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조선시대에 가다-32화 (32/127)

七장. 이치 전투 (1)

전라도 지방으로 노린 왜 5군의 공격에 불과 얼마 전에 함락되었던 금산성은 지금 다시 한 번 전화에 휘말려 있었다.

“성벽에 사다리를 걸어라!”

“어서 위로 올라가!”

성벽을 넘고자 애를 쓰는 것은 고경명의 궐기에 동참해 의병이 된 농민들이었다.

변변찮은 무장을 한 이들이었지만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마음 하나로 목숨을 걸고 사다리를 밟고 성벽 위로 향해 서슴없이 올라갔다.

의병들이 사다리를 반쯤 오르자 위에서 총구가 겨눠졌다.

“헉!”

“쏴라!”

투타타탕!

총성과 함께 성벽 위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오른다.

“으악!”

“어무이!”

위에서 날아드는 총탄 세례에 사다리를 오르던 이들은 피를 흘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병력으로는 고경명의 의병 부대가 우세했지만 수성의 이점과 조총의 화력을 바탕으로 응전하는 왜군 쪽이 좀 더 우세한 양상이었다.

계속해서 피해가 늘고 성벽을 오르던 의병들의 사기는 계속해서 꺾였다.

상황이 이리되자 고경명 휘하의 부장 한 명이 용기를 내 건의했다.

“장군! 아군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지금이라도 군을 물려 재정비를 해야 합니다.”

이 말에 성 쪽을 줄곧 보던 고경명이 고개를 돌리며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의 전력이 줄어든 지금이 아니면 이 금산성을 언제 탈환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힘을 모아 계속해서 밀어붙일 때임을 어찌 모르는가.”

수염까지 파르르 떨며 계속해서 공격을 주장하는 고경명의 반응에 부장은 더는 설득하지 못했다.

한 시진(두 시간)이 더 흐르고 계속해서 병력이 성벽을 노렸지만 여전히 성은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고경명이 있는 곳으로 드디어 상호 일행이 도착했다.

“아버님! 소자 왔사옵니다.”

“오, 인후냐.”

다른 곳으로 갔던 아들의 목소리에 고경명은 몸을 돌렸다.

이때, 상호는 처음으로 고경명을 보게 되었다.

노령이고 유학자로서 전장에 나가본 적이 없음에도 두꺼운 갑주를 입고 전장에 나선 고경명은 장수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웅치로 갔던 네가 이렇게 빨리 돌아오다니. 어떻게 된 일이냐.”

“그곳의 일이 잘 해결되어 아버님께 보고를 하러 돌아온 중에 상황을 알고 바로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님께 소개할 사람도 있습니다.”

“소개할 사람이라고?”

고경명은 아들의 말에 그 뒤에 있는 상호 일행을 보았다.

이런 가운데, 고인후는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자 저하의 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 중인 효력부위와 그리고 내금위 무관입니다.”

“세자 저하라고?”

아들의 말에 고경명은 새삼 다른 시선으로 상호 일행을 보았다.

이에 일행을 대표해 상호가 나섰다.

“구국충정의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키신 고경명 장군을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 촌부를 높게 평가해주니 고맙구먼.”

상호가 나름 이 시대의 격식에 맞춰 이렇게 말하니 고경명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성 쪽에서의 상황이 더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계속된 공격에도 성벽이 함락되지 않고 사상자만 늘자 급기야 몇몇 병사가 싸우라는 명령을 거역하고 탈주를 벌이기까지 하는 사태가 나타났다.

고경명은 이러한 것을 보고 참지 못했다.

“내 지금 성을 떨어뜨리는 일로 바쁘니 자세한 얘기를 나중에 합세.”

이렇게 말한 고경명은 싸움은 더 독려하기 위해 성 쪽으로 가고자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상호는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보이는 상황만 봐도 더 이상 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전쟁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그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공격을 포기하지 않는 고경명의 아집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귀중한 전력을 소모하게 만들 수는 없지.’

상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떠나려는 고경명의 앞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이러한 행동에 고경명은 급히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무슨 짓인가.”

“결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장군, 잠시만 제 얘기를 들어주십시오.”

“할 말이 무엇인가.”

“송구하지만 지금 이 전투를 당장 멈추시고 후퇴하셔야 합니다.”

“뭣이라?”

상호의 말에 고경명은 당장이라도 화를 뿜어낼 기세였다.

“부위 나리?”

“제가 대신해 사과를······.”

돌출 행동에 놀란 것은 같은 일행인 율과 임충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반응에 등에서 땀이 흘렀지만 상호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저의 행동에 화가 나신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먼저 제가 하는 얘기를 들어주십시오.”

“흐으음.”

“부탁드립니다.”

상호가 보인 간곡한 태도에 고경명의 화를 조금 누그러들었다.

“말해보게.”

원하는 대답을 들은 상호는 잠시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들은 결국 왜군에게 패해 전멸한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상호는 세자 광해군의 이름을 빌리기로 했다.

“아까도 밝혔지만 전 광해군 마마의 밀명을 받고 조선 팔도에서 궐기한 의병들과 접촉하여 명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의병에게 말인가.”

“예. 광해군 마마가 전할 명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장군과 그리고 의병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리한 전투로 전력을 소모한다면 어찌 그 명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

상호의 말에 고경명은 답변을 선뜻 하지 못했다.

아직 명이 어떤 것인지 듣지는 못했지만 얼마 전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직접 내린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상호의 설득은 통할 수밖에 없었다.

“군을 퇴각시킨다.”

“예, 장군!”

마침내 고경명은 고집하던 뜻을 접고 부장에게 철수할 것을 통보했다.

안 그래도 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부장은 흔쾌히 명령을 받아 부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서둘렀다.

다행히 이후에 성에 있던 왜군의 반격을 받지 아니라하고 고경명 부대는 몇 리 떨어진 곳까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밤이 찾아오고.

상호는 고경명에서 부름을 받고 그 막사를 찾게 되었다.

그 자리엔 고경명과 함께 금산성 공략에 나선 관군 측 방어사 곽영도 함께 하고 있었다.

“자네가 말한 저하의 명이 뭔지 말해보게.”

“네.”

상호는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는 고경명 앞에서 조심스럽게 중요한 얘기들을 하나 둘씩 하였다.

자신의 정체와 그리고 조선 각지에 나타나는 몬스터의 정체, 그리고 이를 토벌하는데 힘을 보태라는 광해군의 명까지,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이러한 말은 묵묵히 듣는 고경명의 표정에선 뭔가를 읽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임충과 고인후가 곁에서 증언을 해주고 광해군의 서찰을 보여주니 어느 정도 말을 믿는 눈치였다.

이에 상호는 적극적으로 한 번 더 철수에 대해 말하였다.

“금산성 하나를 뺏어 왜군에게 타격을 주는 것도 나라를 위한 일이겠지만 각지에 나타난 요괴들을 막는 게 이 조선과 민중을 위해 더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고을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민초들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응당 그 요괴라는 것들을 뿌리 채 뽑아내는 일에 세자 저하의 명이 없더라도 본인은 힘을 보탤 것이네.”

“그렇다면 이번엔 물러나서······.”

“하지만! 이곳 금산성을 탈환하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음이야.”

“장군!”

“금산성은 전라도 지방을 노리는 왜군의 전진 기지이네. 이곳을 탈환한다면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저지할 수 있다.”

고경명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애초 전라도 공략에 나선 고바야카와의 5군은 금산성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만약 여기를 탈환할 수 있다면 5군의 전라도 진출을 보다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

또한 더 나아가 한성을 탈환하고 북쪽으로 올라간 왜군 주력을 포위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데 곽영의 생각은 좀 달랐던 모양이었다.

“벌써 네 번이나 성을 공략했지만 한 번도 성벽을 넘지 못했소이다. 아무리 주력이 빠졌어도 이렇게 수비가 굳건하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서 후를 도모하는 편이 낫지 않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곽 방어사. 전주성을 치기 위해 이동한 왜군 본대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아니면 기회를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나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소이다. 하나, 저 성이 그리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아 하는 말이외다.”

“아무리 그래도 난 저 성을 탈환할 것이오!”

고경명이 쉽게 고집을 꺾지 않으니 분위기는 자연스레 무겁게 가라앉았다.

특히, 역사를 아는 상호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설득이 이렇게 어렵다면 결국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뿐이었다.

‘아깝지만 고경명을 설득하는 것은 포기하고 다른 의병장을 찾는 수밖에.’

수천 명에 달하는 의병들을 이쪽 일에 끌어들이지 못한 게 아쉽긴 하였다. 하지만 냉정하게 판단하면 고경명이 이끄는 군대가 참패하는 일은 엄연히 원래 역사대로 되는 것이니 상호의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다만 희생을 알고도 그것을 묵인한다는 게 마음에 약간 찔릴 따름이었다.

이후 밖으로 나온 상호는 임충과 대화를 나눴다.

“이곳에 오래 있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으니 내일 아침에 바로 이곳을 떠나도록 하지요.”

“정녕 이들이 패배하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숫자는 많지만 대부분이 농사를 짓던 농민들입니다. 곽영 장군의 병력과 연합했다고는 해도 금산성을 함락하기엔 전력이 약해요.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이들이 불리하리라는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으음.”

“아쉽지만 우리로선 할 만큼 했으니 괜한 위험에 휘말리지 않게 서둘러 이곳을 떠나는 게 상책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동이 뜰쯤에 출발하지요.”

임충 또한 상호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따로 반대 의견을 내놓지는 않았다.

이렇게 대화를 끝내고 하룻밤 지낼 막사로 가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상호를 불러 세운 것은 고경명의 아들인 고인후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버님의 강경한 뜻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면 대신 사과하겠소.”

“그런 것이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나라를 위한 충정으로 그런 것이니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 개인적으로는 세자 저하의 뜻에 따라 우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요괴들을 토벌하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게 정말입니까?”

“왜군들의 침략도 마땅히 막아내야겠지만 각지에서 창궐한다는 요괴들의 준동을 막는 것이 더 시급한 일 아니겠소.”

고인후의 말은 상호로선 무척 반가운 말이었다.

고인후가 적극적으로 나서준다면 고경명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여 상호는 기대하는 마음을 품고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한 번 더 같이 부친을 설득하여 마음을 돌려보는 것을 어떻습니까?”

“군을 움직이는 일엔 사적인 감정을 추호도 넣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건 무리일 것 같소.”

“그렇습니까.”

“어찌되었든 이번 전투만 잘 마무리되면 한 번 더 부친을 설득해 요괴 토벌에 나서도록 해보이다.”

“······.”

상호는 고인후의 말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혼자만이 아는 진실을 토로하지 못하는 이 현실이 그로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멈춰라!”

“정찰에 나갔던 이가이올시다. 급한 보고가 있으니 들여보내주시게!”

숙영지 바깥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갓 말을 타고 온 기병 한 명을 막아 세우고 있었다.

그 소동을 본 고인후는 상황을 알기 위해 그쪽으로 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에 상호는 넌지시 임충에게 말했다.

“우리도 가보죠.”

가까이 다가가니 앞서 간 고인후와 기병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급히 전해야 할 보고가 대체 무엇인가?”

“그, 그것이······ 웅치 쪽으로 갔던 왜군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뭐라고?”

고인후는 물론이고 막 이야기를 엿듣던 상호와 임충도 깜짝 놀랐다.

비록 웅치 고개에서 상호가 이끄는 부대에 의해 두 번이나 쓴잔을 마셨다지만 이렇게 빨리 회군해 오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바였다.

그것은 고인후도 마찬가지였는지 재차 정보를 가져온 기병에게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혹 잘못 보거나 틀린 정보는 아니겠지?”

“분명히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지금 그들은 어디까지 왔나?”

“약 오십 리 정도 떨어진 곳까지 와 숙영을 준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큰일이군.”

금산성까지 딱 반나절이면 닿는 거리까지 적 본대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인후는 다급해졌다.

“먼저 실례하겠소.”

“아, 예.”

급히 부친에게로 가는 고인후의 뒷모습을 보며 상호는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그를 향해 옆에서 임충이 말을 건넸다.

“큰일이지 않습니까. 설마 웅치 고개를 넘으려던 왜군이 이렇게 갑작스레 돌아오게 되다니. 이리되면 이곳의 병력은 앞뒤로 포위되게 될 것입니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크죠.”

보고한 게 사실이라면 고경명과 곽영의 연합 부대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고바야카와 군과 금산성의 왜군 부대에게 포위되는 형국이 된다.

본래 역사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서 고경명의 부대가 참패를 하게 되어버린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벌어진 시간이 원래보다 조금 앞당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래 역사와 다르게 상호가 웅치 고개에서 소수의 병력만으로 두 차례나 방어를 훌륭히 한 덕분에 벌어진 ‘역사의 비틀림’이었다.

이로 인해 상호 일행은 금산 전투라 불리는 이치 전투 전에 벌어지는 조선군의 패전이 약속되었던 전투에 본의 아니게 휘말리게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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