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말도 안 돼…… 그는 분명 위상에게 소멸되었을 텐데?]
라테아는 호수의 바닥에 서 있는 아카샤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오랜만이로군. 레오릭의 딸이여.]
[어, 어떻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목소리만 듣는 것은 아쉽군. 얼굴을 보는 것이 어떤가.]
화아악……!!
아카샤가 손가락을 가볍게 옆으로 긋자 놀랍게도 남궁에게서 라테아가 분리되어 튀어나왔다.
[……!!]
놀란 것은 당사자인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 라테아는 남궁과 자신의 몸을 번갈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많이 변했군. 내가 그대를 기억할 때만 하더라도 허리쯤밖에 오지 않는 소녀였는데 말이야.]
[뭐, 지금도 키는 비슷할 겁니다.]
라테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에 농담으로 화답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신을 다시 보게 된 것도 놀라운데…… 영혼 추출이라니요. 설마 힘을 잃지 않은 겁니까?]
[그럴 리가. 이런 건 힘이라고 말하기에도 우스운 것이지. 어린아이 장난 같은 술법이야. 다만 라테아, 그대마저 영체가 되었을 줄은 몰랐군…….]
그의 목소리에서 쓸쓸함이 느껴졌다.
[슬퍼하실 필요 없습니다. 영체가 된 것은 저 스스로 원해서 결정 한 일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왕좌 전쟁 이후 위상에 반기를 들었던 아버지께서 패하시고, 놈들은 요란 일족을 멸족시키는 대신 탑에 가두었습니다.]
[탑에?]
[네. 그곳은 반란을 일으켰던 모든 종족들이 갇혀 있는 감옥입니다. 튜르 일족과 천둥 일가를 기억하십니까?]
그녀의 말에 엘프의 왕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그곳에 갇혀 있단 말인가.]
[그랬습니다. 하나 지금은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모두 이자의 덕분입니다.]
라테아가 남궁을 소개하자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곱 뱀의 주인의 힘이 느껴지는군. 게다가 야차의 냄새까지…… 흥미롭군. 계시자와 계약자, 두 개의 힘을 가진 자는 정말 보기 드문데 말이야.]
“내 힘을 알아봤으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알겠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당신과 당신 군단의 힘을 빌리고 싶은데.”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위상을 소멸시키려 했던 우리가 위상의 힘을 쓰는 계시자를 도우라고?]
[진정하십시오, 왕이시여. 그는 다른 계시자와는 다릅니다. 회귀자이며 전생에 아버지와 함께 싸웠습니다.]
[그래서?]
[……네?]
아카샤의 물음에 라테아는 당황스러운 듯 되물었다.
[그, 그는 이 카니발을 바로잡으려 합니다. 위상과의 싸움도 불사 할 생각이고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저희를 탑에서 구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 그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냐. 계시자가 위상과 전쟁을 치를 수 있다고? 라테아, 너 같은 아이가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는지 모르겠구나.]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는 다릅니다.]
[너의 아비도 그랬지. 하지만 결과를 보아라. 너희를 믿었던 10만의 엘프는 시체도 찾지 못한 채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원혼이 되었다.]
[크르르르…….]
거대한 산양이 울듯 낮게 그르렁거렸다.
[우리의 세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로 인해 나트리엘은 오염되었고 영원히 고통받게 되었다.]
‘뭔가 좋지 않은데…….’
남궁은 아카샤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런데 또다시 힘을 빌려달라고? 오히려 반대지. 나야말로 너희들에게 받아내야 할 것이 있다!!]
촤아아악……!!!
아카샤가 검을 뽑아 들자 호수 아래의 수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정하십시오……!! 당신만이 고통받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영혼이 봉인되었고 저희들은 수백 년 동안 탑에 갇혀 살았습니다.]
[그래서……? 너희를 믿은 죄로 모든 것을 빼앗긴 우리에게…… 이제는 일곱 뱀의 계시자를 데려와 죽어서까지 도우라고?]
아카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2분 남았군.”
[……뭐?]
“시간이 별로 없으니 짧게 말하지. 대충 사정은 알겠다. 인간을 믿고 싸웠지만 결국 패배하고 너희들의 땅마저 사라진 것…… 확실히 마음 아픈 일이지.”
남궁은 물고 있는 허파를 한 번 더 씹으며 그의 앞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어쩌겠어.”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남궁을 바라봤다.
“너희들의 시대엔 내가 없었는데. 타인인 나는 네가 가지는 분노도 어떤 건지 정확히 알 수 없겠지.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큼은 알고 있다.”
우우우웅…….
남궁이 가지고 있던 검날이 떨렸다.
“네가 분노해야 할 상대는 패배한 인간이 아니라 너를 죽인 위상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
그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던지고서 아카샤의 손을 잡아 자신의 목을 잡게 했다.
“인간에게 원한이 있다면 내 목을 부러뜨려도 좋다. 고작 내 목숨 하나로 당신과 10만의 엘프의 원한이 풀린다면 말야.”
[……무슨 짓이지?]
“하지만 내 목숨 하나를 믿고 너희들을 내게 맡긴다면 나는 위상을 죽일 것을 약속하마.”
빠득-
아카샤는 남궁을 노려봤다.
[계시자인 네가 어떻게 위상을 죽인다는 거지?]
“방법이야 많지. 팔각전쟁의 승자…… 가 되면 위상의 자리를 얻을 수 있다.”
[하? 그래서 지금 네가 이 전쟁에 참가했다는 거냐.]
“그리고 그 힘이 있다면 탑의 상층을 열 수 있다. 탑의 2층엔 악마족이 갇혀 있더군.”
[악마족……? 살아남기 위해서 우릴 배신하고 위상에게 들러붙었던 놈들?]
“놈이 말하더군. 팔각전쟁의 빈자리에 자신을 끼워달라고. 그리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위상의 힘을 내게 물려준다고 말이야.”
[헛소리. 놈은 분명 위상이 되면 가장 먼저 널 죽일걸?]
“나도 그렇게 생각해. 녀석의 말은 신용할 수 없지. 죽어도 상관없으니 자신을 말로 이용하라고 하지만…… 일족의 존속을 위해 도망친 놈이 과연 목숨을 내놓을 일을 할 리 없지.”
[그런데 왜 그런 말을 꺼내지?]
“나는 놈에게 위상의 힘도, 대리자 일족의 자리를 내어줄 생각도 없어. 하지만 당신이라면 다르겠지.”
[나를…… 다시 대리자 일족이 되도록 만들겠다고?]
아카샤는 그의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식으로 라테아를 꼬드겼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분명 말했을 텐데. 우리는 멸망했다고!]
“엘프가 멸망한 거지 계(界)가 사라진 건 아니잖아. 안 그래?”
[……뭐?]
“듣자 하니 원시성령은 창조한 계의 핵과 같다던데. 만약 너희가 사는 세상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원시성령도 사라져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남궁은 나트리엘을 가리켰다.
[설령…… 우리의 계가 존재한다 한들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지? 살아남은 엘프가 없는데.]
“그래. 살아남은 엘프가 없지. 처음에는 사령술로 너희를 얻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10만의 영혼…… 아니, 원혼은 어차피 내가 모두 흡수할 수도 없고 너희들도 그걸 원치 않으니 불필요한 싸움을 해야 할 일.”
남궁은 그에게 말했다.
“엘프가 아닌 다른 게 되어 보는 건 어때.”
[……다른 거?]
“내가 살던 시대에 너희가 없었던 것처럼, 너희 시대에 없던 것이 나의 시대에 있거든.”
위상과 대리자 일족.
카니발이 시작되고 변하지 않았던 2개의 구도는 20번째 문을 맞이하며 달라졌다.
“라테아, 당신들의 카니발은 20번째 문까지였다고 했었지? 거기서 끝났다면 아마 그들의 존재를 알아도 제대로 겪지 못했을 거야.”
20번째 문과 함께 찾아온 존재.
“사신(死神).”
대리자 일족과 같은 강인한 힘을 가졌으며, 그 힘을 내어주는 대가로 목숨을 가져가는 자들.
[사신? 왕좌 전쟁의 귀퉁이에서 죽어가는 우리들을 보며 낄낄 대던 그 빌어먹을 놈들? 웃기지 마라!! 우리보고 그딴 저급한 망령이 되란 말이더냐.]
“못할 것도 없지. 어차피 죽은 목숨. 스켈레톤이 되나 리치가 되나 무슨 차이야?”
역정을 내는 그와 달리 남궁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복수만 하면 그만이지.”
[……또다시 인간의 말을 들으려 한 내가 멍청한 놈이었군. 그들에게 기대를 할 것도 없는데 말이야.]
[그래, 사신을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안다. 놈들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될 존재야. 그런데 그런 자리를 엘프의 왕이 앉으라고? 말도 안 되는 얘기지.]
“믿을 수 없는 놈들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자에게 맡기려는 것이지.”
사신은 정해진 일족이 아니다.
그것은 자리의 이름이었다.
“누군가 사신에 자리에 앉게 되면 그때 비로소 사신족이 태어난다. 그런데 누가 그 자리에 앉겠어?”
사신이 되는 순간 일족의 정체성은 사라진다.
그것은 대리자 일족으로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악마인 카를로스조차 멸족을 피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일족으로 남는 것.
그것이 대리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게…… 사신이 되라?]
“전생에 사신들은 20번째 문과 함께 나타났다. 그 말은 그 이전까지는 사신의 자리가 공석이라는 것. 다만 사신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들은 죽음과 직결된 자들.
그렇기 때문에 사신이 되기 위해서는 죽음과 가까운 존재들의 힘이 필요했다.
“운이 좋게도 나는 사령술을 익혔고, 명계의 마왕과 검묘에 살았던 무명, 그리고 카니발을 겪은 라테아의 영혼까지 함께하고 있다.”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운 자들이 이곳에 있었다.
“당신을 사신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지.”
아카샤는 남궁의 말에 고민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겠지. 하지만 당신이 바라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생각 해보는 게 좋을거야.”
남궁은 그런 그에게 말했다.
“함께 싸워 이기지 못한 동료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함께 싸워도 이기지 못한 강적에 대한 복수인지.”
[다시 또 인간을 믿어야 하는건가.]
“아니. 나도 인간을 믿지 않아. 다만, 인간이 아니라 나를 믿으라고 말 할 순 있겠지.”
그의 말에 아카샤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사신이 되면…… 정말 이 원한을 갚을 수 있을까.]
“모르지. 그걸 알면 내가 신이겠지. 나 역시 내 세계를 지옥으로 만든 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니까,”
[보통 이런 상황에선 확신을 줘야하는거 아냐?]
[너무 솔직한 것도 문제로군.]
무명과 라테아는 혀를 찼다.
“결과는 예측할 수 없어.”
남궁은 그에게 말했다.
“다만 당신이 내게 힘을 보탠다면 0.1%의 확률이라도 오르겠지.”
[사신의 힘은 강력하지만 대가를 가진다. 사신이 된 우리들의 힘을 빌린다면…… 네 목숨이 위험할 텐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나는 언제라도 사신의 힘을 빌릴 거다.”
남궁의 대답에 아카샤는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그를 바라봤다.
[만약 내가 사신이 된다면 나트리엘은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사신은 계(界)를 가지는 존재가 아냐. 모르긴 몰라도 원시성령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겠지.”
[끼잉…….]
성령은 애처로운 목소리로 아카샤에게 뺨을 비볐다.
[잔혹하군. 사신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닌 사신이 되는 것에도 대가를 치러야 하다니.]
그는 남궁을 바라봤다.
[성령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사신이 되면 모든 것을 잊는다고 들었다. 나트리엘이 있다면…… 설령 사신이 된다 한들 나는 내 정체성을 잊지 않을 것이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 영혼 사역 Lv 4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거절하던 처음과 달리 영혼 사역을 쓸 수 있게 된 지금, 남궁은 나트리엘의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다만 결정은 스스로에게 맡기마.”
그리고 남궁의 손이 나트리엘의 이마에 닿은 순간, 자주색의 빛이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