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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155/270)

155화

“……괴물?”

남궁은 경인의 외침에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 하하…… 이런.]

그 순간 란(亂)은 자신의 이마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린화(燐火)를 가진 아이가 있었던 건가. 보기 드문 자질인데 말이야…….]

그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경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물의 약점과 본질을 꿰뚫는 힘. 내 기운에 닿아서 그 힘이 증폭된 모양이로군.]

사람들은 그의 말에 경인의 눈을 바라봤다.

단순히 룬을 떨구는 마물을 찾아 내는 힘이 아닌 본질을 꿰뚫는 힘이라는 것에 그들은 적잖이 놀랐다.

[아이야. 나는 괴물이 아니다. 네가 본 것은 그저 위상의 본모습에 불과해.]

“……조심하세요.”

란은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그에게 말했지만 경인은 여전히 당긴 시위를 놓치 않은 채 말했다.

“내가 경계하는 건 당신의 모습이 아니야. 내 온 신경이 당신을 거절하고 있다고!”

[그래서? 내가 그럼 무엇이라 여겨지느냐. 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괴물의 힘이 필요한 법이다.]

경계하는 경인과 달리 란(亂)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그에게 물었다.

[나는 너희들을 카니발에서 자유케 해주기 위해 힘을 빌려주려는 것뿐이다.]

“가까이 오지 마!!”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우(无)는 믿어도 나는 믿을 수 없다? 그거야말로 바보 같은 소리지.]

“예전에 요르가 그런 말을 하더군. 위상은 규율을 따르는 자고 그 위상의 근본이 바로 너라고.”

[그건 애송이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태초에는 규율과 변곡의 구분이 없었다. 나와 우(无)는 하나이자 둘이지 결코 적대 관계가 아니다.]

란(亂)은 남궁의 말에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힘을 나눠 받은 위상들이 쓸데없이 카니발이라는 것을 만들고 세상을 구분 짓는 놀이를 하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거지.]

그는 자신의 이마에서 뽑은 화살을 남궁의 앞에 던졌다.

[우리가 함께 죽여야 하는 것은 위상이다. 우리끼리 싸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우우우웅…….

란(亂)이 손바닥을 펼치자 그 위로 작은 구슬 하나가 나타났다.

[하지만 나를 믿지 못하니 이건 어떠냐. 족쇄를 풀어달라는 얘기는 하지 않겠다. 대신 이걸 주마. 비록 내 힘의 일부지만 이 힘이면 탑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구슬에 엄청난 힘이 응축되어 있음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알 수 있었다.

[우(无)를 만난 뒤에 나를 찾으러 와도 좋다. 어떠냐, 이 정도면 네게 손해 될 일이 아닐 텐데.]

“아니. 그건 필요 없다.”

[어째서지? 고작 저 린화를 가진 아이의 말 때문에?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한들 겉모습에 흔들리는 애송이다.]

란은 남궁에게 말했다.

[전생의 너와 계약을 맺었던 레오릭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그게 무슨 상관이지?”

[투구 안에 있는 얼굴은 끔찍할 거다. 시체도 제대로 찾지 못했으니 영혼과 조각난 살점이 엉켜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그의 시선이 경인에게 흘렀다.

[하지만 그는 너를 도왔지. 겉모습은 추악하기 짝이 없어도 그 끝을 함께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인가?”

[그렇다. 하지만 대가 없는 맹약만큼 연약한 믿음도 없지. 아무런 이유 없이 너를 돕겠다는 것이 아니라, 너를 도움으로써 나 역시 자유를 얻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걸 받을 수 없지. 그 힘이 내게 어떻게 작용 될지 모르는데 말이야. 독이 든 사과를 먹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으니.”

[그렇다면 내가 어찌해야 힘을 빌려주겠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뭐?]

“나는 너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한 번도 우(无)를 믿는다고 말한 적 없어. 위상과 싸우자고 너희 힘을 빌려? 너희가 하는 행동이 위상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지?”

남궁의 물음에 란(亂)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골치 아픈 녀석이로군. 위상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다고 하면 충분히 내 손을 잡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꼭 힘이 아니더라도 신뢰를 쌓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정말로 나와 손을 잡을 생각이라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그게 무엇이지?]

그는 한발 물러섰다.

“탑을 부수는 것보다 더 좋은 일.”

* * *

-우(无)의 탑이라 불리는 미지의 건축물이 소환된 지 이제 세 달이 되었습니다.

-탑이 나타난 이후 지금까지 마물을 소환하는 문이 나타나지 않았는데요. 덕분에 전 세계는 기대하지 않았던 평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이 평화가 깨질지 몰라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각국 정부는 피해를 입은 도시들을 복구, 그리고 한동안 미뤄졌던 세계연합의 창설에 대한 의견을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앵커가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스튜디오에 모여 시작된 브리핑은 탑이 나타난 이래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라고는 해도, 그들 역시 탑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전무했다.

그저 탁상공론일 뿐 그들이 전하는 것은 탑 안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소식뿐.

-탑을 공략하기 위해 공격대가 신설되었는데요?

-맞습니다. 대마법사 덴 하울을 비롯하여 도약자 미카엘이 중심으로 된 능력자들이 현재 탑의 앞에 포진한 상태입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회복이 가능한 계시자였던 에이라 미쉘의 죽음으로 아직 미풍의 어머니의 계시자는 공석입니다. 회복술사가 없다는 건 아무래도 공격대 입장에서 부담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소문에는 일곱 뱀의 계시자인 남궁이 탑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앵커의 물음에 스튜디오에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현재 남궁 씨의 소재가 파악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꼭 탑에 들어갔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어째서죠?

-다들 아시다시피 대한민국을 타격했던 진웨이와 함께 에이라 미쉘이 그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진웨이야 그렇다 쳐도 에이라 미쉘의 죽음은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맞습니다. 성녀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회복술사가 죽었으니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그 때문에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현재 남궁 씨의 부재가 탑의 공략 때문이 아니라, 이번 사건으로 인한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앵커의 물음에 앉아 있던 전문가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크흠, 뭐……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입니다만…….

-그렇지 않고서는 현재 상황을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저희가 생각하는 가능성이란…….

-……!!!

그때였다.

순간 스튜디오의 불빛이 지지직 거리며 어두워졌다 돌아오자,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하고 있던 전문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 한문석 박사님?

어리둥절한 앵커의 목소리만이 스튜디오에 울렸다.

“이봐요, 도망치긴 누가 도망쳤다는 거야?”

“우, 우웁……!!”

심한 배멀미를 한 것처럼 속이 뒤집어진 한문석이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고작 도약 한 번 한 걸 가지고 호들갑은…… 몇 킬로 떨어지지도 않았구만.”

“누, 누구…….”

입가에 토사물을 묻힌 채 고개를 든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궁 씨께서 에이라 미쉘을 죽인 건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한 채 함부로 이야기를 하시면 곤란하겠죠.”

그에게 손수건을 건넨 사람이 덴 하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한문석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가능성을 얘기하기 전에 근거를 제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죄, 죄송…… 아니지. 하지만 아니라는 근거도 없지 않습니까. 저는 저의 의견을 피력한 것뿐입니다!”

“근거가 없다니. 우리가 근거인데.”

“……네?”

미카엘은 그의 어깨를 잡아 한 곳을 가리켰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있는 곳이 탑의 아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형님께서 탑에 들어가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뿐만 아니라 탑으로 갈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셨다고.”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보고도 모르겠어?”

한문석은 미카엘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꿈도 아니고 허상도 아니었다.

자신이 탑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남궁 님께서 알려주신 것과는 사실 상관이 없긴 하죠. 미카엘의 방법은 전혀 다르니까.”

“크흠, 그렇긴 하지만…… 그건 덴 하울,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내 힘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걸?”

덴 하울의 말에 미카엘이 머리를 긁적였다.

“탑에서 만나길 바랐는데 여기서 수다나 떨고 있을 줄은 몰랐군. 다들 한가해 보이는데?”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는 사람들도 잔뜩 데려오고.”

“형님!!”

“일부러 데려온 것은 아닙니다. 사실 미카엘이 탑에 도착할 방법을 찾아서…… 저희가 탑을 공략하려 했었습니다.”

‘나, 남궁이잖아……? 정말로 탑을 공략하러 간 거였어?’

미카엘과 덴 하울의 반색에 한문석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론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더라고요. 형님께서 진웨이와 에이라 미쉘을 죽인 것 때문에 숨었다고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래서 보다 못해 그만…….”

“그래서 엉뚱한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온 거냐.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다시 데려다주고 와.”

순간 미카엘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1초도 안 되는 찰나였다.

“놀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지.”

남궁은 미카엘의 공간 도약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요. 탑의 문을 열어보려고 의식의 공간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다 보니…… 덕분에 도약술만 더 강해졌네요.”

“그래서 공간 도약으로 이 허상의 세계 안까지 들어왔다?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뭐, 어떻게든 길만 찾으면 되지 않겠어요? 아무리 해도 저는 명훈 형님처럼 안 되더라고요.”

미카엘이 남궁의 뒤에 있는 명훈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나저나 어떻게 돌아오신 겁니까? 연락이 닿지 않아서 걱정했습니다.”

“던전의 출구가 열리는 이유야 하나뿐이지.”

“설마…… 탑을 공략하신 겁니까?”

“비슷해.”

쿠그그그그…….

놀랍게도 그 순간, 허상처럼 보이던 탑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

열린 문 사이로 처음 보는 일족들의 모습이 보이자 미카엘과 덴 하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궁을 바라봤다.

“지원군이다.”

“도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끝없이 쏟아지는 사람들의 행렬에 덴 하울이 그에게 물었다.

“탑을 빼앗았다.”

“……네?!”

“와씨…… 형님 건물주 되신 겁니까?”

흰소리를 하는 미카엘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며 남궁을 하늘을 올려다봤다.

▶ 고대 바위가 눈을 뜹니다.

▶ 여섯 번째 축제가 시작됩니다.

“축제라…… 그래, 이제 좀 어울리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알림에 그는 차갑게 웃었다.

“한번 즐겨볼까?”

사람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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