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조선시대에 가다-4화 (4/127)

一장. 과거로 온 헌터 (3)

바로 눈앞에서 수십 명이 넘는 인간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그러했지만 상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최대한 고블린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고블린들이 만찬을 즐기고 다시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갈 때까지 상호는 바위 뒤에 숨어 죽은 것처럼 있었다.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흐르고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판단한 상호가 숨어 있던 바위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

아래로 내려와 살육의 현장에 상호는 묵묵히 반으로 부러져 떨어져 있는 왜도의 자루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죽임을 당한 사람들.

도대체 이들의 정체가 뭔지 알고 싶지만 이래서는 알 길이 없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어디에 와있는 거지?”

시대를 거꾸로 왔다고 생각하기엔 방금 전에 나타난 고블린의 존재가 납득이 안 간다.

분명 몬스터가 최초로 나타난 것은 21세기였기 때문이다.

상호는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기에 한참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싶지만···지금은 그럴 수도 없을 것 같네.”

조금 있으면 밤이 찾아올 것이었다.

고블린이나 다른 몬스터가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이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시신을 놔두고 가는 것이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가야만 했다.

상호는 마지막으로 같은 인간으로서 죽은 자들의 넋을 위로해 주는 묵념을 올리고 길을 서둘렀다.

그리했지만 마을은 도통 나타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밤이 찾아왔다.

달빛에 의지해 더듬더듬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리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노숙을 피할 수 없나.”

한숨을 쉬며 상호는 능숙하게 움푹 파여진 땅을 찾은 후, 나무들이 무성한 곳에 쌓인 옛 낙엽 같은 것들을 모아 그곳에 채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몸을 덮은 오래된 낙엽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그 정도는 헌터 생활을 하면서 온갖 일을 경험한 상호에겐 큰 괴로움은 아니었다.

다만 언제 뭐가 가까이 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내야만 했다.

밤이 가고 다시 해가 뜰 때쯤, 드디어 상호는 사람이 사는 곳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 하하.”

상호의 입에서 허탈해하는 웃음이 자연스레 새어나왔다.

지금 보이는 마을의 풍경.

짚으로 만든 지붕이 있는 초가집들이 줄지어 있고, 저 멀리엔 기와로 지붕을 쌓은 기와집도 보인다.

민속촌에나 가야지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곳이 민속촌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호는 순간 다리의 힘이 풀려 마을 어귀에 자리한 ‘천하대장군’ 정승 옆에까지 비틀거리며 가서 손으로 정승을 짚고 겨우 몸을 지탱했다.

“미치겠네. 이게 꿈이 아니면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조선 시대라는 거잖아.”

타입 슬립.

현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공상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다.

옛날에 봤던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가 되던 그런 SF적인 일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상호의 정신은 혼란스러웠다.

“진짜 내가 과거로 날아왔다는 건가.”

헌터가 되기 전의 상호였다면 눈앞의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년 간 다른 세계에서 공상 속에서나 나오던 몬스터가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는 타임 슬립보다 더한 일을 직접 경험했던 터라 금방 정신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냉정해지자, 나. 일단은 이런 상황이 된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거다.”

이계화된 영역이 붕괴하기 직전에 탈출하던 상황을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지금 같은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기는 했다.

분명 그 때, 상호는 두 차원의 경계를 넘기는 넘었다.

하지만 붕괴되던 시공의 틈을 넘을 때, 어떤 이유로 시간의 흐름이 뒤틀렸고 그 때문에 과거로 날아오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는 대체 언제지?”

그것을 알게 해주는 단서는 있다.

바로 어제 우연히 목격했던 군대가 바로 그 단서였다.

“조총을 쓰는 일본의 군대, 그리고 이곳 마을의 풍경··· 조합해보면 답은 하나뿐이군.”

지금 시대는 조선 시대, 그것도 임진왜란이 벌어졌던 시간대일 게 분명했다.

상호가 살던 시대에서부터 무려 수백 년 전이나 과거인 시대였다.

“농담이 아니라고. 하필이면 이런 시대에 내가 오게 된 것이냐고.”

까마득한 과거에 왔다는 사실에 상호는 그저 울고 싶었다.

과연 원래 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나, 그보다 상호가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시대가 진짜 과거라면 한다면 어째서 고블린이 있는 거지?”

미래에서 최초로 나타났던 고블린이 임진왜란이 벌어졌던 과거의 시간대에 나타났다는 것은 상호를 혼란케 했다.

“몬스터가 사실 과거에 한 번 나타난 적이 있었던 걸까?”

이렇게 말은 했지만 상호 본인도 이게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상호가 살던 미래는 크게 달라도 달랐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뭔가를 막 떠올리는 상호.

그런데 바로 그 때!

꼬르르륵.

심각한 생각을 하는 와중인데도 배 속의 시계가 매정하게 허기를 알려온다.

심각하게 생각하였던 상호는 배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면 이계화된 지역에 들어간 작전 수행한 이틀, 그리고 어제까지 해서 내리 삼일을 아무것도 못 먹은 상태였다.

“생각도 좋지만 일단 배부터 채우자. 일단 저 마을에 가면 뭔가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겠지.”

이리 말하고 상호는 서둘러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당장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할 지에 대한 걱정은 꼬박 무척 굶은 그에겐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근데 마을 어귀에 당도해 보니 뭔가 마을 꼴이 이상했다.

“뭐야, 이 휑한 분위기는?”

창호지가 발라진 문짝은 활짝 열려 있고 가재도구가 난잡하게 마당에 내동댕이쳐져 있다.

집집마다 살펴봤지만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들 마을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것 같았다.

“전쟁 때문에 피난 갔나.”

그러고 보면 이 마을로 오는 길에서 왜군이 만나지 않았던가.

왜군이 온다는 소식에 다들 피난길에 오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사실이 상호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먹을 거, 아무거나 좋으니 뭐 좀 남아 있어라.”

상호는 빈 집을 돌아다니며 먹을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피난을 떠날 때 죄다 챙겨갔는지 좀처럼 먹을 것을 찾지 못하다가 간신히 독에 묻어둔 백김치, 그리고 콩이 약간 든 자루를 찾아낼 수 있었다.

“끄응! 이거라도 찾은 게 어디냐.”

사치를 부릴 만큼 여유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또 헌터 일을 하다보면 식량이 없어 나무껍질을 씹거나 벌레를 잡아먹는 극한의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던 터였다.

상호는 장작을 모아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그 안에다 콩을 넣어 구워먹고, 고춧가루라곤 일절 묻지 않은 김치는 눈 딱 감고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그렇게 겨우 배를 채우고 난 후 우물가에서 표주박으로 물을 길어 마시고 나니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후우! 살 것 같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공복을 해결한 상호는 당장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해보았다.

“돌아가는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하긴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시간 이동이다.

돌아갈 방법이 있기는 한 건지 모든 게 막막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원래 역사와 다르게 몬스터가 나타난 것도 마음에 쓰였다.

“돌아갈 방법을 찾기 전에 먼저 이곳에서 살아갈 방법부터 찾는 게 먼저다.”

돌아갈 방법을 당장 찾는다는 보장이 없는 만큼, 전쟁이 터지고 몬스터도 나타나는 작금의 상황에서 제 몸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상호는 강하게 믿었다.

“적어도 무기라도 제대로 챙겨놨으면 좋을 텐데, 하아! 믿을 수 있는 것은 이 몸뚱이뿐인가.”

겉보기에는 조금 운동한 수준의 몸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상호의 육체는 일반인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헌터라는 직업이 생겨나게 만든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몬스터 코어>.

색깔에 따라 저마다 인간에게 특수한 힘을 부여하는 이것의 혜택을 상호도 받았다.

우선 인간의 능력 그 자체를 올려주는 <붉은색 코어>를 통해 근력, 민첩성, 체력, 정신력을 강화했다.

코어 한 개당 이 네 가지의 능력 중 하나를 일정 수준만큼 끌어올릴 수 있었다.

보통 평범한 인간을 기준으로 3단계까지가 인간의 육체가 본래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는 수준이고, 그 이상이 되면 가히 ‘초인’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상호는 근력과 민첩성은 3단계까지, 체력을 2단계까지 총 여덟 번에 걸쳐 자신의 능력을 강화했다.

그 덕에 역도 선수 수준의 완련을 얻었고 100m 단거리 선수 수준의 달리기 실력을 가졌다.

거기에 40km 완전 군장 행군을 해도 끄떡없는 체력도 가졌다.

이 정도만 되어도 이미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 이것도 헌터들 사이에서 중간 수준에 불과했다.

3단계 이상의 능력, 가령 8,9단계의 능력을 가진 헌터들은 그야말로 초인으로 빌딩 사이를 간단히 뛰어넘고 떨어지는 비행기를 멈춰 세울 만큼 대단한 힘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몬스터 코어의 능력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붉은색 코어>와 색깔이 틀린 <푸른색 코어>의 경우엔 인간이 낼 수 있는 무수한 잠재 능력을 깨우는 힘이 있었다.

‘스킬’이라 불리는 이 힘은 헌터라면 누구나 탐내는 것이었다.

다만 이 <푸른색 코어>는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헌터 사이에서도 경쟁이 치열했고 또 값도 비싸 수년 간 헌터를 해온 상호조차 고작 하나의 스킬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방심할 수는 없지. 재수 없게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는 일이고, 뭣보다 고블린이나 다른 몬스터를 상대해야 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별로 겁나지 않았다.

하지만 몬스터는 예외이다.

헌터는 결코 혼자서 몬스터를 사냥하지 않는다. 설령 가장 약한 몬스터라 할 수 있는 고블린을 상대할 때도 그렇다.

이것은 모든 헌터가 제1원칙으로 삼는 절대적인 기준이다. 그만큼 몬스터는 위협적인 존재란 얘기다.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는 게 좋겠다.”

상호는 마을을 떠나기 전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이거라도 쓸 수밖에.”

상호가 고른 것은 풀 벨 때에 쓰는 낫이었다.

무기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일단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 정보를 더 얻는 게 좋겠지.”

지금이 대충 임진왜란 시기라고 추측만 했을 뿐, 정확한 시간대를 알지 못한다.

먼저 이 시간대가 정확하게 몇 년인지 아는 것이 다음 행동을 정하는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리고 몬스터가 나타나게 된 일에 대한 정보도 최대한 모아야 한다.”

아까는 배가 고파 생각을 중단했었지만 상호는 몬스터가 이 시대에 출현한 것과 이 시대로 상호가 오게 된 것이 단순히 우연으로 겹쳐진 게 아니라는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이쪽으로 넘어올 때 생긴 시공의 뒤틀림이 지금의 사태를 만들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것이라면 작금의 상황이 대부분 설명이 된다.

“나 하나 때문에 역사가 바뀌게 되었다는 말인가.”

21세기가 되어서야 출현했던 몬스터들은 수백 년이나 앞선 조선 시대에 나타나게 된 일이 어떤 심각한 결과를 부를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의 상호는 이러한 것을 나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휴우, 내 인생에 이런 시련이 있을 줄이야. 어쩌면 단순히 내가 돌아가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암튼 최대한 빨리 정보를 모으고 대책을 세우도록 해야지.”

내심 각오를 하면서 상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바로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떠나기 전에 앞서 고쳐야 할 점이 있었다.

“흐음, 이런 복장으로 다니면 너무 사람들의 눈에 띌 텐데.”

지금 상호는 군복 차림이었다.

이런 이질적인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변장하도록 할까.”

조선 시대에 맞게끔 옷을 갈아입기로 한 상호는 민가를 뒤져 자신이 입을 만한 옷을 찾았다.

한 집에서 어떤 남정네가 입었을 옷을 발견했고 그것을 갈아입었다. 그 후에 입고 있던 군복과 군화를 벗어 보자기에 싸서 따로 챙겼다.

그리고 짚신을 신고 벙거지라 불리는 모자로 짧은 머리를 감췄다.

“켁! 이게 내 모습인가.”

상호는 우물의 수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는 어색함을 느꼈다.

딱 사극에 나오는 전형적인 조선 시대의 평민이 된 느낌이었다.

“이제 떠날 수 있겠군. 아무래도 전쟁이 피해야 하니깐 북쪽으로 가야 하겠지?”

지금이 7년이나 되는 임진왜란 시기 중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북으로 가면 왜군과 만나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과거로 온 뒤 이틀째.

상호는 무작정 북쪽으로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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