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장. 고블린을 격퇴하라 (4)
고블린 로드의 반격으로 남윤수가 쓰러지자 곁에 있었던 율은 다른 것을 볼 여지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고블린들이 가로막았다.
“비켜!”
율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고블린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버지가 쓰러진 것에 따른 분노 탓일까, 검의 움직임이 아까만 못했다.
그런 그녀를 상대로 고블린들은 정면에서 달려들지 않았다.
이 비열한 존재들은 율의 사각으로 몸을 계속 움직이면서 공격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에잇, 저러다 살해당하겠어.’
위태로운 율의 상황을 본 상호는 가만히 구경만 할 수 없었다.
일단 급한 대로 활을 잡고 시위를 당긴 그는 표적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제길, 멀다.”
지금까지 쐈던 것보다 더 먼 거리.
게다가 산 정상이라 그런지 바람도 꽤 강하게 불고 있었다.
활 쏘는 법만 간단히 배웠지 바람을 읽는 법 같은 것은 전혀 모르는 상호로선 명중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떨지 마라, 나. 할 수 있어!’
저격을 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스스로 자위하며 상호는 있는 힘껏 시위를 당겼다.
상호가 준 강한 힘 때문인지 시위는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에이잇!”
마침내 쏜 첫 발!
날아간 화살은 노린 곳과는 다른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담긴 위력만큼은 강력해 날아가는 것만으로도 가공할 파공음을 냈다.
“키익?”
소리에 놀란 고블린들이 율에 대해 잠시 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것을 본 율은 손아귀에 힘을 꽉 주며 검을 높게 들고 가장 가까이에 고블린을 노렸다.
쇄애액!
칼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고블린의 가슴에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율은 이어서 고블린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면서 한 점의 군더더기도 없는 검을 휘둘렀다.
마침내 율이 포위를 뚫고 빠져나왔고 그녀의 등 뒤로 일격을 당한 고블린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하아, 하아.”
아무리 무예를 어릴 적부터 갈고 닦았다고 하나, 아직은 성년이 되지 않은 소녀이다.
갑자기 너무 무리한 탓에 숨을 헐떡였지만 그래도 아비를 구하기 위해 율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저리 물러나!”
쓰러진 남윤수의 곁에 서 있는 고블린 로드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율.
그것을 본 고블린 로드는 비틀린 미소를 짓더니 여유롭게 율의 검을 자신이 든 월도로 막아냈다.
“하앗!”
율은 검을 떼면서 옆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인 다음에 옆구리를 노리고 검을 재차 휘둘렀다.
하지만 고블린 로드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면서 월도도 날아든 검을 받아쳐냈다.
“으윽!”
강한 힘에 튕겨진 검을 하마터면 놓칠 뻔 했던 율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멀찍이 뒤로 한 걸음 뛴 다음에 얼얼한 손으로 애써 검을 꽉 부여잡고 자세를 다시 잡았다.
나름 호각지세로 검을 주고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율이 열세인 것은 명백해보였다.
이러한 것을 잘 아는 상호는 그녀를 돕기 위해 활을 쏘는 것을 포기하고 공터로 달려갔다.
“흩어져서 싸우면 우리가 불리합니다. 다친 자들은 뒤로 빠지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제 곁으로!”
상호의 외침에 사람들은 반응을 보였다.
뒤늦게야 상호가 하는 말에 따라주었지만 이미 피해는 컸다.
사망자 5, 부상자 17.
특히 남윤수는 복부에 자상을 깊게 입어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한편, 남은 고블린은 이제 열댓 마리 정도였다.
‘멋대로 폭주해서 날뛰어 졸개라도 많이 잡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사실 마음 같아서는 제멋대로 굴어버린 자들에게 욕이라도 시원하게 한바탕 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부상자를 뒤로 빼고 전열을 가다듬었으니 고블린과의 싸움에 집중해야 했다.
상호는 지금 적진 한가운데에 있는 율과 남윤수를 구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상호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뒤로 빠지지 않은 임충에게 이렇게 말을 전했다.
“저 두 사람은 제가 구하러 갑니다. 임 무관은 사람들을 데리고 저것들을 정리해주십쇼.”
“알았네.”
그래도 본인의 잘못을 알긴 아는지 상호의 말에 임충은 말에 토를 달지는 않고 대답했다.
이렇게 뒤를 맡기고 상호는 곧장 고블린 로드와 율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지금 상호의 눈엔 검을 주고받는 둘이 보였다.
아까 전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게 되어 율이 거의 궁지에 몰려있는 상태였다.
상호의 시선은 곧 고블린 로드에 고정되었다.
‘내가 로드 급하고 직접 싸운 적이 몇 번이나 있긴 하지만 단독으로 덤빈 것은 처음이군.’
보통 로드 정도 되는 몬스터를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초인적인 힘을 가진 특급 헌터 정도뿐이다.
그렇기에 대부분 헌터들끼리 협공해서 로드를 공략한다.
게다가 상호가 로드를 상대할 때는 늘 적당히 거리를 두고 총으로 로드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었다.
그렇기에 솔직히 말하자면 총도 없이 로드를 상대로 일대일을 한다는 게 두렵다고 생각하는 상호였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율을 보고 금방 사라졌다.
‘나보다 어린 여자애도 저렇게 싸우는데 명색이 헌터라는 놈이 겁을 내냐.’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며 상호는 율이 재차 반격을 하는 것을 보며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이야아압!”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율이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러 고블린 로드의 급소를 노린다.
대대로 이어온 가문 비전의 검술에 따라 율의 검은 마치 한 마리의 제비처럼 날쌔고 또 날카로웠다. 하나, 고블린 로드의 철벽같은 수비를 뚫지는 못했다.
“키키킥!”
고블린 로드에게서 비웃는 웃음이 들리더니 곧 율의 팔 쪽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방어를 하다가 돌연 반격을 가한 것이다.
“흐으윽.”
하필 검을 쥔 오른쪽 팔에 자상을 입은 율은 신음을 터트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을 본 고블린 로드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거리를 재차 좁히며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검을 크게 휘둘러 댔다.
챙! 챙!
율이 가까스로 날아드는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녀의 체격이 고블린 로드에 비해 너무 작았다. 또 지금 검을 쥔 팔에 상처를 입은 그녀는 겨우 막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한번 공격을 받아낼 때마다 자세가 크게 무너져 위태로워졌다.
위기에 처한 율!
바로 이 때, 상호가 그녀와 고블린 로드 사이에 끼어들며 소리쳤다.
“어디 나도 한 번 상대해보시지!”
고블린 로드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먼저 상호는 육모 방망이를 세게 휘둘러 앞으로 내밀어진 월도를 쳐냈다.
이로 인해 고블린 로드는 잠시 뒷걸음질 치며 자세를 추슬러야만 했다.
이 틈에 상호는 자신의 뒤에 선 율에게 말을 전했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지?”
“저는···괜찮사와요. 하지만 아버님이······.”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율은 저쪽에 쓰러진 남윤수를 보았다.
지금 비켜서라고 해도 아비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절대 비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상호로선 검술이 빼어난 율이 함께 싸워주는 편이 더 승산이 있었기에 이처럼 율에게 말했다.
“저놈은 나 혼자서는 쓰러뜨리기 힘들거든. 내가 앞에서 놈의 주의를 분산시킬 테니 네가 기회를 봐 끝장을 내는 거다. 내 말 알아듣겠지?”
“······넵.”
상호의 말에 율은 굳은 결의를 눈빛으로 나타내며 짧게 답했다.
서로 의견 조율이 끝나고 눈빛을 교환한 직후, 두 사람이 고블린 로드를 향해 몸을 동시에 날렸다.
고블린 로드는 흉악스런 시선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위협적이라고 생각했던 존재인 상호를 먼저 상대하였다.
“역시 나를 찍은 건가.”
상호는 고블린 로드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고블린은 강자와 약자를 파악하는데 선수다.
자신보다 약자라면 서슴없이 앞에서 달려들어 잔혹하게 짓밟고 유린하기를 거리낌 없이 하지만 상대가 강자라면 일단 피하고 보고 함정이나 매복 같은 약은 수를 써서 위험을 피하면서 공격하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정면에서 싸울 수밖에 없고 상대가 약자와 강자가 섞여 있다면 우선적으로 위험이 되는 강자부터 제거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전혀 놀라지 않고 대응을 기민하게 해냈다.
“선수 필승!”
이렇게 외치며 상호는 고블린 로드가 월도를 휘두르기 전에 먼저 공격했다.
상호가 오른손에 든 육모 방망이를 위에서 아래로 있는 힘껏 휘두르자 고블린 로드는 잽싸게 그것을 피했다.
이와 동시에 아래에서 용수철처럼 뛰어오르며 월도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서컥.
“쳇!”
상호는 윗부분이 잘려 나간 육모 방망이를 보고는 손에 쥔 것을 던지고 뒤로 몸을 날렸다.
그것을 본 고블린 로드는 잔혹한 미소를 보이며 거리를 재차 좁힌 다음에 다시 월도를 휘둘렀다.
‘제길!’
상호는 반응을 했지만 그보다 월도가 날아드는 게 더 빨랐다.
월도가 상호의 옆구리를 베기 직전, 율이 아슬아슬하게 검을 끼워 넣어 칼의 궤적을 바꿔내는 데 성공했다.
‘살, 살았다.’
위기에서 구함을 받은 상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고블린 로드를 노려보았다.
율과 힘 싸움을 하는 놈에게서 허점이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이리 소리치며 상호는 허리 뒤쪽에 따로 챙겨 놓은 또 하나의 육모 방망이를 꺼내 냅다 고블린 로드의 관자놀이를 힘껏 쳤다.
“카아악!”
큰 충격에 고블린 로드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젖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율이 있는 힘껏 고블린 로드의 가슴에 자신의 아비가 당했던 것처럼 검을 깊숙이 박아 넣는 데 성공했다.
“야아아아앗!”
율은 온몸의 힘을 쏟아넣으며 고블린 로드의 몸 깊숙이 검을 찔렀다.
그러자 고블린 로드가 왈칵 피를 토해내었다.
“캬, 카아악.”
놈은 놀랍게도 다 죽어가면서도 율을 치기 위해 칼을 들려고 했다.
율은 그것을 보고 피하는 대신 검 손잡이를 잡고 더욱 앞으로 힘을 주었다.
“끄르륵.”
피거품을 물면서도 머리 위로 칼을 치켜든 고블린 로드의 눈동자엔 살의가 가득했다.
“어딜!”
상호가 재빨리 몽둥이를 들어 고블린 로드의 안면을 내려쳤다.
퍼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코뼈 부러지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상호는 조금도 봐줄 마음 없이 연달아 몽둥이질을 한 다음 이어서 발로 막 율의 손에서 떠난 검의 손잡이 끝을 강하게 찼다.
상호의 발길질에 고블린 로드를 꿴 검은 그대로 등을 빠져나왔고, 마침 뒤편에 있던 절벽에 박히게 되었다.
“칵! 꾸륵······.”
졸지에 곤충 표본과 같은 신세가 된 고블린 로드는 마지막 남은 기력으로 손을 위로 들었지만, 그것도 곧 한계에 도달했는지 손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헉, 헉.”
고블린 로드의 죽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상호는 긴장을 겨우 풀 수 있었다.
다행히 고블린 로드를 상대하는 사이에 다른 고블린들을 임충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정리했고, 더 이상 위험 요소는 없어 보였다.
“아버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율의 비탄에 잠긴 목소리가 상호의 귓가에 들려왔다.
상호는 조심스레 율이 주저앉은 자리로 향했다.
“아버님, 돌아가시면 안 돼요.”
눈물을 한껏 흘리며 율은 쓰러져 미동도 않는 남윤수의 붉게 물든 옷 위를 자신의 손으로 막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심각한 상처.
현대라면 바로 응급조치를 취하고 큰 병원에 데려가면 살릴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대에선 자상을 치료하는 기술도 부족할뿐더러 제대로 된 약품도 없기에 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적어도 힐러만 있었더라면······.’
회복 스킬을 지닌 힐러만 있다면 어떻게든 목숨을 구명할 수 있을 것이다.
상호는 불현듯 어떤 생각을 하더니 황급히 고블린 로드의 시체 쪽으로 달려갔다.
“제발, 있어라.”
상호는 소지하고 있던 나이프로 고블린 로드의 가슴을 쨌다.
피가 분출되고 끔찍할 꼴을 보면서도 상호의 칼질은 멈출 줄 몰랐다.
“시방 뭐하는 겨.”
“흐미.”
상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은 그를 피해 슬금슬금 물러났다.
“있다.”
드디어 시체에서 몬스터 코어의 위치를 발견해 낸 상호는 단검을 놀려 살점 안에서 빛나는 구슬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