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270)

179화

“……!!!”

카를로스는 자신의 몸을 꿰뚫고 바닥에 박힌 얼음 가시들을 바라보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껏해야 7번째 문이 끝났을 뿐인데…… 그런 자들이 피의 장벽을 뚫는다고?”

“거암귀를 사냥하고 우리가 얻은 보상이 뭔지 모르나 보군. 위상도 우리를 경계하는 마당에 겨우 다른 차원의 대리자 일족이나 하던 네 능력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남궁은 바닥에 쓰러진 그를 향해 말했다.

‘박효주와 소민이가 장벽의 분석을 끝낸 건가. 내 생각보다 더 빠르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장벽이 무너진 것에 그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카를로스와 검을 부딪쳐 본 후 그를 혼자서 제압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의 힘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탑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강제로 처넣어주마.”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뭐?”

“저희들의 힘을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원하지 않으리란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탁-

카를로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머리 위로 수십 개의 영상들이 나타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박되어 있는 함선 주위를 포위한 소형선들.

그리고 남궁이 있는 성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부터 나이프와 총을 아이들에게 겨누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보였다.

콰앙-!!!

거칠게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남궁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멈춰라!!!”

방 안으로 들어온 십수 명의 사람들 중 선두에 서 있는 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총 따위가 내게 먹힐 거라고 생각할 리 없을 테고……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이고르.”

불곰이란 별명을 가진 거구의 사내는 과거 여의도에서 알렉 트라만과 대치했을 때 남궁을 도왔던 에리카의 수하였다.

“자가트를 떠나 니나가와에 충성을 맹세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한 건가? 뭐가 신의 눈이냐. 잘나신 예지 능력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걸.”

남궁은 이고르를 향해 차갑게 웃었다.

“자신의 수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데.”

“……당신이 관여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나야 네가 어디에 붙던지 간에 상관없지. 어차피 알렉산드르의 개였다 배신을 했으니…… 다시 또 배신한다고 해서 놀랄 일도 아니니까.”

빠득-

그 순간 이고르가 이를 갈았다.

“그래, 너도 받았나?”

콰아아아앙---!!

이고르가 들고 있던 총을 집어 던지며 지면을 밟자 마치 코끼리가 발을 구르는 것처럼 육중한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거대한 몸이 남궁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아!!”

그가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그의 주먹이 비정상적으로 커졌다.

‘거대화에 이어 경질화(硬質化)까지?’

퍼억-!!

남궁이 팔을 들어 올리며 이고르의 공격을 막았다. 마치 트럭이 들이받은 것처럼 엄청난 충격이 그의 팔에 전해졌다.

“제법 아프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의 일격에 날아갔을 테지만 남궁은 한 발자국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뒤에 아스가 그를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환 능력은 보통 하나의 성질만을 가질 텐데…… 두 개나 가졌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자가트 시절의 이고르 삼형제는 꽤나 대단했지. 첫째가 투병 생활을 하면서 나머지 형제들이 킬러단을 나왔다고 들었는데…… 네가 지금 얻은 힘과 지금 내 해석이 맞아떨어지려나?”

꽈악-

남궁은 거대해진 그의 손을 잡았다.

있는 힘껏 손바닥을 펼쳐도 기껏해야 그의 손가락 하나밖에 잡을 수 없었지만,

우두둑-

손에 힘을 주자 이고르의 손가락이 기형적으로 꺾였다.

“크아아아악!!!”

“형제의 피를 빨아 얻은 힘이 고작 이 정돈가? 이 힘을 얻어 너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닥쳐!!!”

이고르는 황급히 주먹을 뺐다.

하지만 그 순간, 아스의 거대한 도끼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지면을 부쉈다.

바닥에 찍힌 도끼와 함께 붉은 피가 솟구쳤다.

거대해진 이고르의 주먹이 그대로 잘려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흐, 흐어어억!! 내 팔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는 잘린 팔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말도 안 돼……! 강철보다 단단한 내 팔이……!”

“강철을 벨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이제 널리고 널렸어.”

이고르는 잘린 팔을 허우적거리며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남궁이 쓰러진 그의 위로 올라서며 목에 검을 꽂기 위해 검을 역수로 움켜잡았다.

“그만.”

검 끝이 이고르의 목젖에 아슬아슬하게 닿았을 때,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남궁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왜? 저들을 살려달라고 빌기라도 하려고?”

“그럴 리가요. 이들이 당신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어도 상관없는 것들이지요. 다만 이왕 죽인다면 좀 더 쓸 만한 것을 죽이는 게 어떤가 싶어서 말입니다.”

“좀 더 쓸 만한 것?”

철컥-!!!

그때였다.

카를로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영상 중 무릎을 꿇은 채 포박되어 있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이런 것 말입니다.”

바들바들 떠는 아이들 중 한 명의 머리에 씌워진 복면을 벗기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상파울로에서 구해준 빈민가 아이였다.

“…….”

“저도 아이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고 싶진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꽈악-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잡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고르가 외치자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남궁의 팔을 움켜잡았다.

“무, 무슨 몸이 바위덩이 같아…….”

“……움직이질 않잖아?”

사람들이 안간힘을 쓰며 이고르를 짓밟고 있는 남궁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잠시 카를로스를 바라보던 남궁은 이고르의 가슴을 한 번 더 밟고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위에서 내려왔다.

“헉헉…….”

가슴뼈가 부러진 듯 이고르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놔라.”

자신을 잡고 낑낑대는 사람들을 향해 남궁이 나지막하게 말하자 그들은 머쓱한 듯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끼익-

남궁은 쓰러진 의자를 세워 앉았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힘을 써서는 모두를 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타협을 하면 모두를 구할 수 있지요.”

“타협? 그래서 요란과 우를 버리고 위상에게 붙은 건가?”

카를로스는 남궁의 말에 옅게 웃었다.

“저희가 바라는 건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리 어려울 것도 없지요. 저희 일족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내어주는 것.”

그가 남궁을 바라봤다.

“원한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남지 않으려는 자들은 모두 이송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아이를 죽여놓고 참 배려 돋게 말하는군.”

남궁은 머리 위에 여전히 떠 있는 죽은 아이의 시체를 바라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좋아. 한 가지만 묻겠다. 왜 굳이 바깥으로 나오려는 거지? 요란 일족은 여전히 탑 안에 살고 있고 우리들 역시 카니발을 대비해 탑을 안식처로 생각하고 있는데.”

“요란 일족과 저흰 다릅니다. 재밌게도 당신 곁에 마왕이 있군요. 혹시 그는 여기서 어떤 위치였습니까.”

“그는 문의 주인이었다.”

“대리자 일족이었던 마족이 문의 주인으로 전락하다니…… 그렇다면 알겠군요. 어째서 우리가 땅을 가지려고 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설마…… 네놈, 이 세계의 대리자 일족을 죽이고 그 빈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냐!]

마왕 나타스가 카를로스를 향해 소리쳤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이 세계의 마족은 꽤나 저급한 계획을 하고 있었군요.”

[……뭐? 이 새끼가!!]

“팔각 전쟁 같은 건 아무렴 좋습니다. 대리자 일족의 자리를 다시 찾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저는 일족의 존속을 바랄 뿐입니다.”

“일족의 존속?”

스윽-

그때였다.

카를로스가 옷의 단추를 하나 끌러 젖히자 그의 왼쪽 가슴에 시커먼 수포들이 잔뜩 들러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게 뭐지?”

“저희는 룬을 먹고 사는 일족입니다. 하지만 탑 안에는 룬이 없습니다. 저희는 조금씩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남궁을 바라봤다.

“당신도 알 겁니다. 세계엔 여러 차원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다르지만 차원마다 카니발을 이끄는 위상들과 대리자 일족들이 있지요.”

“그런데?”

“하지만 개체가 다르다 하더라도 존재성은 하나입니다. 그 위치의 존재가 죽는다면 그 위치에 있는 모든 차원의 존재들이 소멸합니다.”

“네 말은 다른 차원에서라도 위상이 죽으면 이곳에 그 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물론, 카니발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니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지요.”

촤르르륵……!!

카를로스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위상들을 상징하는 심볼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익히 알고 있던 여덟 개가 아닌 수십 개의 문양이 있었다.

“가령 어떤 차원에서 일곱 뱀의 주인이 소멸한다면 그는 모든 차원에서 그 존재가 사라지게 됩니다. 대신 그다음 카니발에서 다른 위상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여덟 자리를 채우겠지요.”

카를로스는 남궁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건 대리자 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족의 수장이 죽으면…… 모든 차원의 일족들도 사라집니다. 그 존재 자체가 완벽하게 지워지는 것이지요.”

“그 말은…… 팔각 전쟁에서 패하게 된 일족들은 다른 차원에서도 존재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어차피 패자는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전쟁이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꽈악-

주먹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소멸하고 싶진 않습니다. 적어도 저로 인해 다른 차원의 일족들까지 사라지지 않도록, 부디 저희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카를로스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남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부득이하게 인간들을 이용했지만, 대리자 일족이었던 저도 이번 일에 대해 참담한 마음입니다.”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 또한 인간들과 충분히 거래를 한 것. 그 어느 하나 강압적인 것은 없습니다.”

“…….”

“저희에게 영토를 주신다면 룬을 제공하겠다는 것 역시 거짓이 아닙니다. 일족이 힘을 회복하게 되면 그때부턴 저희가 룬을 찾아 여러분들께 바치겠습니다.”

“카를로스라고 했나.”

남궁은 자신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그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위상들과 타협했나 보지? 누구의 사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거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카를로스는 당혹스러운 듯 되물었다.

“죽어가는 것도 사실이고 룬을 먹는 것도 사실이겠지. 그런데 내가 1층을 공략했기에 탑의 문이 열렸다고?”

남궁은 차갑게 웃었다.

“넌 탑의 지하에 뭐가 있는지 모르나 보군.”

“네?”

“그곳엔 란(亂)이 갇혀 있다.”

“……!!!”

“태초의 위상도 빠져나오지 못 한 감옥을 감히…….”

그는 창백해진 카를로스의 얼굴에 말했다.

“너 따위가 빠져나왔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