에 막 위로 올라오던 수백의 왜병들이 고스란히 조선군의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제길, 들켰다!”
“어? 앞에 있던 녀석들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당혹에 빠진 왜병들이 이렇게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또다시 날아온 화살들이 그들의 몸을 꿰뚫었다.
이에 왜병들도 고함을 내지르며 조선군 병사들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아군이 쏜 화살에 맞아 뒈질 수는 없지.”
상호는 자신의 근처에 떨어져 박히는 화살을 보며 중얼거리고는 다시 되돌아가고자 몸을 낮게 숙이고 움직였다.
처음에는 이런 상호를 한 편으로 생각하고 공격하지 않던 왜병들이었지만 이내 복장을 다른 것을 알고는 주변에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쳇! 들켰나.”
졸지에 포위된 상호는 더 이상 은밀하게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아군이 있는 쪽으로 곧장 전력으로 뜀박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 앞엔 이미 길을 가로막은 왜군들이 있었다.
“에잇!”
상호는 창을 앞세운 왜병들을 피하기 위해 옆에 있는 소나무를 향해 뛰어올라 그것을 밟았다.
순간적으로 사람 키보다 높이 뛰어 나무를 딛고 더 높이 도약해 뒤로 넘어가는 상호의 모습에 왜병들은 입을 떡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앗!”
상호는 착지를 하는데 성공한 직후에 발이 미끄러져 앞으로 코를 박을 뻔 했다.
불행 중 다행히 손으로 바닥을 짚어 그런 꼴은 면했지만 무릎이 까지는 부상은 피할 수 없었다.
“아으 아파라.”
쓰딘 아픔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이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바로 뒤로 왜병들이 눈에 불을 켜고 쫓아왔기 때문이다.
“칫!”
상호는 서둘러 땅에서 손을 떼고 경사지고 돌과 풀이 잔뜩 있는 길을 따라 올랐다.
그런 그를 쫓아 왜병들도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한 편으로 위에서는 화살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날아들었다.
슁!
“아 진짜!”
같은 편인지 모르고 날려 오는 화살에 내심 분통을 터트리며 상호는 바로 앞으로 달리지 못하고 좌우로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왜병과의 거리는 좁혀지게 되었다.
“죽어라!”
왜도를 든 하급 무사가 아래서부터 뛰어와 상호를 향해 위에서 아래로 일격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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