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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조선시대에 가다-30화 (30/127)

六장. 전쟁에 뛰어들다. (4)

상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왜군은 임충과 그가 지휘하는 조선군을 발견해냈다.

왜군은 전투태세를 취하고 좁은 고갯길을 따라 전력질주 했다.

“기다려라.”

임충은 섣불리 공격을 하지 않고 고개 정상에서 왜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고 왜군 측이 먼저 위협조로 발포했다.

“으악!”

“어메, 나 죽어!”

사정거리 바깥에 있기에 거의 위협이 안 되는 사격이었지만 사격 시 나는 큰 소리와 연기를 뿜는 소총이 병사들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이 때문에 다들 나무나 바위 뒤에 숨어 꼼짝도 않았지만 유일하게 임충만이 각궁을 들고 바위 위에 서서는 화살을 날렸다.

“커억!”

날아든 화살에 고갯길을 따라 올라오던 왜군을 거꾸러뜨렸다.

연달아 저격을 당하자 왜군 병사들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러자 뒤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무사가 왜도를 뽑아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움직여라! 머뭇거리는 병사는 내가 직접 목을 벨 것이다.”

무사의 엄포에 병사들은 자신의 목에 왜도가 날아들 수 있다는 공포에 다시금 고개 위를 향해 전진했다.

점차 양측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조총의 사정거리에 조선군이 들어오게 되었다.

날아드는 총탄이 바위나 나무에 박히거나 튕기는 가운데, 임충은 바위 뒤에 은신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자를 먼저 거꾸러뜨려야겠군.”

병사들을 독려하는, 등에 깃발을 꽂은 무사를 표적으로 삼은 임충은 사격이 뜸할 틈을 타 다시 한 번 화살을 날렸다.

매서운 기세로 날아간 화살은 왜군 무사의 두 눈 중 하나에 정확히 박혔다.

임충의 이런 활약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왜군들은 기어코 위로 올라왔다.

“살아남고자 하면 검을 들고 적을 막아라!”

임충의 일갈에 몸을 숨긴 채 꿈적도 하지 않았던 병사들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반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탕! 타탕!

조총병들의 일제 사격이 있고 창을 든 창병들이 비탈길을 따라 올라오기 시작했다.

“왜적을 쳐부수자!”

“와아아아!”

왜병을 맞이해 조선군 병사들도 밑으로 달려 나갔다.

마침내 양측은 좁은 고갯길 사이에서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촤악!

“으아악!”

서로를 향해 창을 찌르고 검을 휘두르니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전체적으로 조선군은 지형적 우세를 갖고 있고 왜군은 병사의 숫자나 질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초반엔 양측 모두 비등한 전투를 펼쳐갔다.

“물러서지 마라! 적에게 고개를 내줘선 안 된다!”

임충은 그리 호령하며 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왜군들을 연달아 쓰러뜨렸다.

다른 조선군 병사들도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고, 그로 인해 위로 올라오던 왜군의 기세가 살짝 꺾이게 되었다.

전세가 이리 되자 고개를 공격하게끔 한 왜군 측 지휘관은 급히 명령을 내렸다.

“고작 저 정도의 조선군에게 뭘 쩔쩔매는 것이냐! 당장 조총병들은 사격으로 적을 소통해라!”

이러한 명령에 조총병들은 아래쪽에서 일렬로 서서 위를 향해 다시 한 번 사격했다.

이번엔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몸을 드러내고 있던 조선군 병사 십여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겁먹을 것 없다!”

임충은 총격에 자칫 아군이 무너질까 재차 독려했다.

하지만 총격을 겁내 몸을 사리는 통에 조선군 병사들의 움직임이 아까만 못해졌고 자연스레 창을 들고 오는 왜군들에게 밀리게 되었다.

“죽어라!”

“커억!”

창이 복부에 박히자 조선군 병사가 왈칵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아래서 올라오는 창날을 피해 다들 위로 등을 돌려 뛰었다.

그때, 다시 한 번 총성이 들리고 등에서부터 피를 뿌리며 조선군 여럿이 또 쓰러졌다.

“이런······!”

임충은 무너지는 아군을 보고 탄식하였다.

이대로라면 웅치 고개를 왜군 손에 빼앗기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임 무관님!”

건너편 아래서부터 들려온 소리에 임충은 고개를 홱 돌렸다.

상호는 그런 임충을 보고 손을 한번 흔들어 보였으나, 곧 그 너머의 광경에 눈을 찡그렸다.

“벌써 여기까지 밀고 올라온 건가,”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상호는 함께 따라온 병사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주머니를 왜군들이 있는 곳으로 힘껏 던져요!”

이 말에 헬하운드의 기름 주머니를 든 병사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

철퍽.

던져진 기름 주머니는 왜군들이 있는 곳마다 떨어져 찢어졌다. 그러자 내용물이 주변에 뿌려지게 되었다.

“뭐지 이건?”

“윽! 고약한 냄새.”

왜군들은 던져진 것의 정체를 모르고 인상만 찡그렸다.

그 사이에 상호는 손에 활을 들고 불화살을 날렸다.

피융.

하늘 높게 솟은 화살은 정확히 아까 기름 주머니가 떨어진 지점에 낙하했다.

화르륵.

날아간 불화살이 지상에 떨어진 순간, 순식간에 지면을 따라 불길이 번져나갔다.

“불, 불이다!”

“으아아악!”

졸지에 불바다가 된 곳에서 왜군들은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특히나 화약을 소지하고 있던 조총병들의 경우엔 걸어 다니는 횃대가 되어버렸다.

“와아아아!”

“꼴좋다, 이놈들아!”

눈앞에서 왜군들이 불타자 조선군 병사들은 아까까지만 해도 겁먹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함성을 터트렸다.

지금의 방화로 선두로 올라왔던 수십 명의 왜군이 불타 죽었다.

피해가 막심하자 왜군 측 지휘관은 급히 병사들을 물려 고개 아래로 후퇴하였다.

간발의 차로 웅치 고개를 지켜낸 것이다.

물러나는 왜군을 보며 상호는 임충에게 말했다.

“어찌어찌 막아내었군요.”

“부위께서 기책을 발휘한 덕분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다친 곳은 없지만 지친 기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임충이 상호에게 말했다.

상호는 주변을 살펴 피해 상황을 확인했다.

마흔 명 가까운 병사가 죽고 그 두 배만큼의 인원이 다쳤다. 나머지도 상당히 지쳐 불붙은 곳의 진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어찌어찌 막았지만 다음은 어려울 것 같군요.”

“······.”

임충 역시 상호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하였다.

반절 남은 병력으로 웅치 고개를 지킨다는 것이 사실상 무리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어도 임충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담, 황진의 부대가 어서 와주지 않으면 기껏 지킨 고개를 빼앗기게 될 것이었다.

“다음 적이 오기 전에 아군이 도착하면 좋겠는데 말이죠.”

“저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일단 돌담을 쌓고 적을 올 것을 대비하도록 하지요.”

“예, 그러죠.”

여기까지 했는데 이대로 웅치 고개를 포기하고 물러날 수 없다는 데는 상호도 동의하는 바였다.

조선군은 화공을 쓰느라 검게 탄 지역의 잔불을 제거하고 좀 더 위쪽에 돌담을 임시로 쌓아 진지를 만들었다.

해는 어느새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 정오가 되었다.

“후우!”

7월의 날씨는 꽤나 더웠다.

고개에 오를 때 가져온 물은 불을 끄는 데 쓰느라 다 써버린 통에 마실 물이 없었다.

갈증과 더위에 상호는 짜증이 치미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아래를 보았다.

아군의 시신이야 수습했지만 왜군 시체까지 수습할 여력이 없었기에 아래엔 검게 탄 시체가 즐비했다. 그것을 보니 갈증이 더 생겨나는 것 같았다.

“으, 으으.”

“조금만 참으세요.”

뒤쪽에선 율이 부상자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전문적인 의술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무인의 딸로 칼에 베인 상처를 어떻게 다루는지 배운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부상자를 돌보았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열 명 이상의 부상자들이 숨을 거뒀을 것이었다.

‘적어도 율과 부상자들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싶지만······.’

지금 있는 인력으론 도저히 그럴 여력이 없었기에 그저 안타깝게 볼 따름이었다.

“부위 나리! 왜놈들이 또 몰려옵니다.”

“썩을!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올 것이지.”

아직 반대편 고갯길 너머로 아군이 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왜군들은 다시 부대를 정비해 고갯길 초입까지 온 것이다.

이젠 쓸 수 있는 헬하운드의 기름 주머니도 없고 화살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수백 명에 달하는 왜군을 상대해야 했다.

“이제는 더 써먹을 수도 없는데 미치겠군.”

상호는 올라오는 왜군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그런데 이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갑자기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와아아아!”

“왜적을 쳐부수자!”

함성과 함께 왜군들의 옆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기습을 감행했다.

대부분이 흰 옷을 입고 병장기 외에도 낫과 도리깨 같은 것을 든 그들은 정규군이 아닌 바로 의병들이었다.

* * *

수풀 사이에 숨어 있었던 의병들은 제대로 허를 찔린 왜군 사이로 재빠르게 파고들었다.

“오랑캐 놈, 뒈져버려!”

“커억!”

의병들은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가 왜병들을 쓰러뜨렸다.

초기엔 이렇게 의병들이 선전했지만 왜군은 혼란에서 빠르게 벗어나 반격을 꾀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죽어라!”

밀집하여 방진을 갖춘 왜군은 일제히 창을 앞으로 내세우고 의병들을 밀어붙였다.

의병들은 나름 분전하며 돌파구를 찾으려 했지만 이미 왜군은 명령에 따라 의병들의 주변을 완전히 포위한 뒤였다.

이대로 둔다면 이들이 되려 전멸당할 게 분명했다.

“저들이 그냥 당하고 두고 볼 수만 없지.”

어떻게 생긴 원군인데 그냥 몰살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이에 상호는 생각보다 먼저 몸을 움직여 비탈길을 따라 뛰어 내려갔다.

이 모습에 임충 또한 검을 높게 치켜들며 소리쳤다.

“날 따르라!”

이 외침은 효과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원군의 등장에 상호, 임충의 솔선수범을 본 병사들은 사기충천하여 일제히 아래로 돌진하였다.

갑자기 고개 위의 조선군들이 아래로 내려오자 왜군들은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졌다.

“에잇!”

제일 앞장서 내려온 상호는 왜군의 목덜미를 낚아채더니 그대로 집어던졌다.

허술하긴 해도 갑옷을 입은 장정이 조각돌 던져지듯 날아가 여러 명과 부딪쳐 쓰러지는 모습에 왜군 병사들은 눈을 커다랗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타하앗!”

상호는 이어서 바닥에 떨어진 왜군이 쓰던 장창을 주워들고 그것을 앞세워 왜병들이 몰려 있는 쪽으로 달렸다.

창이 찔러져 오는 것을 왜병들은 좌우로 흩여져 피했다.

“에이잇!”

하지만 그것을 보고 상호는 창대를 있는 힘껏 옆으로 휘둘렀다.

“쿠엑!”

“우와아앗!”

순식간에 공격하려던 이들이 창대에 거하게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상호의 활약에 뒤따라온 조선군도 열성적으로 왜군을 상대로 전투를 펼쳤다.

결국 왜군은 다시 한 번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또다시 후퇴하고 말았다.

왜군이 물러나고 상호와 임충이 이끄는 조선군 병력과 중간에 난입했던 의병들은 한곳에 모였다.

의병들 중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40대 초반의 남성이 먼저 말하였다.

“우리를 도와줘서 고맙소이다.”

“천만의 말씀을요. 오히려 이쪽이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 보아하니 의병인 것 같은데 어디서 온 의병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상호가 조심스럽게 묻자 의병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본인의 이름을 밝혔다.

“자는 선건이라고 하고 이름은 고인후라고 하오. 한때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내셨던 제봉 대감이 제 부친 되지요.”

“고인후라고 하셨습니까?”

상호는 임란 초기에 활동한 의병장 중에 고인후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인 제봉 대감이 고경명이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설마 이런 곳에서 한번 만나보고자 했었던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상호는 속으론 적잖게 놀랐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가슴을 가라앉혔다.

잠시 뒤, 상호 쪽도 고인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이 고개를 이 정도 병력만으로 지켜 내다니, 참으로 대단하시구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론 고경명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들은 이치 고개 쪽으로 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곳에 온 것입니까?”

“아버님께서 웅치 고개 쪽으로 왜군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받고 이곳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날 보내었소.”

“그렇군요.”

“하지만 이리로 오면서 관군은 여기서 물러났다고 들었는데 그대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소이다.”

“여기를 빼앗길 수는 없는 일이죠. 곧 후속 부대를 올 것이니 그때까지만 같이 이곳을 지키시죠.”

“마땅히 그리해야지요.”

고인후는 상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의병의 합류를 통해 다시 한 번 웅치 고개를 지켜낸 조선군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왜군을 상대할 만전의 준비를 갖추고 고개 위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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