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장. 이치 전투 (5)
상호는 좌우의 사람들 얼굴을 두루 살펴본 다음 이처럼 말했다.
“제 힘으로 조총병들을 무력화시킨다면 분명 적들은 적지 않은 혼란을 겪을 것입니다. 그 틈에 돌파를 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허어!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하는군.”
“무슨 터무니없는! 혼자서 적의 조총병들을 와해시키겠다니. 일기당천의 여포라도 그런 일을 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해.”
다들 하나같이 상호가 한 말을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취급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불신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상호 본인의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직접 눈으로 제가 가진 힘을 확인해보시죠.”
이리 말한 상호는 손으로 앞으로 뻗은 다음에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뒤, 위를 향해 펼쳐진 손바닥 위로 물방울들이 모여들어 작은 물줄기를 만들었다.
“허억!”
“오메, 이게 무슨 일인가?”
상호가 가진 힘에 대해 알고 있던 임충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마침 뱀마냥 허공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물줄기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심어준 상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이 봤을 때, 이런 힘은 처음 보겠죠. 하지만 이 힘은 여러분도 가질 수 있는 힘입니다.”
여기 있는 의병들에게 몬스터에 대한 것과 그것을 토벌하면 얻는 성과에 대한 부분까지 설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상호가 들려준 이야기에 다들 시시각각 다양한 반응을 내비쳤다.
무엇보다 자신들도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인 이들도 있었다.
삽시간에 분위기를 휘어잡은 상호는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제 제안에 이의가 있으신 분 있으십니까?”
물론 여기서 더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상호가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미 이들은 그를 달리 보게 된 것이다.
“그럼 결정 났군. 우린 자네만 믿겠네.”
고인후의 말에 상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기에 작전은 바로 속행되었다.
신속한 돌파를 위해 최대한 짐을 줄이고 부상자들은 건장한 자들이 직접 업거나 수레에 한 명도 남김없이 실었다.
파앗!
“······됐다.”
상호는 마지막 하나 남은 몬스터 코어를 통해 정신력을 강화하였다.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 사용해야 할 속성력을 조금이라도 향상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나리, 여기 입으실 갑주를 가져왔어요.”
“어 고마워.”
상호는 율이 가져다 준 갑옷을 보았다.
찰갑이라 불리는 가죽으로 만든 갑옷엔 전 사용자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핏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금은 이런 것에 불평불만을 가질 때가 아님을 알기에 군말 없이 입기로 했다.
그런데 입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끄응!”
“제가 도와드릴게요.”
곁에 있던 율은 갑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상호를 도와주었다.
상호는 대신 끈을 묶어주는 율을 돕고자 최대한 가만히 있으면서, 그런 율을 바라보았다.
전쟁터이기에 남장을 했지만 옷깃 사이로 얼핏 보이는 뽀얀 살결은 상호의 마음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에 황급히 고개를 위로 돌리고 공연히 먼 하늘만 보았다.
“다 됐어요, 나리.”
“고, 고맙다.”
율의 말이 들리고 나서야 상호는 다시 고개를 바로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앞에 선 율의 얼굴을 보니 아까의 민망한 상황이 떠올랐고 괜스레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이런 상호의 반응에 율이 의아해하며 말을 건넸다.
“뭔가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나리?”
“아니 그런 것 없어, 하핫!”
겸연쩍음을 숨기기 위해 말을 한 뒤에 어색하게 웃는 상호였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볼을 살짝 긁적이며 율을 향해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제 목숨을 걸고 반드시 나리를 지키겠어요.”
“아니, 아니. 목숨을 걸지 말고.”
너무 나가는 율을 만류하며 상호는 재차 말하였다.
당황하는 그 모습이 얼핏 재밌어보였던 것일까.
순간 율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힘겹게 참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모습은 현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래의 소녀를 연상케 했다.
“후훗.”
상호가 그 모습을 보고 웃자 율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나리 앞에서 제가 송구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그런 말 할 것 없어. 난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깐.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내게 편하게 대하도록 해.”
“어찌 저같이 미천한 자가······.”
“괜찮다니깐.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동생 같아서 그러니 앞으론 날 너무 어려워하지 말았으면 해.”
“······네.”
상호의 말에 율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에 상호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 작은 율의 정수리 부분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어루만져준 다음에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본 율은 곧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 번 이치 고개로의 길목에서 고인후의 지휘에 움직이는 의병대와 왜장 다케가와가 지휘하는 왜군은 마주하게 되었다.
왜군 측은 철저하게 수비에 치중하여 조총 부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진을 단단하게 갖췄다.
“괜찮습니까?”
“물론이죠.”
정면에 보이는 왜군의 진형을 보며 상호는 주먹으로 다른 손바닥을 치며 답했다.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전쟁터라는 곳을 경험하지 못해 처음엔 위축되긴 했지만, 연이은 실전을 통해 자신의 능력이 충분히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돌격 앞으로!”
임충의 목소리와 함께 먼저 기마대가 왜군을 향해 돌격해 나갔다.
이에 맞춰 왜군도 조총 부대를 앞세워 방어에 들어갔다.
“거총!”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총구를 겨누는 조총병들.
그들과 기마대 사이의 거리는 시시각각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마대의 중앙에서 말을 몰며 상호는, 의식을 집중하면서 동시에 안장 옆에 달아둔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열었다.
촤아아앗!
그 속에서 물줄기가 위로 솟구쳐 올랐다.
비단 이런 물줄기는 상호가 탄 말에서만 나온 게 아니었다.
주변에서 함께 말을 몰던 율과 그리고 십여 명의 기병이 탄 말에 매달려 있던 가죽 주머니에서도 똑같이 물줄기가 솟구쳤다.
‘집중, 집중!’
허공에서 없던 물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이렇게 물을 준비하는 편이 정신력 소모를 줄일 수 있었다.
상호는 자신의 통제에 따라 허공으로 솟구친 물줄기를 하나로 모았다.
“저게 뭐야?”
“맙소사.”
조선군을 맞이해 싸울 준비를 하던 왜군들도, 그리고 돌파를 위해 달리던 의병들도 하늘에 집채보다 더 큰 물방울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가운데, 선두에서 달린 기마대는 어느새 왜군과의 거리를 100보까지 줄였다.
그제야 조총 부대를 지휘하는 왜군 무사가 왜도를 뽑아들며 외쳤다.
“심지에 불을 붙여라!”
이 지시에 조총병들은 익숙하게 조총의 심지에 불을 놓고 발포를 준비했다.
바로 그 순간!
상호는 왼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가랏!”
외침과 동시에 공중에 둥실 떠 있던 물방울이 움직여 조총병들이 있는 머리 위로 향했다.
곧 물방울을 이루던 물은 폭포수처럼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촤아아아.
쏟아진 물은 그대로 심지에 붙었던 불을 꺼트렸다.
“아니?”
“어서 불을 다시 붙여라!”
졸지에 젖은 쥐새끼와 같은 몰골이 된 부하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무사가 소리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심지뿐만 아니라 조총에 장전된 화약까지도 젖어 조총이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이 틈에 달려온 기병들이 가차 없이 장검과 언월도, 편곤 같은 무기로 공격하며 들어왔다.
퍼걱.
편곤에 맞은 조총병이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야말로 무력하게 조총병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몰살당했고 길을 내줬다.
기병들은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막, 막아랏!”
왜장 다케가와는 매섭게 진영을 파고드는 기마대를 막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워낙 창졸간에 앞을 내준 까닭에 창병들은 제때 그 앞을 막지 못했다.
이어서 후속해서 온 보병들이 달려드니 왜군은 버티지 못하고 길을 내줘야 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갑자기 난데없이 괴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바람에, 초기에 취했어야 할 공격을 전혀 못하고 부대가 와해되는 상황에 다케가와는 도저히 맨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장수부터 이러니 휘하의 왜병들은 의병들을 상대로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의병 부대 모두가 와해된 적진을 돌파해 반대편으로 가는 데 성공했다.
“작전대로 되는 것 같소이다.”
“먼저 부상자들을 실은 수레부터 보내고 차후에 우리도 이탈하도록 합시다.”
고인후는 그리 말하며 부대를 추슬러 혹여 있을 추격을 막고자 했다.
“차핫!”
상호는 이런 부대의 움직임에 따라 말 머리를 돌려 다시 한 번 왜군들 사이를 누비며 검을 휘둘렀다.
아직 말 위에서의 전투가 서툰 그였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과 다른 신체 능력 덕에, 왜병들을 연거푸 쓰러뜨릴 수 있었다.
때때로 이런 상호를 보이지 않게 위협한 왜병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율이 나서서 배후를 지켜주었다.
“죽어라!”
“사무라이인가.”
말을 타고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는 무사를 본 상호는 고민하지 않고 마주 말을 달렸다.
상대는 그런 상호를 향해 왜도를 옆으로 휘둘러왔다.
이것에 대항해 상호 또한 반대편에서 검을 휘둘렀다.
투캉!
격돌이 펼쳐지고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무, 무슨?!”
낙마는 면했지만 방금 전의 격돌에서 왜도를 통해 전해진 강한 충격에 그만 몸이 기우뚱했던 무사는, 손바닥이 찢어진 사실에 놀라며 상호를 돌아보았다.
그때, 뒤따라 달려온 율이 주저 없이 상대의 목을 향해 매끄럽게 검을 내질렀다.
그 일격에 무사는 목 앞쪽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절명하여 낙마했다.
그것을 본 상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율에게 말했다.
“좋은 연계였어.”
“예.”
“이제 슬슬 우리도 빠지도록 하자.”
상호는 주변의 상황을 보았다.
발이 느린 보병부터 왜군과 거리를 두고 퇴각하는 데 성공했고 이제 기병만 철수하면 될 일이었다.
“그럼 서두르시죠, 나리.”
“그래.”
상호는 혼란한 전장을 벗어나기 위해 말을 독려했다.
앞에는 아직 왜군들이 득시글거렸지만 이미 호되게 당한 탓인지 막아서는 왜병은 거의 없었다.
마침내 적진을 빠져나온 상호와 율은 그대로 말을 몰아 앞서 간 아군을 뒤쫓았다.
다행히 다케가와가 이끄는 왜군은 추격할 기미가 없었다.
사상자만 수백에 달하니 쫓아올 엄두를 못낸 것이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임 무관님도 다친 곳이 없어 안심입니다.”
마지막까지 기병들의 퇴각을 보고나서야 후퇴해온 임충은 입고 있는 두정갑이 피투성이였지만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이번 전투를 치르면서 의병 부대가 입은 피해는 생각보다 경미했다.
이 또한 상호가 초기에 조총 부대를 무력화시킨 덕분이었다.
“덕분에 모두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어디 저 혼자 잘나서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나요. 다 여러분이 도와준 덕분이죠.”
상호가 겸양하는 태도를 취하니 임충의 눈매가 더더욱 부드러워졌다.
이후 임충은 추격의 기미가 있는지 왜군의 동향을 좀 더 확인한 뒤에 휘하의 기마대를 앞서 간 본대를 따라 이동시켰다.
양옆으로 산세가 형성된 곳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이동하니 고갯길이 나타났다.
그곳엔 앞서 이동한 고인후가 이끄는 보병들만이 아닌 다른 군대가 이미 단단히 진을 치고 있었다.
“저 깃발은······.”
“광주 목사 권율 영감이 이곳에 온 모양입니다.”
진에 걸려 있는 깃발을 보고 임충은 상호에게 이리 알려왔다.
이미 역사를 통해 권율이 이곳에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상호는 놀라는 기색 없이 만전의 태세를 갖추고 고개를 지키는 조선군을 잠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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