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내 화신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겠다고?]
“그 시험이라는 것이 여러 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이왕 하는 김에 퀘스트까지 끝낼 수 있다면 좋잖아. 안 그래?”
[미치겠군…… 화신은 말 그대로 나의 분신이다. 각각의 개체가 나의 힘을 나눠 가진 거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
요르는 남궁에게 말했다.
[화신들을 한꺼번에 모두 상대 한다는 건 그야말로 나를 상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뭐, 언젠가 위상과도 한판 할지도 모르니 연습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쯧쯧, 하여간 네 녀석은 말로 점수를 다 깎아먹는다니까. 붙긴 뭘 붙어? 지금 당장에라도 쳐 죽여 줄 수 있는데.]
“물론 그렇게 하지 않을 테니까 하는 소리였지. 죽을 때 죽더라도 제일 먼저 죽을 순 없잖아. 안 그래? 아직 재밌는 일들이 많은데.”
[그건 네가 하기 나름이지.]
요르는 팔짱은 낀 채로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원한다면 나머지 6마리의 화신들을 모두 소환해 줄 수는 있다. 꼭 그래야 하겠어? 나는 내 계시자를 잃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말만 하지 말고 도와주는 건 어때.”
[흐음, 방법은?]
“각각의 위상들은 자신들만의 특전을 참가자들에게 줄 수 있잖아. 그리고 그걸 통해서 계시자들에게 특권을 내려주고.”
그 첫 번째 특전이 가시덩굴의 미망인이 적색지대에서 시작했던 소환수의 밤이었다.
“그리고 미풍의 어머니와 화롯불을 다루는 자는 새로운 계시자를 대체하면서 2번째 보상을 주었더군. 원래대로라면 10번째 문을 끝내고 계시자들에게 주어져야 할 것을 말이야.”
[맞다.]
“기존 계시자들과의 격차를 줄이라는 의미겠지만, 다른 위상들이 그걸 쉽사리 승낙했을 리는 없고…… 조건이 있었을 것 같은데.”
[눈치가 빨라. 네 말대로 아무리 평등하게 경쟁을 한다 하더라도 2번째 보상을 그 둘에게 먼저 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도 그걸 성공시켰지. 그 말은 그만한 대가를 그들이 치렀다는 의미일 테고.”
남궁은 요르를 바라봤다.
“내 생각엔 그 대가가 그들이 할 수 있는 특전을 포기한 것이라고 보는데…… 어때, 내 말이 맞나?”
[똑똑한 녀석. 네 말이 맞다. 미풍의 어머니가 계획했던 ‘풍요의 달’과 화롯불을 다루는 자가 하려던 ‘불티의 날’은 모두 취소되었지.]
“정말 자기 멋대로군. 카니발 참가자들의 입장에선 2개의 특전이 사라진 건 뼈아픈 일인데.”
특전은 유일하게 모든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카니발의 혜택이었으니까.
그것이 사라졌다는 건 인류의 평균적인 전투력도 낮아진다는 의미였다.
[사실 카니발을 큰 틀로 본다면 참가자는 우리들이지. 계시자는 우리들의 말에 불과하고, 나머지 인류는 들러리일 뿐이야.]
요르는 말했다.
[중요도의 차이라는 말이다.]
“쓸데없는 핑계를 듣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아. 내가 바라는 건, 일곱 뱀의 특전을 포기하는 대신 나 역시 계시자의 두 번째 보구를 받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껏 말은 인류를 위하는 척하더니. 결국 너도 자신의 무구를 택하는 것이냐.]
“나랑 녀석들은 다르지. 나는 특전을 포기하는 대신 6개의 문을 닫는 것과 같으니까. 일곱 뱀의 특전을 받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이득일걸?”
남궁은 입꼬리를 올리는 요르를 향해 대답했다.
[그거야 네가 시험을 통과했을 때지.]
“그러기 위한 준비다.”
[진정으로 일곱 뱀의 특전을 포기하고 2번째 위상의 보구를 원하느냐. 조금 아쉬운데…….]
요르는 입맛을 다셨다.
[다른 녀석들이 너를 의심해서 우의 동굴을 열었을 때 내가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거든. 내 특전의 순간이 오면 제대로 한번 몰아주겠다고.]
“좋네. 그걸 지금 하면 되잖아. 미리 그렇게 얘기를 해뒀다면 금(金)의 삼독문도 열어줄 수 있는 것 아냐?”
[아서라, 녀석아. 혹시 전생에 너는 삼독문이 열리던 걸 본 적이 있느냐.]
남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계시자가 아니었다고 말했을 텐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 삼독문을 봐?”
[네가 보지 못했다는 건 전생에도 금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금(金)의 문은 단순히 계시자에게만 열리는 것이 아니거든.]
“……그럼?”
[그 문이 열리게 되면 카니발에 남아 있는 모든 참가자들에게 그 문이 보이게 된다.]
“그 말은, 다른 사람도 삼독문의 보구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럴 리가. 삼독문이 야차 녀석들의 보따리도 아닌데. 어중이떠중이들이 들락날락할 수 있겠나. 뭐, 나중에 가면 알게 될 거다. 여튼 지금은 안 돼. 은의 문으로 만족해라.]
남궁은 그의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이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순 없어 보였다.
[명심해라. 보구를 선택하는 순간 일곱 뱀의 특전은 사라진다는 것을.]
촤르르륵……!!
그의 말이 끝나자 도서관의 책장에 책이 꽂혀 있는 것처럼, 보고들이 진열되어 있는 수십, 수백 단의 진열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 엄청나군.]
[대리자 일족의 보고는 위상의 것에 비한다면 그냥 창고에 불과한 거였어.]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은의 보고 안에 보관되어 있는 물건들이 나타나자, 남궁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있는 다른 세 영혼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한눈에 봐도 진귀한 것들이로구나.]
[과연 뭐가 있을지 궁…….]
그때였다.
나타스의 말이 끊어짐과 동시에 무명과 라테아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잘대는 참견꾼들은 잠시 다른 곳으로 보냈다. 일곱 뱀의 보상을 결정하는 곳이다. 오직 계시자만이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되지.]
요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로 자리를 비울 것이다. 천천히 둘러보고 결정하거라. 가져갈 수 있는 보구는 단 하나. 신중하길 바란다.]
화르륵……!!
그의 몸이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남궁은 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침묵이 왠지 낯설었다.
“너무 오랜만에 혼자가 되어서 그런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보고 안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진열장 안은 모두 에픽 등급의 물건들이었다.
“대단하군…….”
여러 대리자 일족의 보고를 본 남궁조차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차분하게 보자.’
하나하나가 지금도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으나, 동(銅)의 문에서 레전더리 등급의 투구를 얻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그는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았다.
“분명 여기에 그게 있을 텐데…….”
남궁은 일단 전생의 최휘수가 사용했던 2번째 무구를 찾아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려 했다.
남궁은 천천히 진열대의 무구들을 살폈다.
‘여기 있군.’
그리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남궁은 익숙한 무구 하나를 발견했다.
넘버링 37.
이름 : 수도자의 가시관
등급 : 에픽(최고)
▶ 오랜 수도를 끝낸 자가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머리에 씌운 가시관.
▶ 관의 가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사용자를 조여옵니다.
▶ 고통이 클수록 그에 비례하여 소지자가 바라는 한 가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남궁은 진열장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엮어 만들어진 관을 꺼내었다.
“이런 능력이었나.”
그는 최휘수의 시체를 떠올렸다.
이마에서부터 뒤통수까지 마치 못을 박은 것처럼 구멍이 나 있던 끔찍한 모습.
가시관의 가시들이 그의 머리를 파고들었던 흔적들을, 남궁은 기억했다.
“소지자가 바라는 힘이라…….”
의미 없는 물음이었지만 그 당시 최휘수가 원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툭-
남궁은 들고 있던 가시관을 내려놓았다.
‘고통과 힘이 비례한다는 것은 결국 소지자를 벼랑으로 몰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아무리 강력한 힘을 준다 한들 죽으면 소용없는 일이니까.”
그는 가시관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진열장을 살폈다.
‘흐음…… 【찬란한 영혼】, 【불사조의 재】, 【핏빛 굶주림】이라…….
그가 눈여겨본 무구들은 이것들 중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카니발 후반까지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들이었다.
‘이것들 중 【핏빛 굶주림】은 내가 직접 본 무구이기도 하고…….’
진열장에 놓여 있는 작은 손도끼.
도끼의 날은 피가 굳은 것처럼 검붉었는데, 무기도 무기였지만 그 묻어 있는 핏물에서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키만 얀과 함께 최휘수의 추종자였던 참수귀(斬首鬼) 정도일.’
생각해 보면 그가 죽인 사람의 수도 두 사람과 비교했을 때 만만치 않았다.
그만큼 살인마였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아직까지 그의 이름이 들리지 않았다.
‘뭐, 이미 죽은 걸지도 모르지.’
아니면 최휘수의 경우처럼, 평범한 세상이었다면 전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연이 있는 물건은 가지는 게 아니지.”
남궁은 카니발이 시작되기 전 처음 규류를 만났을 때 그의 보따리를 살피며 했던 말을 읊조렸다.
“저주받게 되니까.”
그는 손도끼에서 시선을 떼었다.
“쉽지 않군.”
남궁은 어째서 요르가 영체들을 사라지게 한 것인지 이해가 갔다.
구울왕의 묘터에서 보상을 고를 때와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더 어려웠다.
‘묘터에서는 기회가 한 번뿐이라도 대부분 내가 아는 무구들이었지만, 여긴 반대로 대부분 내가 모르는 것들뿐이니…….’
차라리 훈수를 두는 자들이 있었다면 오히려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 다 에픽 아이템인 건가…….”
레오릭의 투구 때문에 혹시 하는 기대를 했지만, 다음 단계인 금(金)의 문이 있는 것을 생각했을 때 이곳에 레전더리가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머지들은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었기에 남궁은 살짝 아쉽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음?”
그때였다.
한참 동안 보고 안을 살피던 남궁의 눈에 이상한 물건 하나가 들어왔다.
“이런 게 왜 여기에 있지?”
이상하다는 것은 특별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다는 뜻이었다.
“흠?”
에픽 아이템들이 가득한 보고의 진열장에., 어째선지 아무런 표식이 없는 물건 하나가 남아 있었다.
넘버링 없음.
이름 : 상자
등급 : 노멀
▶ 물건을 담을 수 있는 상자
남궁은 누가 봐도 이상한 상자를 집어 들고서는 피식 웃었다.
“요르 녀석, 재밌는 짓을 해뒀군. 혼자서 결정하라고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힌트를 주고 있으니 말이야.”
탈칵-
“뭘 숨겨놓았는지 한 번 볼까?”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
하지만 상자 안을 본 순간, 그의 눈동자는 다른 때보다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레전더리도, 에픽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노멀 등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