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장. 광해군을 구하다 (5)
방 안으로 들어온 율은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앳된 처녀였다.
댕기머리에 고운 얼굴을 지닌 그녀는 보통 조선 시대의 여성이 입는 저고리에 치마가 아닌 남성, 그것도 무사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고 허리에 검, 그리고 등에는 활과 화살이 담긴 통을 지니고 있었다.
남녀가 유별하다고 여기던 조선 시대에 색다른 복장을 한 것을 신기해하는 상호를 향해 남윤수가 말했다.
“제 하나뿐인 여식입니다. 달리 사내자식을 두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어릴 적부터 대를 잇기 위해 무예를 가르쳤더니 이렇게 사내처럼 자랐지요.”
“아, 네.”
여성의 몸으로 무예를 익혔다는 것도 상당한 의외였다.
아무튼 현대의 여성들과는 느낌이 색다른 율의 자태에 상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쪽을 곁눈질로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율이 착석하자 남윤수는 그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일에 제 여식도 동행시켜도 괜찮겠습니까?”
“저 처자를 말인가?”
임충은 썩 마땅치 않아하며 대꾸했다.
그러자 남윤수는 율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록 사내놈이 아니라 여식이긴 해도 어릴 적부터 무예를 가르쳤기에 장정 하나 몫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나이도 어린 여인을 위험한 전장에 데리고 가겠는가.”
임충은 여인인 율을 싸움터까지 데려간다는 것을 마뜩치 않아 했다.
그런 그와 반대로 상호는 내심 이 상황을 반겼다.
‘전력에 도움이 된다면 여자라도 상관없지.’
고리타분한 사고를 가진 조선 시대 사람이 아닌 현대인의 사고를 가진 상호로선 여성이라고 해서 차별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무예를 갈고닦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임충의 생각은 상호와는 달랐다.
“하물며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오랑캐나 맹수 같은 게 아닌 한 번도 본 적 없는 흉악한 괴물을 상대해야만 하네. 아녀자가 끼어들 일이 아니란 말일세.”
“······.”
임충의 말에 율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표정을 알 수 없지만 지금 들은 말에 상당히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게 분명했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결국 상호가 나서게 되었다.
“이 어려운 시국에 아녀자라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리고 여기 이 분의 말대로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흐음, 그래도······.”
“그리고 당사자 본인의 뜻도 제대로 묻지 않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똑바로 응시하며 상호가 이리 말하니 임충은 자신의 생각을 마냥 밀어붙일 수 없었다.
상호는 율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임 무관 말대로 우리가 싸워야 될 적은 인간이 아닌 흉악한 존재야. 싸움이 시작되면 그쪽을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몸을 지키고 적을 물리쳐야만 하지.”
“······.”
“딱히 여성이라고 얕잡아 볼 마음은 없지만 각오가 된 자가 아니면 데리고 가기가 곤란한 게 사실이야. 그러니 지금 이 자리서 그 각오를 확인시켜줬으면 한다.”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지금까지 강해지기 위해 부단히 수련했사옵니다. 그리고 이 무예를 나라를 위해 바치기 위해 아버님과 함께 이 땅까지 왔지요. 그런 제게 각오를 물으신다면 얼마든지 답해드리겠사옵니다.”
공손한 어조로 율은 강단 있게 자신의 생각을 남김없이 말하였다.
굳이 각오를 들을 것도 없이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제가 봤을 때, 여기 있는 율은 훌륭한 무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그녀를 배제하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후, 알겠네. 자네 뜻에 따르도록 하지.”
결국 임충은 상호의 말에 따라 율을 지원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일이 잘 풀리고 두 사람에게 있다가 출발할 때까지 준비를 하라고 이른 후, 다른 사람을 더 모으고자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울타리를 벗어나려던 상호를 율이 불렀다.
“저기, 나리.”
“응? 뭐 할 말이 더 남은 건가?”
상호가 묻자 갑자기 율은 상호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보잘 것 없는 것을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코 전투에서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응, 그래. 앞으로 함께 잘해보자고.”
상호는 율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이 시대에 와서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짓는 미소였다.
이렇게 남윤수, 남율 부녀의 협력을 얻고, 이어서 싸울 수 있는 백성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임충이 아는 여러 사람을 만나고 설득을 했다.
그 노력을 통해 현직 호랑이 사냥꾼과 전직 무관 출신의 양반, 강원도 산골에서 농사일만 했지만 이번 전란 소식을 듣고 분연히 나선 삼 형제 등 37명의 장정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더 많은 인원을 모으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예상보다 적은 숫자에 임충은 우려하며 말했다.
“검 한번 잡아보지 않은 자들이 태반이네. 겨우 이 정도 숫자의 지원군으로 토벌을 성공시킬 수 있겠나?”
“좀 더 인원이 많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크게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상호는 숫자가 적은 것에 대해 괘념치 않아 했다.
애당초 지금 모은 사람들이 고블린을 상대로 제대로 싸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미지의 생물인 고블린을 두고 바로 도망만 안 가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바였다.
‘내가 이들을 얼마나 제대로 통솔하는가가 토벌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게 된다.’
고블린의 행동 방식을 유일하게 잘 아는 사람은 지금으로선 상호뿐이다.
그런 만큼 상호가 몬스터 레이드의 핵심 보직이라 할 수 있는 ‘커맨더(Commander)’를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까지 만년 이류 헌터로 있었기에 커맨더를 해본 적이 없기에 부담감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임충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고 또한 이 역할을 제대로 해야만 원래 있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마음을 다잡을 따름이었다.
아무튼 인원은 얼추 모았으니 다음 할 일을 해야 했다.
“이제 무기를 확보하면 되겠군요.”
“그럼 무기를 모아서 출발하죠.”
“이미 이쪽 군수에게는 세자 저하께서 쓰신 친필을 전했으니 무기고에서 무기를 가져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네.”
미리 관청에다 임충이 이야기를 잘 해둔 덕에 별 어려움 없이 관청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낼 수 있었다.
사람들을 대동하고 무기고의 창고에 도착한 상호는 힘껏 좌우로 문을 잡아 당겨 열었다.
“켁.”
창고의 문을 연 상호는 자신도 모르게 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최신식 군용 무기와 특수 합금으로 제작한 고강도의 병장기를 주무기로 삼았던 상호의 눈에 창고 안에 있는 것들은 그저 조잡하고 형편없는 무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 무기들로 싸워야 하다니.’
어떻게 보면 고블린, 오크가 쓰는 창병기가 더 나아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한숨부터 나오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상호는 이중에 괜찮은 무기가 있는지 살폈다.
“응? 이건 조총이잖아.”
전장에서 노획되어 이곳까지 올라온 조총 몇 자루가 보인다.
그나마 이 시대에선 최신 무기이라 할 수 있지만 상호도 그렇고 모인 자 중에 이 무기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다시 눈길을 돌리던 상호의 눈에 쇠 통 비슷한 무기가 들어왔다.
“이건······.”
“분조가 이동해 올 때 가져온 총통들이네.”
“이게 총통입니까.”
대포로서의 총통만 있는 줄 알았는데 개인 화기처럼 들 수 있는 총통도 있다는 것을 여기서 처음 알았다.
아주 구식의 핸드 캐논이지만 총통의 화력은 몬스터를 상대로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조선 초중기의 개인 화기였던 승자총통을 상호는 사람들에게 챙길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또 하나 괜찮은 물건을 발굴해 냈다.
“이야, 이것도 있었네.”
조선 시대의 지뢰, 수류탄이라 할 수 있는 비격진천뢰가 바로 상호가 찾은 물건이다.
다양한 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이 병기가 몬스터 토벌에 매우 유효하게 쓰이리라 판단한 상호는 있는 수량을 모두 챙겼다.
“몬······ 아니, 요괴들의 힘은 겉보기보다 강합니다. 그런 놈들의 공격을 버티려면 튼튼한 방어구는 필수입니다.”
상호는 그리 말하곤 전원에게 두정갑을 입히기를 주장했다.
무관도 아닌 일개 의병에게 두정갑을 입히는 일로 임충이 반대를 하였지만, 상호는 광해군을 등에 업고 이 일을 끝까지 관철시켰다.
여기에 우마차 한 대에 식량, 그리고 예비 무기까지 잔뜩 챙기는 것을 끝으로 토벌대의 준비는 끝이 났다.
물자가 준비되는 동안에 상호는 따라가기를 결정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들이 아직 모르는 적, 고블린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에 상대할 요괴는 고블린이라고 합니다.”
“고블린?”
“뭐 그런 희한한 이름을 가졌대?”
“그런 도깨비가 실제로 있단 말이제?”
상호의 말에 보인 사람들의 반응은 다 제각각이었다.
하기야 고블린이라는 이름 자체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겐 충분히 낯설 것이었다.
상호는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이 고블린이라는 요괴는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요괴들 중에서 가장 약한 놈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얕잡아 볼 상대도 아니죠.”
고블린이 가지는 습성부터 세세하게 설명을 해주자니 이야기도 길고 또 이해시키기도 어려울 것 같아 딱 필요한 정보만 사람들에게 심어주기로 했다.
“체격이 열 살 정도의 어린 아이에 불과하지만 의외로 완력이 강하니 행여나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생각은 하지 말고 체격 차이로 제압해야 합니다. 그리 하면 일대일로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을 겁니다.”
“······.”
상호의 말에 좌중에 모인 모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실물을 보지 않았으니 이러한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보며 상호는 한숨을 내쉬곤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두 마리 이상을 상대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든 도망치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서 그 고블린인가 뭐 시긴가를 죄다 잡아버리는 되는 겁니까?”
한 명이 이렇게 물어왔기에 상호는 앞으로 하게 될 작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우선 세자 저하의 토벌대와 합류한 다음, 다시 소재가 파악된 고블린들의 거점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고블린들의 우두머리를 쓰러뜨리고 전이문을 붕괴시킨다면 더 이상 그곳엔 같은 요괴가 나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에 모인 사람들은 자기네끼리 쑥덕거렸다.
이들이 잡담하는 것을 들어보면 작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한 자는 이들 중 몇 명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사실에 상호는 한숨을 쉬면서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사치겠지. 어차피 실전을 통해 익히게 해야 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엔 이번 전투만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몬스터와의 싸움에 함께 하게 될 이들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이번 토벌에서 살아남게 만들어야 했다.
하여 상호는 아주 열성적으로 설명에 임했다.
그렇지만 단 하나,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몬스터 코어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중에는 어쩔 수 없겠지만 최대한 이것은 비밀로 해두는 게 좋겠지.’
몬스터 코어가 가진 특수한 힘은 현재 조선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
그런 중대한 정보를 아무렇게나 흘릴 수는 없는 일이기에 비밀로 했다.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본래 있던 시간대에선 치열한 경쟁 탓에 거의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지금 시대는 다르지.’
몬스터를 토벌하면 토벌할수록 그만큼 헌터로서 강해질 수 있다.
이런 기회를 마다할 만큼 상호는 바보가 아니었다.
언젠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비밀로 공표하긴 해야겠지만 그 전까지 자신과 그리고 믿을 수 있고 앞으로 도움이 될 만한 인원에 한해서만 이 정보를 공유하기로 일찌감치 마음먹은 상호였다.
“이제 충분하지 않나? 세자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알겠습니다.”
사람을 모으고 물자를 모으느라 이천 땅에 돌아와서 잠시도 쉬지 못했지만 지금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광해군을 생각해 곧장 출발하기로 했다.
상호는 이번에는 말에 타지 않고 우마차에 탑승했다.
‘지금 동안이라도 눈 좀 붙여야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쉬지 않고 바삐 움직였다.
그 바람에 완전 녹초가 된 심신을 회복코자 상호는 좁고 불편한 우마차에서도 용케 곧장 꿈나라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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