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조선시대에 가다-18화 (18/127)

四장. 점령지를 돌파하다 (2)

상호 일행은 부지런하게 달려 꽤 많은 거리를 지났다.

그 결과, 하루 만에 경기도 지방에 입성할 수 있었다.

경기도 대부분은 이미 왜군 점령지가 되었기에 길을 지날 때 신중을 다해야 했다.

그런데 지나가면서 본 마을들의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약탈이나 학살은 없었던 모양이군.’

비교적 온전한 마을에서 주민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앞날을 모르기에 어두운 표정을 지을 뿐 딱히 해를 당한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임진왜란 초기에는 흔히 훗날 역사나 사극에 등장하는 끔찍한 살인과 약탈은 잘 없었다.

조선을 침공한 왜군은 오랫동안 전국 시대를 치러 왔고, 숱하게 영지를 뺏고 빼앗기는 일을 경험했다.

이러한 시류 속에서 백성들은 영주가 바뀌면 그에 순응하며 그 지배를 받아들이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이 시대의 왜인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어 점령한 조선 땅의 조선인들도 마땅히 그럴 것이라 여겼기에, 살육과 약탈을 피하고 ‘순왜’로서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점차 전쟁이 길어지고 자신들의 백성과 다르게 의병을 조직해 전쟁을 참가하는 조선인들을 상대하다 보니 방식이 안 좋은 쪽으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유왜란 당시엔 코 베기 같은 끔찍한 일도 서슴지 않게 되고 역사서에서 언급되는 살육과 약탈이 자행되고 만다.

어쨌든 순조롭게 남쪽으로 이동하던 상호 일행, 그런데 그 길 중간에 뜻하지 않은 난관을 마주치게 되었다.

“そこに待て!”

우거진 숲 때문에 미처 왜군들이 길을 중간에 막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그 바람에 그들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통나무를 깎아 만든 목책 뒤로 서 있던 왜군 중 한 명이 외친 일본어에 상호는 난색을 드러냈다.

‘하필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이야.’

평복을 입고 있다지만 무기를 소지하고 말을 타고 있는 지금 모습이 왜군들에겐 수상하게 보일 게 분명했다.

만약 거리가 있는 상태였다면 그대로 도망쳐 다른 길로 갔으면 됐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길목을 지키는 병사들인가.’

상호의 눈에 들어온 왜군은 약 십여 명 정도였다.

그중 조총을 든 자는 둘이고 나머지는 장창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도를 허리에 찬 사무라이도 한 명 있는데 보아하니 여기 있는 아시가루들을 통솔하는 하급 무사로 보였다.

일단 목책 앞에서 말을 멈추고 분위기를 살피는데 옆에서 임충이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이대로 저들의 지시에 따르게 되면 그대로 포박당해 군영까지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는 없죠.”

상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왜군들을 노려보았다.

이대로 왜군들에게 붙잡힐 수는 없는 일, 여차하며 강행돌파를 해야 했다.

“말에서 내려라!”

이쪽의 움직임을 수상하게 여겼는지 왜군들이 조총과 창을 겨눴다.

일본어를 아는 사람은 셋 중 아무도 없었지만 말의 억양이나 분위기를 통해 대충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상호와 임충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후 상호는 약간 뒤쪽에 있는 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끄덕.

율은 상호가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이해했다.

“일단 내가 하는 대로 따라주세요.”

이렇게 말한 상호는 왜군들이 볼 수 있도록 두 손을 들어보였다.

그것을 본 율과 임충도 일단 말에선 내리지 않고 두 손을 들었다.

이것을 본 하급 무사는 턱짓으로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창을 든 왜군 군졸 둘이 앞으로 다가왔다.

여차하면 창으로 찌를 듯 창끝을 상호와 임충에게 겨눈 그들의 눈은 두려움에 살짝 떨리고 있었다.

“······.”

상호와 임충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들이 오는 것을 그대로 지켜만 봤다.

“내려!”

짧은 일본어로 외치는 왜군 군졸.

상호는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 표정을 만들어내며 상대를 보았다.

그러자 왜군 병졸은 창끝으로 허리에 있는 검을 가리키며 다시 뭐라 뭐라 외쳤다.

대충 무기를 내놓으라는 뜻으로 해석한 상호는 임충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곧 두 사람은 순순히 무기를 내줄 것처럼 굴었다.

이를 보고 방심한 왜군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였다.

스르릉.

검집에서 검이 미끄러지듯 뽑혀졌다. 그렇게 꺼내진 검이 곧장 사람의 피를 보았다.

“커억.”

창졸간에 목이 베인 왜군이 공기 빠지는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명을 벤 임충은 곧장 재차 검을 휘둘러 상호 옆에 와있던 또 다른 한 명을 베어냈다.

“이 녀석들!”

목책 뒤에 있던 하급 무사가 그것을 보고 허리에 찬 왜도를 뽑아들었다.

이에 맞춰 다른 병졸들 역시 장창을 들고 목책 뒤에서 앞으로 달려 나오고 또 조총을 뒤에서 겨눴다.

이 때! 임충이 앞으로 말을 몰아 앞으로 나온 왜군 병졸들을 상대했다.

“히이잉!”

임충이 탄 말이 앞다리를 들어 가까이에 있는 왜군 병졸들을 위협했다.

이어 임충은 뒤를 살짝 돌아보면서 외쳤다.

“어서 가십시오!”

이 말에 상호는 힘껏 발로 말의 옆구리를 찼다.

그러자 상호가 탄 말은 곧장 앞으로 내달렸고 임충을 견제하느라 틈을 보였던 창을 든 왜군 군졸들은 혼비백산하여 길을 열었다.

“율! 이쪽이다!”

상호의 외침에 바로 율도 말을 몰아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두 사람은 목책 사이의 틈을 통해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이때, 조총의 발사 준비를 끝낸 두 명의 조총병이 총구를 겨눴다.

‘쏘게 둘까 보냐.’

상호는 옷섶 안쪽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투척에 용이하게 제작된 비도였다.

‘이 정도 거리라면!’

호신을 위해 챙겨온 이런저런 무기 중 하나인 비도는 솔직히 처음 써보는 무기였다.

하지만 상호는 고작 십 보 정도의 거리였기에 할 수 있다는 믿고 손가락 사이에 끼운 비도를 힘껏 투척했다.

“컥!”

상호가 던진 비도가 조총병의 가슴에 정확히 박혔다.

비도 자체는 썩 관통력이 있지 않았지만 상호의 힘이 담겼기에 갑옷을 뚫고 심장까지 꿰뚫을 수 있었다.

타앙!

총성이 울리는 동시에 상호의 상체가 말 위에서 흔들렸다.

그것을 본 율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나리!”

총격에 피습당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던 그 때.

상호는 다시 몸을 반듯이 세우며 재빠르게 다른 비도를 꺼내 방금 조총을 쏜 조총병에게로 던졌다.

“으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뒤로 날아가 쓰러지는 왜군을 보며 상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금 전, 상대가 조총을 격발하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의 사람의 반사 속도였다면 필경 날아온 총알을 피하지 못했으리라.

하나, 몬스터 코어를 통해 ‘민첩’ 능력을 강화시킨 상호는 총알을 보고 피한다는 초인적인 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빠르게 몸을 움직여 총탄의 궤도에서 몸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핫!”

뒤쪽에선 임충이 연신 말을 움직이면서 날아드는 창대를 검으로 베고 왜병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지금 상호와 율을 먼저 피신시키기 위해 힘써 싸우는 그를 생각해서라도 서둘러 여기를 탈출해야만 했다.

그런데 아직 넘어야 할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여길 지나게 하진 않겠다!”

하급 무사는 길 한복판에 서서 왜도를 옆으로 세워 들며 위협을 해왔다.

그것을 본 상호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그런다고 내가 쫄 줄 알고!’

피해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 기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면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었다.

“비켜!”

상호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을 테지만 그럼에도 무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상호의 눈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거지? 좋다 이거야!’

상호는 말의 옆구리를 힘껏 차서 급발진을 했다.

놀란 말이 속도를 내며 앞으로 달려왔지만 무사는 왜도의 손잡이를 꽉 쥐고 버텼다.

상호 역시 멈출 마음이 전혀 없다는 듯 말고삐를 꽉 잡고 말 등에 납작 몸을 숙였다.

불과 1,2초 만에 양측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대로라면 충돌은 피할 길이 없었다.

충돌을 코앞에 둔 순간, 무사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그리고 곧 무사는 체면도 없이 그대로 옆쪽으로 몸을 굴리고 말았다.

“꼴좋다!”

기세 싸움에서 이겼다는 기쁨에 한껏 소리치며 몸을 일으킨 상호는 뒤쪽을 보았다.

임충은 여전히 여럿의 왜병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었다.

과연 무사히 뒤쫓아 올 수 있을지 그 점이 염려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를 믿고 여기를 무사히 탈출하는 것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율, 가자!”

“네!”

상호가 앞서 달리자 그 뒤를 바짝 쫓아 율이 탄 말도 전력질주를 하였다.

이렇게 상호는 왜군의 손에 일단은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로 해서 결국 왜군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생각하면 시작부터 꽤 꼬인 셈이었다.

* * *

무사히 검문소를 돌파한 뒤로 꽤 먼 거리를 이동했다.

그러다보니 밤이 되었고 아무리 예정했던 길로 이동했다지만 자칫 뒤따라오는 임충과 못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남들 눈에 띄지 않는 한 언덕 위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기다리기로 했다.

언덕 길 한쪽에 있는 사당 앞에서 상호는 율과 함께 말을 계속 타느라 힘들었던 몸을 휴식하며 식사를 준비했다.

“영차.”

상호는 능숙하게 나뭇가지를 모으고 불을 피웠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던 율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응?”

“화섭자도 아니고 어떻게 이리 쉽게 불을 피우신 건가요?”

“아!”

상호는 율의 말에 실소를 지었다.

불을 피우기 위해, 미래에서 함께 딸려온 라이터를 썼는데 그것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이게 뭔지 가르쳐 주려고 상호가 입을 떼려던 순간,

다그닥다그닥.

적막한 주변의 분위기를 깨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상호는 활과 화살을 꺼내 임전 준비를 취했다. 하지만 걱정하던 일은 생기지 않았다.

곧 어둠 너머에서 말 위에 탄 임충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 무관님.”

“여기 계셨군요.”

다행히 말 위에 탄 임충은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일단 뒷일에 대해 궁금했던 상호는 말을 내리는 임충에게 먼저 그에 대한 이야기부터 물었다.

“왜군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베고 오는 길입니다.”

“전부 다 말입니까?”

적당히 싸우다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왜군 모두를 전부 벴다고 한다.

상호는 생각 이상으로 잘 싸운 임충의 실력에 감탄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앞날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검문소 하나를 전멸시켰으니 왜군이 가만있지 않겠군.’

단순히 돌파를 한 것과 길목을 지키는 병사들을 모두 벤 것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분명 대대적인 추격대가 따라붙을 게 틀림없었다.

임충 역시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턱대고 일을 벌인 것은 또 아니었다.

“생존자를 남겨두지 않았으니 우리에 대한 정보가 왜군에게 노출되지는 않았습니다.”

“그야 그렇지만 대대적으로 수색을 하고 또 수상한 자들을 모두 잡아들이는 식으로 나오면 다시 왜군과 부딪칠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렇다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서둘러 이 지방을 벗어나도록 하지요.”

“할 수 없군요.”

임충의 말대로 최대한 현재 있는 지역을 벗어나 되도록 왜군 점령지가 아닌 곳으로 빨리 가는 게 가장 상책이었다.

어설픈 승마술로 하루 종일 달리느라 아직도 엉덩이가 무지하게 쓰리고 피로 또한 컸지만 왜군과 또 다시 부딪치는 것보단 낫기에 상호 역시 바로 출발하는 것을 선택했다.

“율은 괜찮겠어?”

“나리들께서 정한 일에 어찌 저 같은 게 참견하겠나이까. 부디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알겠어.”

이렇게 결정이 내렸고 바로 신속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기껏 피웠던 모닥불을 끄고 세 사람은 곧 말을 타고 굽이진 길을 달렸다.

밤길이고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을 달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밤하늘이 맑고 달도 보름달에 가까운 상태였기에 밤눈이 점차 그 빛에 적응하면서 주변을 어느 정도 식별할 수 있어 달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이렇게 밤을 새며 왜군의 추적을 피해 달렸다. 그러나 안전한 곳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을 더 달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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