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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화 (226/270)

226화

[엄청난 위용이로군.]

영체들은 레오릭의 모습을 보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 놀라운 건 그가 지금 자신의 3개의 보구 중 고작 갑옷 하나 만을 두른 것일 뿐이라는 점이지.]

[모든 무구가 갖춰진 왕의 힘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군.]

쿵-

레오릭이 검을 바닥에 꽂았다.

[키에에에엑……!!]

검날에 달라붙어 있던 악귀들이 그의 힘에 짓눌려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질렀다.

[아버님. 생전에 쓰시던 투구입니다.]

라테아가 그런 그의 앞에 서 두 손으로 투구를 건넸다.

[어찌 된 영문이냐. 너 역시 영체가 되었구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더냐.]

[송구하옵니다.]

레오릭은 자신의 딸의 이마를 가볍게 쓸었다.

실체가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이어질 수 있었다.

[되었다. 보아하니 투구와 단검으로 네 영체를 유지하는 것인데…… 저자가 내게 육체를 만들어준다면 나는 더 이상 영체가 아니니 필요 없는 물건이다.]

[하오나 이것들은 아버님께서 생전에 사용하시던 무구들입니다. 아버님의 힘을 끌어내어 줄 수 있는 것들이지 않습니까.]

순간 레오릭의 모습이 웃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딸아. 너는 조금 전 이들이 했던 얘기를 잊었느냐. 이 갑옷은 내가 죽은 뒤에 얻은 것이다. 하나 이 또한 나와 깊은 유대를 가진 것이지.]

그는 검을 들었다.

[더 이상 과거의 유물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갑옷 역시 이제는 과거의 것. 과거의 유물은 이거 하나로 충분하다.]

우우우웅…….

검이 그에게 대답하듯 떨렸다.

[나의 생(生)은 이곳에서 새로이 시작되었고 나는 지금의 유대를 새로이 만들 것이다.]

“원한다면 그 검을 계속 써도 좋다.”

[……네?!]

남궁의 말에 검을 만든 연화는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크큭…… 좋다. 사자(死者)만이 악귀들과의 유대를 맺기 어울리지. 잘 받으마.]

레오릭은 호탕하게 웃었다.

“공방에 쓸 만한 검이 있으면 하나만 빌려주겠어?”

[검이야 많긴 하지만…… 계명검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제 나름의 역작인데…… 아무렇지 않게 내어주다니요.]

연화는 조금 실망한 듯 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검을 줄 정도로 둘의 관계가 깊다는 의미기도 했다.

촤르르륵……!!

하지만 말과 달리 그녀의 소매 안에서 수십 자루의 검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에 만든 무구입니다. 제 생각엔 이것을 쓰는 게 좋을 듯싶네요.]

공중에 떠 있는 검자루들 중에 하나를 골라 연화가 그에게 건넸다.

넘버링 없음

이름 : 17번째 검

등급 : 에픽(최고)

▶ 검묘의 연화가 직접 만든 17번째 무구.

▶ 오직 예기에 집중하여 만든 검답게 날이 섰지만 내구도가 떨어진다.

▶ 필중(必中) - 반드시 첫 공격은 명중된다.

“훌륭해. 중심이 잘 잡혀 있는걸.”

남궁은 연화가 건넨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며 마음에 들은 듯 대답했다.

[특별한 힘은 없습니다. 하지만 남궁 님에겐 이렇다 할 잡스러운 효과보다 이것이 나을 테지요.]

“특별한 힘이 없긴 왜 없어?”

부우웅-!!!

그가 검을 휘두르자 남궁은 마치 검이 목표를 찾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퍼억-!!!

순간 검이 숨어 있던 악귀를 정확히 꿰뚫었다.

[키릭…… 키리릭…….]

관통한 검을 남궁이 옆으로 긋자 녀석은 풍선 터지듯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오랜만에 합을 맞춰볼까?”

[기쁜 일이로군.]

남궁과 레오릭은 남아 있는 악귀들을 향해 몸을 달렸다. 그들이 검묘의 모든 악귀들을 소멸시키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신기하군. 탑에 성채를 세우다니…… 마족의 머리를 걸어두던 낡은 가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걸.]

야차계에서 돌아온 레오릭은 탑 안에 있는 남궁의 성채를 살피며 말했다.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니…… 묘하군.”

[그 시절도 내게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마음껏 마물들을 쓸어버렸으니까.]

“맞아.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

[자네가 이리 웃을 수도 있었던가. 수년 동안 함께해 왔지만 마족의 머리를 벨 때 말고는 웃음을 보지 못했는데 말야.]

레오릭은 그의 웃음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빠!!!”

달려오는 소민을 보며 그는 남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토록 원하던 꿈을 지켰군. 고생했다.]

자신의 노력을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파트너.

남궁은 마치 지금까지의 노력을 보상받는 것 같은 기분에 괜스레 마음이 찡한 기분이었다.

퍼억---!!!

“……쿨럭.”

하지만 그 순간 느껴지는 묵직한 복부의 충격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토해냈다.

[활기찬 딸이로군.]

레오릭은 지팡이를 휘두르는 소민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빠, 결국 일을 저질렀더라? 비룡계에 혼자 갔었다면서?”

“하, 하하…… 잘 처리했으니 걱정 마.”

“걱정 안 하게 생겼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요정족의 계약자였으니 나도 팔각 전쟁에 대해선 알고 있다고.”

자신을 향해 입술을 씰룩이는 딸이 무슨 생각으로 걱정을 하는지 남궁은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그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함께 온 거야. 인사해. 아빠의 옛 동료야.”

“동료……? 군인이세요?”

소민은 갑옷을 두르고 있는 레오릭을 바라봤다.

찌릉…… 찌르릉…….

순간 그녀의 주위에 있던 요정들이 경계하듯 빠르게 날갯짓을 했고, 그제야 소민은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갑다.]

레오릭은 소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군인이던 시절의 동료가 아니다. 그보다 더 오래전…… 아니, 더 이후라고 해야 하나?]

남궁은 농담 아닌 농담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냐. 전생의 나를 도와주었던 파트너고 다른 차원에서 카니발을 참가해 우승까지 한 인물이기도 하지.”

“우승이요?”

소민은 눈을 반짝이며 레오릭을 바라봤다.

[네 아버지라면 더 쉽게 할 수 있을 거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봐온 가장 뛰어난 전사니까. 또한 나 역시 그를 도울 테니.]

“전 아빠가 카니발에 우승자가 되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음?]

“무사히 저와 함께 있길 바라는 거지.”

레오릭은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의 악마술로 새로이 얻은 육체가 아직 어색한 듯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씰룩였다.

[훌륭한 딸을 가졌군.]

“말해 뭐 하겠어.”

[아가야. 걱정 마라. 네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 것이니.]

“아저씨도요.”

나름 안도의 말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자신마저 지켜주겠다는 그녀의 말에, 레오릭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클클. 한 방 먹었군. 마치 네 어린 시절을 보는것 같구나.]

레오릭은 라테아에게 말했다.

[네가 저 아이의 힘이 되어주거라. 보아하니 매우 특별한 마력을 지녔구나. 어쩌면 아버지보다 더 뛰어난 영능력의 힘을 가진 것일지도 모르겠군.]

레오릭은 소민의 마력의 내력을 알아차린 듯 말했다.

“괜한 소리 하니 마. 내 딸은 싸우지 않을 거다.”

“아빠!”

“엄마가 준 마력은 사람을 지키는 데 쓰도록 해.”

“내 마력은 엄마 덕분에 특별해졌지만 엄마가 준 건 아냐.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요정과 정령들의 도움으로 더 강해졌어.”

“알아. 하지만 그래도 아빠와 함께하는 건 안 돼.”

소민의 말에도 불구하고 남궁은 여전히 단호했다.

[달라지지 않는군.]

[카니발의 참가자들 중 누구보다 강한 딸인데 그 힘을 썩히려 들다니 말이야.]

[품 안의 자식이라지만 너무 과보호를 하는 것도 별로 좋은 건 아닙니다.]

무명을 비롯한 영체들이 남궁의 태도를 질책했지만 그는 변함이 없었다.

“동료들과 함께 적을 물리치는 영웅의 얘기는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거야. 세상은 항상 적이 나보다 강하고 적에게 몰살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지. 회귀의 조건 중 하나가 뭔지 알아? 세상에 유일한 생존자가 되는 것.”

[…….]

남궁은 차갑게 대답했다.

“그 많던 강자들이 모두 죽었다. 내 딸? 특별하지. 하지만 특별하기 때문에 그 힘을 더 조심하는 것뿐이야.”

[고집불통.]

라테아는 그를 한마디로 정의 내렸다.

“레오릭. 우(无)를 찾을 수 있겠나.”

남궁은 그녀의 말에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눈을 흘기며 물었다.

[여기선 불가능하다. 이곳에 란(亂)이 있지? 녀석의 기운이 짙게 느껴진다. 차라리 그에게 묻는 게 빠르겠지.]

[확실히 그랬지만…… 탑이 바깥으로 소환되면서 녀석의 봉인도 사라졌습니다. 위상들이 뭔가 조치를 취한 것 같아요.]

[하하, 지금의 위상들이 란을 움직여?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란과 우는 태초의 위상이다. 지금 태어난 애송이들은 가까이할 수도 없는 존재라고.]

[그럼……?]

[기껏해야 입구를 숨긴 것뿐이겠지. 만약 그렇다면 란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어떻게?”

[간단하다. 네가 사슬을 이용하면 된다. 사슬이 그가 있는 곳을 가르쳐줄 거다.]

“지금 내 사슬은 란(亂)과 우(无) 둘 모두의 것이 합쳐진 건데…… 사슬로 찾을 수 있다면 우도 가능한 거 아냐?”

[입구를 숨긴 것과 장소 자체를 찾을 수 없는 건 다르니까. 남궁, 네가 가진 사슬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사슬의 존재는 어떤 면에서는 위상보다 더 높다.]

“알고 있어. 내 역량이 부족해서 사슬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걱정 마라.]

화아아아악……!!

그때였다.

레오릭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자 그의 육체가 다시 연기처럼 변하며 남궁의 손목을 휘감았다.

[내가 있으니.]

차르르릉-!!

그의 힘이 남궁에 스며들자 손목에 감겨 있던 사슬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란(亂)이여. 너는 내 목소리가 들릴 테지. 나는 어떻게서든 우(无)를 찾아낼 것이다. 만약 내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너는 영원히 어둠 속에서 풀려날 수 없겠지.]

카아아아앙……!!

순간 사슬이 거칠게 분리되었다.

[계시자도 두지 않은 고귀한 위상에겐 지금이 마지막 기회겠지. 너는 위상들의 편이지만 과연 위상들도 너를 같은 편이라 생각할까?]

두 개의 사슬 중 하나만이 레오릭의 말에 거칠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너라면 알겠지. 우리가 너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는 것을.]

카르르릉…….

[그러니 모습을 드러내라. 같잖은 위상들의 봉인 따위가 너를 숨길 수 있을 리 없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슬이 둥글게 말리더니, 마치 마법진을 형성하듯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레오릭.]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남궁은 주위의 풍경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다시 죽고 싶어 왔느냐.]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눈동자.

꿀꺽-

남궁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와 다르다. 이게 진짜 란(亂)의 힘인가?’

목소리 안에 담긴 위압감만으로도 그조차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었다.

남궁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쿵-

하지만 그 순간,

[뭘 또 죽여. 이미 죽어서 더 죽을 것도 없는데.]

레오릭은 마치 오랜 친우(親友)를 만난 것처럼 그를 향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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