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파장이 깊어졌어.”
“요정들이 울기 시작했어요. 뭔가…… 안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할까. 어차피 밖에서는 안을 살펴볼 수 없어. 직접 들어가거나 아니면 저 장벽을 해제하는 수밖에 없는데…….”
함선의 모니터실에서 주사인과 남소민은 굳은 얼굴로 위태로워 보이는 붉은 장막을 바라봤다.
“아직 안 돼요. 아빠랑 통신이 끊어진 걸 봐서는 그냥 저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정신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요.”
“으흠.”
“그리고 장벽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술법의 근간을 분석해야 해요. 일단은 효주 언니의 연락을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
“괜찮을까?”
주사인의 물음에 소민은 피식 웃었다.
“에이, 누굴 걱정하는 거예요? 저기 들어간 사람 우리 아빤데.”
“그 녀석 딸답네.”
주사인은 소민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고는 말했다.
“그래도 그냥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죠. 부수진 못해도…….”
갑판 위에서 덴 하울이 그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의 발아래 그려져 있는 거대한 마법진.
소민은 세계수의 지팡이를 움켜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게는 할 수 있으니까.”
파앗-!!
그녀의 앞에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어느새 갑판 위로 나타난 그녀는 있는 힘껏 마법진의 중앙에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우우우우웅---!!
갑판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뿜어내더니 서서히 상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척-! 휘리릭……!!
소민이 지팡이를 공중을 향해 룬을 그리듯 휘젓자 거대한 마법진이 서서히 분열되며 수십 개로 쪼개졌다.
“준비되었어요.”
“몇 번을 봐도 정말 경이로운 마력이구나.”
덴 하울은 상공에 떠 있는 수십 개의 마법진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껏해야 내가 만들 수 있는 다중 마법진은 여전히 열 개도 채 되지 않을 텐데…….’
덴 하울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일전에 가졌던 시기라든지 질투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는 이제 【레아의 서(書)】두 번째 페이지를 모두 익혔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비해 크게 마력량이 늘진 않았다.
자신과 비교하면 남소민의 마력의 증가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드넓은 대양이 남소민의 마력이라면 자신은 강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마법서를 익히며 깨달았다.
좁은 강물은 반대로 잔잔한 바다보다 유속(流速)이 빠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촤르르륵……!!
덴 하울의 손에 들려 있는 마법서의 페이지가 펼쳐졌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법서에서 흘러나온 빛이 마법진에 연결되었다.
수십 개로 분열되었던 마법진의 사이사이가 빛의 끈으로 이어졌다.
‘소민 양이 거대한 마력으로 마법진은 분열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나뉜 마법진들을 하나하나 엮어 빠르게 마력을 흘려보낼 수 있다.’
정교한 컨트롤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남소민은 하지 못하고 자신은 할 수 있는 마법의 길이었다.
“아이스 니들(Ice Needle).”
덴 하울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마법진들이 일제히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콰그그그극…………!!
수십 개의 마법진에서 날카로운 얼음송곳들이 뿜어져 나왔다.
탁-.
손가락을 꺾는 동시에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얼음송곳들이 도시의 장벽을 향해 날아갔다.
* * *
쿠그그그그…….
지면이 흔들렸다.
대치를 하고 있던 카를로스는 간헐적으로 울리는 떨림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마법으로 장벽을 두들기다니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요.”
“글쎄. 신경을 쓰는 거 보니 쓸데없는 짓은 아닌 것 같은데. 장벽이 부서지기라도 하면 곤란한가 보지?”
“궁금하면 부숴 보시지요.”
“그런 건 내가 하지 않아도 내 동료들이 알아서 할 거다. 각자의 몫이 있듯, 네놈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내가 할 일이거든.”
카앙-!!!
남궁의 검과 카를로스의 레이피어가 날카롭게 격돌했다.
“사람들에게 자질을 판다면서? 두 명에게 같은 힘을 나눠 주고 그중에 한 명의 목숨을 가져가고.”
“잘 아시는군요.”
“빼앗아 간 생명으로 뭘 하려는 거지?”
“아시지 않습니까. 등가교환입니다. 하나가 얻으면 하나는 잃어야 하는 법. 저는 얻고 잃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 오히려 감사를 받아야 할 입장이지요.”
“선택? 하위자는 그저 혈통이 같다는 이유로 제물로 사용될 뿐인데도?”
“그건 어떤 세계든 마찬가지 아닙니까. 포식자가 피식자의 의사를 묻고 먹어 치우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네가 얻는 것은 뭐지? 등가교환을 그렇게 나불거리면서 아무런 이득도 없이 자질을 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겠지.”
“당연하지요. 물론 저도 얻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슉-! 슈슉-!!
후위를 노리는 영혼 병사들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카를로스가 레이피어의 날 위로 손을 얹었다.
‘마법진?’
아니, 조금 달랐다.
마법을 쓰지는 못하지만 남궁은 마법을 비롯한 각종 술법에 대해서 연구한 적이 있었다.
적이 사용하는 능력을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법 많은 마법진과 술법진을 읽을 줄 알았는데 카를로스의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피해!!”
본능적으로 뭔가 그의 능력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낀 남궁이 소리쳤다.
[케에에에에에---!!!]
하지만 그 순간 검 위에 생성된 마법진 안에서 기괴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
처음 보는 광경에 남궁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우그적……! 우그적……!!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입 주위로 문어의 다리 같은 촉수가 영혼 병사들을 움켜잡았다.
“놈을 막아!!”
남궁의 명령에 영혼 주술사가 룬어를 외쳤다.
검은 연기가 칼날처럼 촉수에 붙잡힌 영혼 병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푸욱……!!
연기 칼날이 날카롭게 촉수를 공격했지만 힘이 부족한 듯 촉수를 자르지 못한 채 그대로 박힌 채 부서지고 말았다.
촉수에 끌려 거대한 입 안으로 들어간 영혼 병사들이 그대로 잘근잘근 씹혀 삼켜졌다.
[꺼억-]
순식간에 2명의 영혼 병사를 먹어 치운 괴물은 마치 만족스럽다는 듯 트림을 하고는 입맛을 다셨다.
“영혼 병사를 먹어……? 뭐 저런…….”
25년 동안 카니발을 겪었던 남궁조차도 처음 보는 마물이었다.
[저런 게 있었나……?]
[마계의 것은 분명 아니다.]
무명과 나타스 역시 카를로스의 사역마를 처음 보는 듯싶었다.
[저건…….]
다만 한 사람, 라테아만은 달랐다.
‘아는 놈이야?’
[나도 본 적은 없다. 다만 풍문으로만 들었던 건데……. 요그라온. 셀 수 없이 많은 촉수를 가지고 뭐든지 집어삼키는 심연의 괴물. 저걸 조련할 수 있는 종족은 딱 하나뿐이라고 했는데…….]
촤르르륵……!!
영혼 병사를 삼킨 괴물이 남궁을 향해 촉수를 날렸다.
십수 개의 촉수들이 카릴의 사방을 노렸고 그의 앞을 아스가 막아섰다.
콰아아앙--!!
물컹해 보이는 촉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요그라온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일족은 소론 일족이라고 했다.]
“소론……?”
남궁의 중얼거림을 들은 카를로스가 어쩐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의외로군요. 저희를 아십니까? 아니면…….”
타닷-!!
카를로스의 몸이 흐릿한 잔상과 함께 사라졌다.
요그라온의 촉수에 숨은 그가 남궁의 뒤를 노리며 레이피어를 찔렀다.
“저희를 아는 자와 함께이십니까.”
카아앙--!!!
레이피어의 검극이 남궁의 가슴을 정확히 찔렀다. 그의 몸이 그대로 튕겨 나가며 벽에 처박혔다.
[남궁!!!]
라테아가 황급히 그를 불렀다.
“호오…….”
하지만 그 순간 카를로스는 검 끝에 묻어 있는 돌가루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짧은 순간 석화의 보석을 사용한 겁니까. 과연……. 인간 최강이라 할 수 있군요.”
후두둑…….
남궁이 일어서자 그의 상체를 감싸고 있던 바위들이 가루가 되며 떨어져 내렸다.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원시 아룡의 팔찌】가 파르르 떨렸다.
“라테아. 그래서 저놈의 정체가 뭐라는 거야?”
[소론 일족은…….]
“저희는 탑의 2층에 살고 있습니다.”
“……뭐? 말도 안 돼. 2층과 연결된 통로는 완벽하게 감시되고 있을 텐데?”
“탑의 입구가 꼭 1층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지요. 우(无)의 탑이 세상과 연결된 덕분에 저희들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
[내 불찰이다. 저들이 탑의 2층에 있을 줄은 나도 몰랐던 일이야.]
“네. 그건 거짓이 아닙니다. 저희 역시 1층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으니까요. 요란 일족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일족의 수장이 영체가 되어 인간에 붙어 있다는 건 더 놀랄 일이군요.”
카를로스는 라테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네놈……. 처음부터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군?]
“모를 수가 없지요. 우리 소론 일족은 당신의 세계에서 대리자 일족을 행했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저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죠.”
카를로스는 라테아의 영체를 바라봤다.
“아쉽군요.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였다면 단박에 저를 알아봤을 텐데요. 보십시오. 같은 혈통이라 하더라도 역량의 차이는 명백한 법.”
[……닥쳐!!!]
스윽-.
그는 자신의 검을 소매로 닦아 냈다.
“그 힘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 어째서 나쁜 일이지요? 오히려 저희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을 인간들은 감사히 여겨야 할 겁니다.”
“미친…….”
“저희는 죽었다 깨어나도 얻을 수 없을 많은 룬을 당신께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혈통의 힘을 모아 원하는 자질을 가진 강한 전사를 만들어 드릴 수도 있지요.”
카를로스는 남궁을 바라봤다.
“대신 저희가 바라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뭐?”
“지금 이대로 저희들의 땅을 갖는 것. 저희는 더 이상 대리자 일족이 아닙니다. 척박한 탑의 2층에서 벗어나 여러분들과 함께 살고 싶을 뿐입니다.”
“이런 짓을 벌여 놓고 이제 와서 부탁을 한다? 아무래도 일 처리를 하는 순서를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그러니 탑에 처갇히지.”
“…….”
카를로스는 남궁을 바라봤다.
“저희는 요란 일족을 카니발의 승자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저희의 힘이 없었다면 요란은 진즉에 멸족되었을 겁니다.”
투웅-
그는 검을 꽂아 넣고서 라테아를 바라봤다.
“제 말에 거짓이 있습니까? 당신의 아버지 레오릭은 우리 소론의 마물을 이용해서 수많은 마물을 잡아먹었지 않습니까.”
[말을 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분명 네놈들의 그 저주받은 힘은 강력하지. 하지만 중요한 건 네놈들을 믿을 수 없다는 거다.]
“…….”
[너야말로 잊었느냐? 네놈들의 배신으로 왕좌 전쟁에서 우(无)는 봉인되었고 나의 아버지는 추방당했다는 것을!]
“그건 배신이 아닙니다. 규율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입니다.”
“그만.”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 남궁의 한마디가 그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그러니까 너희는 탑의 2층에 머물러 있다 이곳에 왔다는 거잖아.”
“그렇습니다.”
“결국 인간세계에 멋대로 들어왔다는 말이잖아. 우리 세계에서 무단 침입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
“……네?”
“강제 퇴거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상공에서 날카로운 얼음 가시들이 쏟아지며 카를로스의 몸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