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할아버지! 오늘도 얘기해 주세요.”
“그래, 그래. 무슨 얘기를 해줄까?”
“부대에 있을 때 얘기요. 그게 제일 재밌어요!”
남기철은 자신의 옆에 붙어 있는 소민을 보며 웃었다.
“껄껄, 내가 어디까지 얘기를 해줬더라? 아프리카전 얘기는 했었나?”
[좋아 죽으려고 하는군. 저자가 진짜 할아버지라는 걸 알면 네 딸이 꽤나 놀라겠는걸.]
[얘기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 서로 간의 서운한 일이야 둘 사이의 문제고 굳이 소민이에게 숨길 일은 아니지. 그리고 보아하니 네 부하들은 그에게 대해서 처음부터 알고 있는 모양이고.]
알렉을 비롯한 눈치 빠른 계시자들 역시 대충 눈치를 챈 듯 보였다.
[어쩌면 저 아이도 알고 있어서 더 살갑게 대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저 똑똑한 아이의 눈썰미가 또 기가 막히잖아.]
“그럴지도.”
남궁은 무명과 라테아, 그리고 나타스의 말을 들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선을 넘는 건 아버지의 몫이야. 나는 말린 적 없다. 전쟁터에서 수십을 죽인 베테랑도 무서운 게 있긴 한가 보지.”
남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는 남기철의 손이 허름한 전투복 안에 몇 번이나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봤다.
뭔가를 잡았다 놓았다 하는 모습.
그의 전투복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우레의 전당에서 얻은 서클릿일 것이다.
“남 소령님. 할 일이 있으면 확실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고 생각보다 기회는 많지 않을 겁니다.”
“크흠…….”
남궁이 지나치듯 하는 말을 들으며 남기철은 쩝― 하고 혀를 찼다.
“록산느. 구문의 해석은 끝났나?”
“응. 지금 알렉과 제렌이 소환진을 손보고 있어. 워낙 세월이 많이 흘러 진법의 구조물들이 파괴된 곳들이 있어서 말이야.”
“서둘러야 해. 이제 곧 다음 문이 열릴 거야.”
“나머지 계시자들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들도 이제 충분히 제몫을 다할 수 있으니까.”
“글쎄. 다음 문의 주인이 흑룡으로 바뀌었다. 결코 쉬운 상대가 아냐.”
“그래서 덴 하울을 남겨둔 거잖아. 안 그래?”
남궁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입구를 열 수 있을 거야.”
지브롤터 해협에 위치한 헤르클레스 기둥.
오래된 바위 기둥 위에서 알렉이 머리 위로 둥근 원을 그리자 록산느는 쥐고 있던 낡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조금 떨어져 있는 게 좋을걸?”
남궁이 뒤로 물러서자 그녀가 두루마리 안에 적혀 있는 구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러자 적혀 있는 글자들이 서서히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두루마리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떠나 상공 위로 떠올랐고, 화르륵! 하며 그것이 타오르자 지면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그그그그…….
해협의 끝에서 거센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새하얀 빛의 기둥이 생성 되었다.
“저게 란의 보고로 가는 문이로군.”
“모두 긴장을 늦추지 마라.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순히 무구가 들어 있는 창고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수많은 함정들이 있을 수도 있다.”
빛의 문 앞에서 남궁이 집결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우(无)의 요새로 가기 전 보급을 위한 곳이 아니라 새로이 공략해야 하는 던전이라 생각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넵!!”
남궁이 소민에게 눈짓을 주자 그녀가 지팡이로 바닥을 가볍게 몇 번 두들겼다.
퉁― 퉁―!
세계수 지팡이의 끝이 옅게 빛남과 동시에 그녀의 주위에 있던 요정들이 일행의 머리 위에 반짝이는 가루를 뿌렸다.
“요정의 날개 가루예요. 잠시 동안 비행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있죠.”
소민이 먼저 보라는 듯 몸을 띄우자 그들은 능숙하게 하늘을 날아올랐다.
* * *
“흐음…… 생각보다는 별것 없는 것 같은데요.”
빛의 문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천천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문 뒤의 공간은 의외로 평범했다.
오래되어 보이지만 누군가 관리를 해온 것처럼 부서진 곳이 없는 신전들이 즐비했고, 사람들이 살았을 법한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글쎄.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남궁이 그녀에게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맑아 보이던 하늘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움직이네요?”
“잘 봐. 저게 뭐 같아?”
“네?”
박효주는 남궁의 말에 살짝 고개를 꺾으며 상공을 응시했다.
맑은 하늘의 움직임은 바람결을 따라 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설마…… 하늘이 아니라 물인 건가요?”
“물속의 도시. 대충 여기가 어딘지 감이 오지?”
“믿을 수가 없네요. 란(亂)의 보고가 전설 속에 사라진 아틀란티스라니…… 아니, 그보다 여기가 정말로 존재하는 곳인 건가요?”
“현실에 남아 있는 많은 역사들이 위상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이 꼭 현실의 공간이라고는 할 수 없어.”
“이미 우리가 들어온 빛의 문 자체도 현실의 것이 아니니까. 이곳이 가상의 공간인지 아닌지는 모르지.”
록산느의 설명을 덧붙이자 박효주는 신기한 듯 주위를 다시 한 번 두리번거렸다.
“그래서 이렇게 거대했네요. 창고라기보다는 도시 같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잊힌 유적지를 찾은 건 기쁜 일이지만 녀석의 보고가 도시라는 건 우리에겐 달갑지 않은 일이지.”
“왜죠?”
“너무 넓어. 이 안을 모두 수색 할 수도 없는데 말이야.”
“아…….”
남궁은 천천히 팔을 머리 위로 뻗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엄청난 양의 물이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이겠군.”
▶ 원시 아룡의 팔찌를 사용합니다.
▶ 어룡의 보석이 발동됩니다.
수아아아아……!!
상공 위에 지붕처럼 떠 있는 물을 뚫고 스무 마리가 넘는 수어들이 나타났다.
그가 위로 뻗은 손을 앞으로 내밀자 녀석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용핵 덕분에 수어의 숫자가 늘긴 했지만 스무 마리로 이 넓은 도시를 모두 살필 수 있을지 모르겠군.”
“고작 그런 걸 고민하세요?”
“……뭐?”
“그런 건 혼자 계실 때의 문제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누군데요.”
박효주가 그를 향해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솨아아악……!!
그러자 수 마리의 바람의 정령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로 소민의 요정, 제렌의 위습, 록산느의 소환수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군.”
남궁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을 향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 의지하는 것이 어색한 모양이야.”
“의지할 필요 없어요. 그저 사소한 것들을 저희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그는 박효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찾은 것 같아요!”
소민이 남궁에게 소리치자, 그들은 일제히 요정이 날아간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 * *
“여긴가……?”
“요정들이 이곳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다고 해요.”
도시의 중앙을 가로질러 도착한 부서진 폐허 앞에서 요정들이 뭐라뭐라 소민을 향해 떠들고 있었다.
“위습과 정령들도 같은 생각인 모양입니다.”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있나?”
“으흠…… 살펴보겠습니다.”
박효주가 정령들로 하여금 주위를 수색하게 했다. 하지만 무너진 폐허의 입구는 쉽사리 보이지 않았고 이렇다 할 특이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죠?”
“비켜봐.”
스릉―
순간 알렉 트라만이 검을 뽑아 무너진 폐허를 향해 있는 힘껏 그었다.
카앙―!!!
“훕?!”
하지만, 잔해에 검날이 닿는 순간 강맹한 힘이 그를 튕겨 냈다. 너무 강한 반발력에 오히려 그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쿨럭!!”
토해낸 숨과 함께 그가 붉은 핏덩이를 뱉어냈다.
“괜찮습니까?”
제렌이 황급히 회복 마법을 그에게 걸어주었고 알렉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바라봤다.
“힘으로 부술 수는 없는 모양이야. 어쩌지?”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란(亂)이 자신의 보구를 가져가라고 한 것이겠지. 남 소령님, 어떻습니까. 혹시 길이 보이십니까.”
“흐음…….”
남기철은 잔해 위로 손을 얹었다.
촤르르륵……!!
그러자 그의 손바닥 아래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마치 채찍처럼 그의 팔을 감아 올렸다.
“저게 뭐지……?”
“저런 건 처음 보는데…….”
블랙 루트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기철의 능력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령이나 요정과 같은 이계의 존재를 다루는 박효주와 소민, 그리고 록산느는 남기철의 힘에 그들과는 달리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지독한 사기(死氣)야…….”
록산느는 소민의 어깨를 감싸며 남궁을 바라봤다.
파앙――!!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남기철의 팔이 조금 전 알렉과 마찬가지로 튕겨 나갔다.
“큭?!”
남기철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흔들렸다.
치이이익…….
손등에서 불에 덴 듯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자, 저릿한 팔을 털어 내며 그가 고개를 저었다.
“블랙 루트로 열 수 있는 게 아니다.”
“란(亂)이 말하길 우(无)의 요새는 블랙 루트를 통해서 갈 수 있다고 하던데요.”
“두 위상의 성질이 완전히 다르니까. 내 힘이 우(无)에게 통하는 힘이라면 란(亂)에게는 통하지 않겠지.”
“흐음…… 그럼 어떻게 하죠?”
“블랙 루트는 닫힌 던전의 문을 강제로 여는 것과 같다. 내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문을 열기 위해서는 강제가 아닌 허가된 자가 필요하단 뜻이겠지.”
“란(亂)에게 허락된 자라…… 과연 그런 인간이 있을까요.”
“글쎄,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란(亂)이 아무리 특별한 존재라 하더라도 그가 위상이라면 관계가 있는 사람 한 명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구 말입니까?”
“당연히 란(亂)의 계시자겠지.”
“으흠…….”
남궁은 남기철의 말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오릭. 혹시 아는 것이 있어? 너는 우(无)의 계시자였잖아.”
[흐음…… 내가 카니발을 겪었던 시절에도 란(亂)은 봉인된 상태였어.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계시자를 두지 않았었다.]
“그 말은 네가 있던 시절보다 더 과거란 뜻인가?”
[그렇다 해도 명확하진 않지. 과연 그거 얼마나 오래전에 계시자를 두었던 건지는 나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에게 자신의 보고에 가보라고 하진 않았을 거야. 분명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제의를 한 것일 텐데…….”
남궁은 찬찬히 무너진 보고의 입구를 바라봤다.
‘저 안을 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가 과연 우리들 중에 누가 있지?’
찌르릉…….
그때였다.
남궁은 자신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떨림에 전대 위에 손을 얹었다.
순간, 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대 밖으로 뭔가가 나타났다.
“이건…….”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유리병을 보며, 남궁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태초의 인간의 눈물】
있었다.
자신들을 제외하고 또 한 명의 사람이.
“루(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