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뱀을…… 이용해라?”
[수많은 문헌에 언제나 인간과 함께 뱀이 나오지. 그리고 모두가 뱀이 인간을 타락시킨 존재라 하지만, 글쎄? 그 시대를 살지도 못한 후대가 어찌 그것을 판단할 수 있겠나.]
루는 옅은 웃음과 함께 남궁을 바라봤다.
[전승되어 오는 신화들 중에 과연 진실이 얼마나 스며들어 있을까. 역사는 그저 시대의 권력을 위해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것인데.]
차르릉…….
마치 그의 말에 동조하는 것처럼 남궁의 사슬이 가볍게 흔들렸다.
[세상이 평가하는 뱀이 아니라 네가 보고 네가 느낀 그대로의 뱀을 생각해 보거라. 그리고 그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를 알아낸다면…….]
루의 형상이 서서히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너는 가장 강력한 검을 얻게 될 거다.]
파앗-
전원이 꺼진 것처럼 남궁의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밝아지자 그의 눈엔 쿠후란의 막사가 보였다.
“내 평생 맡아 보지 못한 강렬한 영기로군. 그래, 눈물의 주인과는 잘 만났는가.”
“만나긴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하더군.”
“어떤 얘기를 했지?”
“인간을 창조한 신이 뱀이라고 하던데.”
“허허…….”
쿠후란은 남궁의 말에 턱을 쓸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꼭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지. 여러 문화권마다 신화가 다르지만 창조신들 중에는 복희와 여와처럼 뱀의 형상을 가진 자도 있으니까.”
“하지만 인간을 타락시킨 것도 뱀이야.”
“과연 그게 타락일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 됨이 아닐지.”
“……루와 같은 소리를 하는군.”
남궁은 쿠후란의 말에 쯧- 하고 혀를 찼다.
“루?”
“눈물의 주인. 태초의 인간이자 인류의 그 어떤 문헌에 남아 있는 기원보다 더 과거의 존재.”
“루(淚)라…… 루…… 그렇군.”
그는 마치 그 이름을 음미하듯 곱씹었다.
“화신의 시험과 관련해서 뭔가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허탕이로군. 이럴 줄 알았으면 삼독문에서 무기라도 고를 걸 그랬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말게. 아무것도 얻지 않기는. 사슬을 얻었잖은가.”
쿠후란이 그의 손목에 감긴 사슬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전과 달리 뭔가 온전한 형태가 된 듯한 느낌이야. 어쩌면 자네가 찾으려는 해답을 그 사슬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사슬은 위상의 것이야. 사슬의 힘을 온전하게 발현하려면 위상의 힘이 필요하지. 그리고 인간이 위상의 힘을 얻게 된다면…….”
남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로군.”
“맞아.”
“쉽지 않은 선택이겠어.”
섣불리 무엇이 옳다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오랜 세월을 산 쿠후란도 그와 매한가지로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다음 문이 열리기 전까지 다들 던전을 탐색하고 있으니 나 혼자서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거든.”
“필요한 게 있는가?”
“딱히. 이제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답일 테니까.”
쿠후란은 남궁의 대답을 들으며 자신의 뒤에 있는 작은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이걸 가져가게.”
“이게 뭐지?”
“달눈물꽃을 말려서 만든 가루일세. 잠시 동안이지만 정령을 부릴 수 있게 해주지.”
작은 종이에 싸여 있는 노란 가루를 보며 남궁은 못미더운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정령이라…… 정령력도 없는 내게 과연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잖은가. 그리고 아무리 자네라도 화신들을 모두 사냥에 성공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내 기억이라도 읽은 건가?”
“클클, 정령들이 이야기를 해줬다고 해두지.”
“속을 알 수 없는 노인네…….”
쿠후란의 말대로 전생에 그는 마지막 화신을 사냥하지 못했었다.
요르의 일곱 뱀 중 가장 많은 신력을 머금고 있는 괴물, 히드라가 바로 그 녀석이었다.
“녀석의 능력이라면 잘 알고 있으니까. 전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맹독과 계속해서 자라나는 머리. 귀찮은 능력임은 맞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인 능력도 아니야.”
남궁은 말했다.
“히드라의 위업을 달성했던 헤라클레스는 뱀의 목을 자를 때마다 불로 지졌다고 하지. 불을 가져다 줄 이올라오스는 없지만 맹화장과 함께 거암귀에서 사냥했던 불기린의 재료들로 만든 무구라면 가능해.”
“전승은 해답이 될 수 없지만 조언이 될 수는 있지. 자네 말대로 그 히드라가 일곱 뱀의 화신이자 헤라클레스의 위업에 관여했던 존재가 맞다면…… 놈을 사냥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일세.”
“어째서지?”
“히드라의 가운데 머리는 불멸이라 헤라클레스도 결국 마지막 머리를 베지 못하고 바위에 찍어 누르는 것으로 끝냈으니까.”
그때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막사의 문을 열고 록산느가 들어오며 말했다.
“애초에 잘못된 시험이야. 히드라는 불멸의 마물인데 그걸 사냥하라고? 남궁, 당신의 위상이 당신을 가지고 논 거라고.”
“글쎄. 히드라는 시험의 대상이 아니더라도 지옥문의 파수꾼이기도 해. 문은 보스를 사냥해야 닫힌다. 그 말은 히드라 역시 죽일 수 있다는 뜻이겠지.”
“반신(半神)도 하지 못한 위업을 당신이 하겠다고?”
“못할 것도 없지.”
남궁은 쿠후란이 건넨 꽃가루를 품 안에 찔러 넣으면서 말했다.
“반쪽짜리가 아니라 온전한 신을 노리고 있는데.”
* * *
“록산느, 들었느냐. 남궁이 내일 비행기로 떠난다는구나.”
“그래요? 한시라도 빨리 사라져줬으면 좋겠는데. 미카엘의 도약이 있는데 굳이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네.”
“그건 미카엘을 위한 배려겠지. 이능의 힘을 너무 믿지 말거라.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언젠가 그 힘에 대한 대가를 가져갈 게다.”
쿠후란은 회색빛으로 변한 자신의 두 눈을 가볍게 손으로 쓸었다.
“가거라.”
“……네?”
“이제 이곳을 떠나라는 뜻이다. 지금껏 이 늙은이의 옆에 있어준 것으로 충분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가긴 어딜 가요? 위커맨도 없는 상황에서 다 죽어가는 노인네를 보살펴 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 것 같아?”
“욘석아, 다 죽어가니까…… 이제 놓아달라는 말이지.”
꽈악-
록산느는 그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죽긴 뭐가 죽어가? 쓸데없는 소리 하는 거 보니 아직 팔팔하구만!”
울컥하며 그녀는 소리치며 막사 밖을 뛰쳐 나갔다.
“못난 녀석…….”
그녀의 빈자리를 보며 쿠후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죄로구나. 내가 죄인이야…… 누구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아이를 이렇게 그냥 방치하고 있으니.”
쿠후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네라면 어찌할 겐가.”
막사의 뒤편으로 걸어 나온 그는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남궁을 찾았다.
“뭐…… 그만큼 할아버지를 사랑한다는 뜻이니까. 일인전승의 드루이드 율법 때문이라면 나는 차라리 드루이드를 포기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싫은 모양이야. 아마도 드루이드를 포기하면 당신과 함께할 수 없으니까.”
남궁의 대답에 쿠후란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군…… 자, 마시게. 정령초를 우려낸 물일세. 자네도 잠을 못 이루긴 마찬가지인 모양이군.”
“그건 당신이 마시도록 해. 나보다 더 심란해 보이니까. 내 수면제는 따로 챙겨왔거든.”
그는 술이 들어 있는 힙플라스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 나도 좀 빌립세.”
쿠후란이 남궁의 힙플라스크를 빼앗아 입에 털어 넣었다.
“쿨럭, 쿨럭…….”
단숨에 비어 버린 자신의 술병에 남궁은 입맛을 다시며 그를 바라봤다.
“드루이드가 된 후로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로군.”
“괜찮나?”
“뭐, 좋군. 때로는 세속적인 것에 도움을 받는 것도 말이야.”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남궁은 빈병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전에 내게 전생을 얘기해 줬던 것 기억나는가. 내가 위커맨의 제물이 되었고 내 시체에서 드루이드의 눈물이 나왔다고 했던 것 말이야.”
“물론. 내가 해준 말이니까.”
“그리고 그 눈물을 가져간 것이 록산느이고.”
“혹여나 오해를 할까 봐 얘기하는 건데 그녀가 욕심 때문에 당신을 죽인 건 아냐. 상황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지.”
남궁은 말했다.
“우리는 좀 더 강한 드루이드의 힘이 필요했다. 그녀의 힘을 강화 시켜야 했지만, 당시에도 그녀는 끝까지 거절했었어.”
“하하, 나는 내 손녀의 인성에 대해 의심하거나 걱정하는 것이 아닐세.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내 몸 안에 드루이드의 눈물이 있었는가니까.”
“확실히 있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그 당시 남궁은 최휘수의 실험 도구로서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 다녔었다.
수많은 경험을 했었지만 그중에서도 그날의 기억은 특히나 생생했다.
“나도 보았거든. 드루이드의 눈물은 최초로 카니발에 새로이 등록 된 레전더리 아이템이니까.”
총을 비롯한 각종 화기부터 전투기나 함선과 같은 무기들까지.
현실엔 강력한 무기들이 분명 존재했지만, 그런 것들이 카니발에 등록되어 아이템화되진 않는다.
현실의 물건이 카니발에 등록되고 등급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뜻.
그런데 그 등급이 레전더리라면 드루이드의 눈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껄껄, 이 늙은 몸뚱이 안에 전설급의 도구가 담겨 있다라…… 기분 좋은걸? 그래도 평생의 노력이 헛된 건 아닌 모양이야.”
그는 남궁을 바라봤다.
회색의 눈동자는 혼탁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록산느를 데리고 가게.”
“따라오지 않을걸.”
“걱정 말게. 내가 그리 되게 만들 테니.”
“……그녀의 말처럼 정말 쓸데없는 소리로군. 당신의 죽음을 그녀가 받아들일 것 같아?”
“못할 것은 또 뭐지?”
움찔-
그 순간 남궁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
자신의 체구에 반도 안 되는 노인의 목소리에 위압을 느끼고 만 것이다.
“전생에도 했던 일일세. 못할 것도 없고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아니지. 중요한 건 전생에 드루이드의 눈물을 그 아이가 얻었다는 것이니까.”
쿠후란은 옅게 웃었다.
남궁은 그 웃음이 작별을 고하는 것임을 직감했다.
“그 아이는 전생보다 더 훌륭한 드루이드가 될 걸세. 위커맨의 제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드루이드의 눈물을 얻게 될 거니까.”
푸욱-
쿠후란의 손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붉은 피가 흘러내렸고, 그 모습을 지켜 보던 남궁의 뺨이 씰룩였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을 감지도 않았다. 적어도 자신만큼은 그의 마지막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 아이에게 전해주게.”
쿠후란은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엔 작은 구슬이 있었다.
그것은 찬란하다는 말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을, 아름다운 보옥이었다.
“……알겠다.”
한 인간의 생이 담긴 그것은 전설이라는 말로도 부족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