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조선시대에 가다-20화 (20/127)

四장. 점령지를 돌파하다 (4)

왜군이 지키는 나루에서 나룻배를 뺏어 타고 무사히 미호천을 건너게 된 상호 일행은 왜군 측이 자신들에게 추격대를 붙인 것을 모른 채, 계속해서 남쪽으로 향하였다.

아직 왜군 점령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더 이상 왜군과 맞붙는 일을 피하기 싫어 일부러 다소 돌아가더라도 산길을 통해 길을 이동하였다.

말을 두고 와 속도는 전보다 느렸지만 그래도 금방 옥천 지방으로 지나 완주를 향해 서둘렀다.

그 길을 가던 와중에 한 번은 조선군과 왜군 간의 전투도 목격하기도 했다.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먼저 너른 들판을 횡단하는 것은 수백 명의 조선군이었다.

이들에 맞서는 왜군은 그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로 일자진을 갖췄다.

“오랑캐를 섬멸하라!”

두정갑을 입고 장검을 한 손으로 높게 치켜세운 무장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앞서 달려 나간다.

임란 초기 싸움만 하면 지레 겁부터 먹고 뒤에 숨기 급급하던 대부분의 조선 측 장수들과는 거리가 있는 그의 지휘에, 뒤따르는 군졸들도 사기충천한 모습으로 왜군들이 있는 언덕 위를 향해 전력질주 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길게 줄지어 선 왜군 조총병들은 심지에 불을 붙이고 사격 자세를 취했다.

타다다탕!

총성이 우렁차게 울리고, 무수한 납 탄환이 기세 좋게 달리던 조선군 측 장수와 그 뒤를 따르던 군졸들의 몸을 난타한다.

“크허억!”

온몸에 총탄을 맞은 장수는 피를 줄줄 흘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충격적인 모습을 본 뒤따르던 군졸들의 진격 속도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치명적인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투타타탕!

앞서 총을 쏜 조총병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메운 두 번째 조총병들이 일제 사격을 가했다. 다시 십여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그 숫자의 배에 달하는 자들이 신음을 흘렸다.

“허억!”

“난 죽고 싶지 않아.”

지휘하던 장수가 죽고 선두에서 달리던 동료들이 피를 뿌리자 남은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무기를 그대로 땅에 내팽개치고 등을 돌려 도망기기 급급했다.

그러자 왜군들은 일사분란하게 그 뒤를 추격했고 사격을 또 한 번 펼쳤다.

타다당!

총성과 함께 뒤돌아 도망치던 조선군들이 또다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참으로 참담한 패배.

상호는 이야기나 사극에서나 보던 것을 실제로 보니 이 시대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이런 일도 겪으면서 더더욱 자신이 임진왜란 시절의 조선에 떨어졌음을 확실하게 인지하는 상호였다.

“어서 가지요.”

“···네, 그래야죠.”

상호는 임충의 말에 차마 떨어지지 않은 걸음을 떼어야만 했다.

계속해서 남쪽을 향한 여정은 이어졌다. 하지만 계속해서 도보로만 이동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말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때에 임충이 한 가지 정보를 알렸다.

“조금만 더 가면 역참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말을 얻어 이동하면 사나흘 안에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좋겠군요.”

상호는 가파른 산길을 걸으면서 진심으로 대답했다.

이름 없는 산 하나를 넘으니 길이 나왔고, 그 중간에 역참이라는 것을 알리는 깃발을 올린 초가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까이 가니 한쪽에 있는 마구간에 여섯 필의 건강한 말이 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임충은 역참 앞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게 누구 없는가.”

잠시 정적이 흐르고 초가집 안쪽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초라한 외모의 노인이 힘겹게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노인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뜨며 상호 일행을 두루 보면서 말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신지요?”

이 말을 하면서 관노는 상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이 시대의 복장이 아닌 옷을 입은 것이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다.

상호가 이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임충이 말했다.

“조정의 명에 움직이는 관리이네.”

“아이구!”

역참에 속한 관노인 듯 보이는 노인은 다분히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더욱 허리를 숙였다.

그것을 본 상호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뒤에 광해군이 준 마패를 관노에게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탈 말이 필요한데 준비해줄 수 있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바로 튼튼한 놈들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 말하고 서두르려는 관노를 임충이 잠시 말로 붙잡았다.

“어찌하여 역참에 관리가 없는 것인가?”

“에구, 나리. 이곳에 계셨던 나리들께서는 모두 난이 터지고 곧장 피난을 떠나셨습니다요.”

“뭐라고?”

이곳 역참을 담당하던 관리는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놀라 일찌감치 말 몇 필을 빼돌려 자기 가족들과 달아났던 것이다.

그나마 남은 말들은 피난을 떠나지 않은 늙은 관노 덕에 굶지 않고 여태껏 무사할 수 있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지만 어쨌든 남아서 말을 돌본 늙은 관노 덕에 무사히 말을 얻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이 어찌······.”

“전쟁 통이니 어쩔 수 있겠습니까. 그보다 준비가 될 때까지 좀 쉬도록 하죠.”

상호의 말에 임충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참 앞 버드나무 아래에 있는 탁상에 앉아 쉬게 된 상호는 물집이 잡힌 발바닥을 어루만지며 혀를 찼다.

그러한 상호를 보던 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좀 봐도 되겠사옵니까.”

“뭘 어떻게 하려고?”

“소녀가 소싯적에 아버님을 따라다니면서 몸의 상태를 좋게 하는 비법들을 몇 가지 배운 것이 있사옵니다. 그중엔 발에 잡힌 물집을 낫게 하는 것도 있어서 한번 해보려 합니다.”

“그렇다면야······.”

조선 시대에서나 쓰이던 민간요법이라는 것이 썩 믿음직스럽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율의 조치를 받아들인 상호였다.

율은 등에 맨 행랑에서 바늘쌈을 꺼내 바늘로 물집을 터트리고 갖고 있던 약초를 으깨 즙을 상처에 발랐다.

‘이거 놀라운데.’

민간요법이라고 무시했는데 의외로 효과가 좋은 것을 본 상호는 내심 감탄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상호의 감사에 율은 살짝 볼을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 순진한 모습을 보니 상호는 사심 없이 살짝 웃었다.

“말의 준비가 끝났으니 바로 출발하지요.”

“알겠습니다.”

상호는 다시 출발하기 위해 벗었던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었다.

그런 다음에 임충과 관노가 고삐를 끌어 마구간 밖으로 나오는 말을 향해 가려고 했다.

“어?”

갑자기 상호는 멈칫하더니 뭔가에 집중하더니만 지면에서 납작 엎드리는 행동을 취했다.

귀를 지면 가까이에 대고 정신을 집중하니 지면의 울림이 전해져왔다.

지면의 울림을 통해 주변의 존재를 파악하는 기술 또한 헌터로 생활하면서 배운 잡기술 중 하나였다.

방금 전에 느낀 발밑의 진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는지 진동이 더더욱 가까이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수의 말발굽 소리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데 한둘이 아니군요.”

“그 소리가 정말 들리는 겁니까?”

“확실합니다. 그리고 소리가 퍼져오는 방향이 북쪽인 것을 봐선 아무래도 꼬리가 붙은 모양입니다.”

상호는 지면에서 얼굴을 떼면서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는 임충 또한 굳은 표정을 보였다.

“빨리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마침 준비도 끝난 참이었기에 바로 말에 올라타면 끝이었다.

임충은 당황하는 관노에게 이렇게 일렀다.

“자네는 즉시 안전한 곳에 숨어 있게.”

“네, 넷! 나리!”

상황을 인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위험하다고 느낀 것인지 관노는 부리나케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숨겼다.

두두두두.

그 사이에 꽤 가까이까지 온 것인지 멀지 않은 곳에서 이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한시도 지체할 새가 없다는 사실에 세 사람은 말을 재촉해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럇!”

어설프게나마 말을 조종해 굽이굽이 굴곡진 길을 따라 전력질주를 했다.

하지만 기마술에 그리 능숙하지 못한 상호와 율은 자꾸 뒤처졌고, 급기야 꼬리를 밟히게 되고 말았다.

“제길, 역시 왜군들이었나.”

등에 각각 깃발을 하나씩 꽂은 왜군들이 말을 타고 온다.

귀신 가면을 쓰고 온몸을 갑주로 두른 그들의 모습에 순간 상호의 온몸엔 전율이 흘렀다.

“거기 서라!”

“어서 쫓아라!”

대충 알아들을 수 있는 일본어를 외치며 무사들이 더욱 속도를 낸다.

기마술에 능숙한 자들인지 점차 양측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특히 가장 뒤처진 상호가 탄 말은 당장이라도 따라잡힐 것 같은 상황이었다.

‘젠장! 이러다 따라잡히겠어.’

필사적으로 말을 달려보지만 서투른 솜씨 탓인지 상호가 탄 말은 고개를 거칠게 좌우로 저으면서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

자꾸 뒤처지는 상호의 모습을 본 율이 무슨 결심을 한 것인지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그것을 본 상호가 놀라 외치기 전에 율이 먼저 손을 뻗으며 이렇게 외쳤다.

“저한테 어서 활과 화살을!”

“알았어.”

이유는 묻지 않고 상호는 안장 옆에 매달아둔 활 통에서 활과 화살을 집어 율에게 건넸다.

이것을 받아 든 율은 지체 없이 화살을 장전하고 시위를 당기더니 그대로 허리를 뒤로 숙여 말 등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는 그 상태에서 화살을 날려 제일 선두로 달려오던 왜군 무사를 거꾸러뜨렸다.

그것을 본 상호의 입에서 절로 이런 소리가 나왔다.

“허얼.”

비단 놀란 것은 상호뿐만 아니었다.

한 명이 화살에 맞고 낙마하자 뒤따르던 기마 무사들이 조금 속도를 줄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율은 말 등 위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세를 바로 잡고는 상호가 앞서 달리게끔 길을 열어주었다.

“어서 가세요!”

“미안하다.”

지금 율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모두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꼴사납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을 몰아 앞으로 달리는 상호였다.

율은 상호보다 뒤에서 달리면서 등자에 두 발을 의지한 채로 허리를 크게 비틀어 화살을 연거푸 쏘았다.

“큭!”

“화살을 조심해라!”

따로 방패로 챙기지 않은 기마 무사들은 거리를 더 좁히지 못했다.

하지만 좁은 산길에서 평탄한 들판에 접어들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옆으로 산개해라!”

“하잇!”

기마 무사들을 지휘하는 장수인 노부유키는 대형을 바꿀 것을 지시했다.

좁은 산길을 달리던 탓에 일렬로 달리던 기마 무사들이 횡으로 대열을 변경하여 넓게 퍼졌다.

이렇게 되면 화살로 견제하는 게 무의해지고 만다.

이 사실을 알고 율은 더 이상 화살을 쏘지 않고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들판을 무대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계속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옆으로 퍼져 달려오던 기마 무사 중 하나가 옆쪽에서 점차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상대의 접근을 본 상호는 말을 옆으로 몰았다.

그런데 반대편에서도 다른 기마 무사가 접근 중이었다.

“하아앗!”

“우윽!”

기마 무사가 든 창, 나기나타가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것을 보고 상호가 납작 말 등 위에 엎드렸다.

이에 언월도 형태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이때, 상호의 손이 갑자기 빠르게 움직였다.

“헤헷, 잡았다.”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창대를 붙잡은 상호는 그대로 한 손의 힘만으로 그것을 잡아끌었다.

이에 기마 무사는 비웃음을 귀신 가면 안쪽에서 흘리며 자신의 완력으로 오히려 상호를 잡아당겨 낙마시키려 했다.

쿠당탕!

그러나 결과는 상호의 압승이었다.

상호가 잡아당긴 힘 때문에 말과 함께 앞으로 처박힌 기마 무사는 뿌연 먼지 구름을 일으켰다.

그것을 뒤로하고 상호는 유유히 앞으로 나아갔다.

“말도 안 되는!”

“엄청난 괴력이다.”

예상치 못한 상호의 괴력을 본 기마 무사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노부유키는 호통 쳤다.

“뭣들 하는 것이냐! 그러고도 무사이냐!”

이 외침에 무사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무사들에겐 비겁함은 가장 큰 수치였기에 다들 각오를 다진 것이다.

곧 그들은 말 옆에 매어둔 활 통에서 활과 화살을 꺼내 들었다.

쉬잉!

“크윽!”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말에 납작 엎드린 상호는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하늘은 아직 그를 버리지 않은 모양이다.

“아군입니다!”

앞서 달리던 임충이 느닷없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그곳에선 다수의 조선군이 말을 타고 상호 일행과 그 뒤를 쫓는 왜군의 진격 방향을 마주하고 용감무쌍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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