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어떻게…… 계시자인 클락도 쉽게 잡지 못한 흑룡을 저렇게 한 방에?”
“믿을 수가 없군…….”
모여 있던 길드의 수장들은 전경인의 실력에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흑룡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겠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관심 없다는 듯 경인은 조용히 무전을 마치고 걸음을 옮겼다.
“아직 흑룡이 죽은 건 아닙니다. 카니발의 규율에 따라 사정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보상의 일부를 받을 수 있어요. 원하시면 가보시는 것도 좋겠죠.”
“아……!”
“마, 맞아. 그렇지!!”
“서두르자구!!”
경인의 말에 수장을 비롯한 각 길드의 능력자들은 입맛을 다시며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범위 안에 있다가 전투에 휩쓸릴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구경을 하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걱정 말게. 자네 실력은 충분히 알았어. 하지만 우리도 우리 몸 하나 지킬 만큼의 실력은 된다네.”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지.”
흑룡을 노리고 모였던 그들은 우습게도 순식간에 관객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클라이는 그들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언제는 다 잡아 버릴 것처럼 말하더니 남궁은커녕 그의 동료를 보고 의욕을 상실했군…….’
“그, 그럼 이만!”
“자자, 어서 가지!”
길드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언덕에는 경인과 성우, 그리고 클라이만이 남았다.
“아저씨, 던전에서 얻은 방패. 아마 이번에 쓰셔야 할 겁니다. 특히 저 사람들 잘 지켜주세요. 분명 사상자가 나올 테니까.”
“사상자?”
성우의 말에 클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가 강한 건 알지만, 그래도 여기 모인 사람들도 꽤 많은 던전을 공략한 실력자들이야. 사냥에 합류하는 것도 아니고 보상 범위 안에 들어가 있는 것뿐인데 사상자라니…….”
“한번 보세요.”
성우는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사냥은 애들 장난이 아니거든요.”
그런 그를, 클라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바라봤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중 이 둘이 가장 어렸다.
* * *
“쳇…… 볼썽사나운 꼴을 보였군.”
비전신궁의 화살이 꽂힌 흑룡을 보며 클락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죽은 거 아냐. 어차피 오행 권갑으로는 흑룡을 잡지 못해. 흑룡을 잡기 위해서 남궁이 남겨둔 이는 덴 하울인데 왜 네가 난리를 치는 거야?”
“너야말로 내 권갑이 흑룡을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아? 덴 하울의 마법도 결국은 속성 공격이고 내 오룡권갑도 같은데.”
[크르르르르…….]
흑룡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도 남궁에게 의뢰를 받은 거거든?”
“보스를 잡는 데 계시자를 둘이나 남겼다라……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가 아니라 설마 그걸 예상한 건가?”
“그거라니?”
주사인이 쓰러져 있는 흑룡을 살피며 클락에게 말했다.
“이 녀석의 몸 안에 또 다른 문이 들어 있을지 모르거든.”
“또 다른 문? 설마 네 말대로라면 흑룡을 잡으면 새로운 지옥문이 열린다는 거잖아?”
“어디까지나 추측. 우리 쪽에 있는 경인이가 녀석을 보더니 한 말이야.”
“추측? 그쪽답지 않은 말이로군.”
주사인은 클락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하늘에서 마물이 떨어지는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확인되는 것만 믿는 주의지만 워낙 요상한 세상이니 말이야.”
“흐음…… 뭐 나쁘지 않잖아? 녀석을 죽이고 또 문이 열린다는 건 그만큼 보상을 더 얻을 수 있는 건데.”
클락은 흑룡을 가리켰다.
“어차피 덴 하울이 이쪽으로 온다면 계시자가 2명이나 된다. 위상의 혜택 덕분에 아무런 칭호도 가지고 있지 않은 쟤가 흑룡을 사냥할 정도면 말 다했지.”
“아무런 칭호도 없는 쟤가 흑룡의 이면을 발견한 사람이다.”
“흑룡 안에 숨겨져 있는 문이 한 개뿐인 거라면 클락 씨의 말처럼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겠죠.”
푸욱―!!
경인이 손에 쥐고 있던 비전 화살을 흑룡의 미간에 꽂았다.
[크르르르륵……!!!]
작살처럼 박힌 화살들에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흑룡은 경인의 공격에 고통스러운 듯 이빨을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이 안에 문이 하나가 아니라면요?”
“……뭐?”
“지금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흑룡 안에 분명 지옥문이 숨겨져 있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 문이 1개일지 10개일지는 알지 못해요.”
“10개…….”
경인의 말에 클락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10개의 문에서 소환 되는 마물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정말 그렇게 많은 수의 지옥문이 녀석의 몸 안에 들어 있는 거라면…… 지금이 인원으로는 막을 수 없어.”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란 말이야. 우리는 여전히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중이라고. 마물 사냥으로 한탕 하려는 같잖은 마음가짐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우우우웅…….
그때였다.
그들이 서 있는 사이판 주위로 거대한 돔처럼 막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이건……?”
“덴 하울의 마법이야. 그에게 섬 주위로 결계를 가동시키도록 했어. 결계가 유지되는 동안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뭐? 그럼 저 사람들은?”
클락이 보상을 나눠 먹기 위해 모여든 길드의 능력자들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뭘? 어차피 목숨 걸고 마물을 잡으려고 온 것 아냐?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있어야지.”
가벼운 마음으로 온 사람들은 주사인의 말에 사색이 되고 말았다.
“표정 보여? 위상이 내린 혜택에 취해 자신들이 강해진 줄 아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는 걸.”
성우는 경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들으셨겠지만 안타깝게도 흑룡의 몸 안에 또 다른 문이 확인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을 영역 밖에 대기하시되 위험한 상황에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위, 위험한 상황라면……?”
“문의 보스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이쪽보다 더 많은 수의 보스를 말이죠.”
꿀꺽―
호준의 말에 사람들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자, 잠깐!! 녀석의 배 속에 몇 개의 문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지금 놈을 죽이겠다는 겁니까?”
“그러다가 전멸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당신이 책임 질 거냐고!!”
“맞아! 돌려보내 줘!!”
그 순간 사람들의 원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군요. 문의 보스를 사냥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 다들 휴양이라도 오신 겁니까.”
그때였다.
결계가 순간 일그러지며 열린 입구에서 덴 하울과 함께 있는 니나가와 에이카의 모습이 보였다.
“시, 신녀?”
사람들은 그녀의 등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러분들은 많은 던전 공략 경험을 가진 베테랑이 아니었습니까? 오히려 여러분들에겐 좋은 기회지 않을까요. 소환된 문이 많을수록 마물의 쟁탈을 다투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에리카는 덴을 가리켰다.
“뿐만 아니라 저를 비롯하여 현재 남아 있는 모든 계시자들이 이곳에 집결했습니다. 현재 가능한 가장 강력한 멤버라는 말이죠.”
스르릉―
그녀는 품 안에서 작은 단도를 꺼냈다.
▶ 시척술(時拓術)이 발동됩니다.
▶ 대상의 시간이 잠시 동안 멈춥니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등 뒤로 영롱한 도깨비불이 소환되어 빠르게 흑룡을 휘감았다.
“두려워하지 말고 싸우세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욕심쟁이에서 세상을 구할 영웅의 반열에 오를 겁니다.”
놀랍게도 쓰러져 있던 흑룡이 거칠게 내뱉던 호흡을 멈췄다. 떨리던 몸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굳어버렸다.
쯔즈즈즉…….
에리카는 단도를 화살이 박혀 있던 흑룡의 이마에 찔러 넣고는 천천히 아래로 잡아당겼다.
연약해 보이는 가녀린 팔에도 불구하고 흑룡의 비늘은 너무나도 쉽게 잘려 나갔다.
‘저거 뭐지? 엄청난 요기가 느껴지는데…….’
오행의 힘을 사용하는 클락은 에리카의 단도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현재 남아 있는 모든 계시자가 이곳에 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라는 뜻이죠.”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마치 홀린 듯 중얼거렸다.
“함꼐 역사를 만드시겠습니까?”
“조, 좋습니다! 그래, 옆에서 상자나 얻어먹는 건 쪽팔리는 짓이지!”
“얼마든지 나오라고 해! 모두 죽여 버릴 테니까!”
“가자!!!”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
모여 있던 수백 명의 능력자들이 그녀의 말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 순간 흑룡의 몸 안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상공에 떠오른 연기는 서서히 분열되더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사람들은 점차 나뉘어지는 연기들을 바라보며 그 수를 세기 시작했다.
“뭐, 뭐야?”
그러나 그 숫자가 열을 넘어가자,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호기롭게 싸우자고 외치던 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연기는 거대한 눈으로 변했다.
지옥문이 소환될 때 만들어지는 검은 눈동자.
사람들은 상공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향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게 몇 개야?”
머리 위로 빼곡하게 눈동자들이 소환되었다.
끼릭…… 끼릭…….
눈동자들은 마치 그런 그들을 비웃듯 깜빡이기 시작했다.
▶ 9번째 문이 열렸습니다.
▶ 10번째 문이 열렸습니다.
▶ 11번째 문이 열렸습니다.
▶ 12번째 문이 열렸습니다.
…….
쏟아지는 알림과 동시에 눈들이 문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악!!!”
“살려줘!!”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 마물 떼의 등장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도망치지 말고 뭉치세요!! 흩어지면 오히려 마물의 먹잇감이 될 뿐이에요!!”
“부대원 모두 전투 준비로!!”
도망치는 사람들과 달리 호준과 성우, 그리고 덴 하울의 마법 부대는 마물 떼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너는 왜 싸우지 않지?”
에리카가 경인에게 물었다.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요.”
“응?”
에리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짜잖아요. 이거.”
그의 대답에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과연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다는 린화로구나. 내 최면까지 알 차리다니.”
파즈즉……!
그때였다.
마치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경인의 눈앞이 산산조각 나더니 그 안에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으…… 으으으으…….”
“으으으…….”
경인은 자신의 주위에 너부러져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똑바로 서 있는 건 조금 전 꿈속에서 전의(戰意)를 잃지 않은 사람들뿐이었다.
“제가 보여준 건 환각이지만 한 편으로는 미래시(未來視)이기도 해요. 흑룡의 배를 가르면…….”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그 많은 보스와 싸워야 합니다.”
“승산은……?”
호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주사인과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없다.”
“없습니다.”
둘의 대답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