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사, 살려주십시오……!!”
“죽인다고는 안 했는데. 그래도 살인자는 되지 않을 거니까 다행이지?”
산 주위에 포진되어 있던 경관들을 정리하는 것쯤은 남궁에겐 일도 아니었다.
“정부가 관련되어 있다고 했지? 너희들에게 이 일을 지시한 자가 누구지? 대통령인가?”
반시체가 된 디에고를 대충 바닥에 던진 남궁은 떨리는 눈빛들을 향해 물었다.
“루, 루엔 부통령입니다!! 그분께서 이 산에서 빈민가 아이들을 이용해 룬 채취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대통령은?”
“그게…….”
대답을 한 경관은 처음과 달리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동료들은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뭔가 뒤가 있는 모양인데. 내가 알기론 대통령은 아직 살아 있을 텐데?”
“그게…… 전권을 모두 부통령에게 위임했습니다. 현재 모든 지휘는 부통령께서 하고 계십니다.”
“어째서? 그럼 그는 뭘 하고 있지?”
꿀꺽-
경관은 어쩐지 조금 전 남궁에게 맞을 때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퍼억……!!
남궁은 주저 없이 디에고의 머리통을 짓밟았다.
지면 아래로 움푹 들어가는 그의 머리를 보며 경관은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그, 그게…… 제가 알기론 대통령께서는 클랜의 회원이 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클랜?”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남궁이었다.
“일국의 수장이란 자가 클랜에 들어갔다고 나라를 등한시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이상한 일도 아니지. 이 나라야 감옥에 가는 정치인들도 수두룩하니까.”
남기철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아니었다.
‘이번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평판도 좋았어. 게다가 내가 기억하기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꽤 오래 마물들과 싸웠었고.’
현 대통령인 피멘타 대통령은 남궁의 머릿속에도 남아 있던 자였다.
“어떤 클랜이지?”
“그게…… 혹시 매머드라는 클랜을 아십니까? 그곳으로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매머드?’
남궁은 클랜의 이름을 떠올렸다.
전생에는 들어보지 못한 명칭이었지만 왠지 귀에 익은 기분이었다.
“아.”
그리고 그 이름을 연합 본부에서 명훈에게 보고받았던 것을 기억했다.
‘듣기론 장길수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한 마물 해체팀이라고 했었는데…….’
그런 클랜이 어째서 브라질의 대통령을 영입한 것인지 남궁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러시아의 해체팀으로 알고 있는데. 피멘타 대통령이 지금 그곳에 가입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정확히는 매머드 팀 산하에 있는 [모프] 팀에 들어갔습니다.”
“산하의 팀이라고? 그 말은 매머드란 곳보다 작은 클랜이란 말이잖아.”
“그게…… 매머드도 크게 보면 산하 팀입니다.”
“어디 클랜인데?”
경관은 남궁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아르헨티나에 있는 [트레이스] 라는 곳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러시아의 [매머드]를 비롯해서 인도의 [수마트], 마다가스카르의 [리옴], 포르투갈의 [옥스] 등등…… 많은 클랜을 산하로 두고 있습니다.”
남궁은 그의 대답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의 규모면 유니버스 클랜은 당연하고 세계연합과도 맞먹을 정도일 텐데…… 어째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거지?’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빠르게 포착하고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연합 안에는 주사인과 함께 국정원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남기철의 위치를 단박에 찾아낼 정도의 정보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그들에 대한 정보는 들어온 없었다.
‘한낱 경관도 알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거지?’
뭔가 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한 지금껏 숨어 있던 그들이 양지로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의미기도 할 것이었다.
‘만덕수에게 접근했던 인도의 클랜이 저 경관이 말한 [수마트]가 맞다면…… 그들은 연합 소속의 능력자들을 영입하려고 움직인 거다.’
과연 그들의 수장이 누구기에 이런 대범한 짓을 한 것인지, 남궁은 좀 더 조사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에 대해서 더 알고 있는 게 있나?”
“자세한 건 모릅니다. 다만…… 대통령께선 [모프]의 회원이 된 이후에 이 산의 광맥을 발굴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경관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대통령께서 룬이 매장된 광맥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게 뭐가 이상한 일이지?”
“그는 [모프]에 가입하기 전엔 자질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거든요.”
그의 대답에 남궁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 말은 거기서 자질을 개안시켜 준다는 뜻인가?”
“글쎄요. 그런 건지…… 자질을 만들어 주는 건지, 저야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경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어떻게 생각해?”
“블랙 루트엔 다시 가지 마십시오. 목숨을 내놓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형님.”
“아니, 그거 말고. [트레이스]란 클랜 말이야. 평범한 사람이 자질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니면 아직 스스로 자질을 알지 못한 자들을 발굴하는 걸까?”
“형님.”
[네스트]로 돌아온 남궁은 검은 어금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명훈에게 말했다.
명훈이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부르는 의미를 알기에, 남궁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블랙 루트에는 더 이상 가지 않을 테니까 그만 째려봐라.”
“약속하십시오.”
“알겠다니까. 연합장이 되고 나니 어째 잔소리만 더 심해진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으면 적어도 제게는 말씀해 주셨어야지요. 형님의 목숨은 지금 여기 누구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그걸 잊으시면 안 된다고요.”
“명심하마.”
명훈의 잔소리가 귀찮았지만, 그래도 남궁은 그 잔소리가 썩 싫지만은 않았다.
“그나저나 [트레이스]라는 클랜은 저도 의아하네요. 연합에 올라온 정보엔 없으니까요.”
“연합이라고 해도 곳곳을 직접 조사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놓치는 부분이 없을 순 없겠지.”
“흐음…… 그래도 쉽게 수긍이 되진 않습니다. 대장도 아시다시피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는 게 누굽니까. 사인 형님이잖습니까.”
“글쎄. 남기철 전(前) 대장을 찾은 것도 정확히 따지자면 내가 아냐.”
그때였다.
방문이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주사인이었다.
“그 사람이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전에부터 남궁의 부탁으로 찾고 있던 사람이 몇 명 있었어. 그중에 그 사람도 있었고.”
주사인은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행방을 찾을 수 없었지. 그런데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남궁이 그를 찾으려고 하자 신기하게 그의 모습이 각종 정보망에 잡히더라고.”
“일부러……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야. 그 사람이 이능의 힘을 가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존하는 감시망의 눈을 피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
“으흠…….”
“일단 장길수와 만덕수, 두 사람에게 접근했던 팀에 대해서 조사해 봐. 나는 따로 아르헨티나의 [트레이스]란 클랜을 살펴볼 테니까.”
“감시망에는 포착되지 않고 개개인에게만 알려진 거라면, 그들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할 가능성이 높아.”
“그건 따로 생각해 둔 게 있어.”
“정말?”
“관련된 자를 잡아 족치면 되겠지.”
너무나도 그다운 방법이라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 * *
“흠…….”
성채로 돌아온 남궁은 자리를 비운 사이, 우(无)의 탑의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빠!!”
탑의 1층인 아룡(牙龍)의 문은 꽤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성채가 자리 잡고 마을의 형태까지 갖추게 되자 점점 분위기가 밝게 변하고 있었다.
“자자! 과일이 왔습니다!”
“방금 구운 빵도 나왔으니 다들 맛보시고 가세요!”
“우아…… 이게 뭐예요?”
“하하, 이건 아이스크림이라고 한단다. 얼음을 얼려서 만드는 거지.”
요란 일족의 아이들은 냉동고에서 꺼낸 아이스크림이 신기한 듯 눈을 빛내며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이것일 것이다.
“샐러맨더의 비늘과 교환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재료소에 맡기시고 화폐로 교환하시면 됩니다.”
“화폐요?”
“네. 이번에 새롭게 제정되었습니다. 재료소에서 재료의 가치에 따라 금액을 책정한다고 합니다.”
바로 서로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그들도 어느새 기준을 정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필요한 것들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빵과 아이스크림 같은 음식들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서로의 벽을 허물었다는 것은 분명 유의미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탑엔 아직 공략하지 못한 층이 여전히 남아 있다. 탑의 공략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만에 하나 있을 남은 카니발을 위해서라도 성채를 번영시키는 것이 중요하겠지.’
그는 이곳이 타 차원의 전투력과 현대의 기술력이 합쳐진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빠!!!”
성채의 안으로 들어서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소민아.”
그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딸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잘 지냈어?”
“치…… 지금 그게 할 소리야? 어디 갔다 온 거야?”
“미안. 요즘 할 일이 좀 많아지네.”
“이거 봐봐! 오늘 만들었어.”
남궁은 딸이 모를 할아버지의 일이 마음에 걸려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민은 주머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어쩐지 빨리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이게 뭔데?”
소민이 들고 있는 건 작은 병 안에 든, 이름을 알 수 없는 말린 꽃이었다.
“음…….”
특별할 것 없는 꽃에 남궁은 뭐라 반응을 해야 하나 싶어 딸을 바라봤다.
“그거 아룡의 문에서만 자라는 ‘이든의 숨결’이라는 꽃잎이에요. 그걸 말려서 보관하면 밤에 빛을 뿜어내요. 저희들은 밤에 촛불 대신 써요.”
머뭇거리는 남궁 대신 들려오는 대답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넌 누구니?”
“전 테메르라고 합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소민이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남궁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챤의 아들이로군.]
라테아가 소년을 알아본 듯 남궁에게 말했다.
‘챤이라면…… 쿠가와 함께 있던?’
[맞아. 같은 사냥대에 있는 녀석이지. 어리지만 제법 실력이 좋아서 눈여겨보던 아이인데.]
남궁은 라테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소민이와 어울려 주는 모양이로구나. 고맙다. 예쁜 선물도 만들어 주고 말이야.”
“제가 만든 거 아니에요. 소민이가 만들었지.”
“그래?”
“네. 신기하죠?”
“……뭐가?”
남궁은 테메르의 물음에 다시 한번 난색을 표하며 되물었다.
“이거 보세요.”
테메르는 소민이 들고 있던 병에서 꽃잎을 꺼내서 남궁에게 주었다.
“……?!”
그 순간 놀랍게도 꽃잎이 그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쵸? 원래 저 꽃은 저희들만 잡을 수 있는데…… 신기하게 소민이도 만질 수 있더라고요. 혹시 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보고…… 지금 아저씨한테도 해봤는데, 역시 소민이만 꽃잎을 잡을 수 있어요.”
아이는 엄청난 발견을 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남궁에게 말했다.
아니, 정말로 엄청난 발견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테메르. 내가 분명 이든의 언덕에 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챤을 불러 혼을 내야겠느냐.]
“……조, 족장님!”
라테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소년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이든의 언덕은 윗층과 연결되는 문이 있는 곳이라고 챤이 말하지 않더냐. 자칫 잘못해서 문을 열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우리 요란도 이 위에 사는 자들이 누군지 모르니까.]
“저는 그냥 소민이에게 꽃잎을 보여주고 싶…….”
[핑계를 대라고 네게 말한 것이 아닐 텐데.]
“죄, 죄송합니다!!”
테메르는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뭐라 하지 마세요. 제가 테메르를 졸라서 다녀온 거예요.”
[그럼 너도 무릎을 꿇어야겠구나.]
“그만해.”
[딸을 감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훈육도 중요하다.]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라테아는 단호한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흥, 이건 선배로서 말하는 거니 새겨들어라.]
“선배?”
[이래봬도 3명의 아이를 키웠거든.]
“……뭐?”
어린 소녀로만 보였던 라테아의 말에 남궁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이든의 숨결은 테메르의 말대로 요란 일족만 만질 수 있는 특수한 꽃잎이다. 그런데 그걸 저 아이가 만질 수 있다라…… 당신 입장에선 썩 좋은 일은 아니군.]
그녀는 남궁의 머릿속에 직접 말을 걸었다.
‘무슨 의미지?’
[이든의 숨결을 이방인이 만질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차원 경계를 보여주는 증거다. 우(无)의 탑은 수많은 타 차원의 종족들이 같은 공간에 있는 거니까.]
‘그런데?’
[다른 차원의 경계를 만질 수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세계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것이겠지.]
꿀꺽-
그 순간 남궁은 처음으로 손에 땀방울이 맺혔다.
[네 아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