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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152/270)

152화

“라테아가 자네를 시험한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걸세. 탑을 부순다는 건…… 그야말로 위상에게 반기를 드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자네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을 게야. 레오릭과 같은 압도적인 힘을 가지지 않고서는 생각도 하지 못할 계획이니까.”

“하나 자네는 보란 듯이 그것을 증명해 냈지.”

남궁은 장로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그 아이는 우리가 허락을 내리도록 자네의 힘을 보여준 것이 틀림없어.”

“그녀는 레오릭의 딸이니까.”

“……뭐? 15번째 문이 열렸을 때 레오릭이 성인식을 끝냈다고 하지 않았나?”

그들의 말에 남궁은 헛기침을 터뜨리며 되물었다.

“그게 뭐가 이상하지? 성인식을 치렀다는 건 성인이 되었다는 것인데.”

“뭐, 그렇긴 하지만…….”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네. 우리의 시간은 멈춰 있지만 지나온 세월은 수백, 수천…… 아니, 더 이상은 셀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니까.”

“이 탑에 그렇게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것인가?”

남궁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물밖에 없는 이 세계는 그야말로 계속해서 카니발을 진행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평온한 삶을 위한 곳이 아닌 감옥이니까. 그래도 다행이지. 일족이 함께 있을 수 있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린 미쳐 버렸을 걸세.”

“그렇다면 레오릭은 어째서 내 차원에 있었던 거지?”

“그건…….”

그때였다.

“그건 내가 말하지.”

남궁은 굴 밖에서 들려오는 여린 목소리의 주인이 라테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꽤나 깜찍한 짓을 했더군.”

“미안하게 되었어. 자네가 회귀를 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긴 하지만 탑을 부수겠다는 얘기는 쉽게 믿을 수 없었거든.”

“그렇다고 해도 고작 바실리스크를 사냥하는 것으로 내 강함이 증명되는 것도 우습군.”

“이곳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니까.”

라테아는 남궁의 핀잔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더 강한 게 하나 있긴 할 텐데.”

“……뭐?”

스릉―

그때였다.

그가 쥐고 있던 레오릭의 단검이 라테아의 목을 겨누었다.

“너 말이야. 레오릭의 딸이라고? 그의 피가 흐른다면 제법 쓸 만 할 텐데. 일족의 수장 정도는 잡아야 다른 일족들도 납득하지 않을까?”

“머, 멈추게!!”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장로들은 남궁의 말에 깜짝 놀라며 소리쳤지만 라테아는 오히려 애틋한 눈빛으로 단검을 바라봤다.

“그 검으로 죽는다면 그 또한 영광이겠지. 하지만 아직은 죽을 수가 없어. 당신에게서 아버지의 얘기를 들었으니 말이야.”

그녀는 자신의 목을 겨눈 단검을 손끝으로 천천히 내리 눌렀다.

“…….”

그가 들고 있던 단검의 끝이 서서히 내려갔다.

작은 체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대단한 힘에 남궁은 그녀를 바라봤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차원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계시자이기 때문이야.”

“……계시자? 너의 요란은 성인식을 치르고 난 뒤 진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카니발 도중에 성인식을 치렀다고 들었는데.”

“맞아. 아버지께서는 조금 특별한 계시자거든. 모든 카니발은 8명의 위상이 관장하지만…… 우리가 있던 차원만은 9명의 위상이 존재했어.”

“9명?”

남궁은 그녀의 말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상이지만 위상이지 않은 존재.

그런 자를 알고 있었다.

바로 이 탑의 이름과 같은 존재 말이다.

“우(无)…….”

“맞아.”

라테아는 그의 깨달음에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성인식을 치렀을 때 우(无)가 깨어났고, 그가 나의 아버지를 계시자로 선택하며 위상들의 싸움에 가담하셨다.”

“그런 레오릭이 카니발을 끝냈다…… 그 말은 위상들의 싸움에서 우(无)가 우승을 했다는 말 아닌가?”

“그렇지. 두 사람은 모두 권좌에 올랐다.”

“갈수록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런데 어째서 우는 탑에 갇혔고 레오릭은 영혼만 남겨진 채 유배되듯 내 차원에 있는 거지?”

“문제는 그들이 권좌에 오르기 전에 폐위되었다는 것이지.”

“……흠?”

“아버지께서는 왕좌 쟁탈전에서 승리했고 우(无)는 위상들 중 최고위의 자리에 올랐다. 둘은 세계를 바꿀 변곡점에 섰어.”

“레오릭은 카니발에 희생된 자들을 모두 되살리려 했다고 하던데…… 우(无)는 무엇을 원했지?”

“그는 남아 있는 모든 위상들을 소멸시키고자 했다.”

충격적인 얘기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째서 우(无)가 봉인이 되어 있었는지도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위상들은 패배했지만 그의 결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자는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 자신들을 소멸시키려는 자를 가만둘 리 없잖아.”

“결국 우(无)는 봉인되었고 아버지는 다른 차원으로 추방당했다. 하지만 봉인되기 직전, 우(无)는 자신의 술법으로 아버지의 존재를 은닉시킬 수 있었다.”

“그게 가능한가?”

“나도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우(无)가 말하길 자신은 그 어떤 위상보다 오래된 자라고 했다.”

라테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힘은 절대적이지 않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원칙을 비트는 것.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것……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위상들이 레오릭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건가?”

“우(无)가 위상들의 기억을 비튼 것이지. 자신의 계시자를 위해서.”

‘그렇게 된 것이로군…….’

퍼즐이 맞춰지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생각지 못한 그들의 과거에 남궁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레오릭의 영혼과 내가 전생에 만난 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일까.’

그리고 전생에는 알지 못했던 우(无)를 이번 생에 만나게 되었다.

그 둘이 위상과 계시자의 관계라는 것도 놀랍지만, 마치 연결 고리처럼 그들 사이에 자신이 끼어 있는 것도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가 있다.’

남궁의 직감이 그리 말했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은 어떻지?”

“우(无)를 만나게 도와주마.”

“…….”

“탑을 부수려면 그의 힘이 필요할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군. 위상들이 바보도 아니고…… 내가 그를 만날 수 있다면 과연 나를 탑에 보냈을까?”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남궁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유라는 달콤한 보상을 내걸어 위상은 너와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거야. 그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자신들을 거역하지 않는 자를 뽑기 위해서 말이지.”

꽈악―.

라테아는 남궁에게 들려 있던 단검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예상은 깨지라고 존재하는 법이니까.”

“뭘 할 생각이지?”

“말했잖아. 나는 레오릭의 딸이라고.”

“……!!!!”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검으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촤아아악---!!

반쯤 베어진 목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무, 무슨 짓이야!!”

남궁은 소리치며 쓰러지는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투구를.”

피가 쏟아지는 목을 움켜잡고서 약을 꺼내려는 그의 팔을 잡으며 그녀가 말했다.

“뭐?”

“내게 아버지의 투구를 다오.”

“그게 무슨 말이야? 레오릭의 투구는 죽은 자만이 쓸 수 있…….”

그 순간 남궁은 깨달았다.

어째서 그녀가 자신의 목에 단검을 그었는지 말이다.

“설마 너…….”

“탑을 나가거라.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우(无)가 이루지 못했던 염원을 이루어라.”

그녀는 입안 가득 피를 머금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솨아아악……!!!

그리고는 있는 힘껏 투구를 뒤집어썼다.

▶【군주 레오릭의 투구】를 사용하였습니다.

▶ 오직 망자만이 투구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크아아아악!!!”

투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들이 그녀의 전신을 날카롭게 관통했다.

그녀의 입과 코, 그리고 귀, 심지어 땀구멍까지 몸에 있는 온갖 구멍에 검은 연기가 파고들었고,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터뜨렸다.

▶ 주인이 아닌 자가 사용할 경우 투구의 힘이 제한됩니다.

▶ 레오릭의 혈통이 확인되었습니다.

▶ 투구의 힘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망자화가 가능합니다.

철컥―!!

촤르르륵……!!

투구의 안면부가 아래로 내려오며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전생의 레오릭처럼, 투구에 가려진 눈에서 붉은 안광이 피어올랐다.

[이게…… 아버지께서 보시던 세상인가.]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투구를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을 할 수 있나? 아니, 그보다 살아 있는 건가?”

남궁은 라테아의 모습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생에 자신과 계약을 맺었던 레오릭은 정신 계열로, 서로의 의사를 알았을 뿐 언어로 대화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하지만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조금만 틈을 보이면 투구에 잡아먹혀 사라질 것 같은 위압감이다.]

라테아는 투구를 만지며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느껴진다. 이거라면 탑의 지하에 있는 우(无)의 문을 열 수 있을 거다.]

“괜찮겠어?”

[걱정하는 거냐. 오히려 나는 기쁜걸. 아버지의 투구를 가진 너를 만났으니 말이야. 탑에 이방인이 온 것은 네가 처음이 아니다. 그 전에도 당신과 같은 자들이 수없이 많이 왔었다.]

그녀는 남궁을 바라봤다.

[그들 모두 위상에 반기를 들었던 자들이지. 하지만 이곳에 온 이후 그들 중 누구도 그 의지를 지킨 자는 없었어. 모두 우리를 죽이고 탑에서 탈출하려고만 했을 뿐.]

남궁의 뺨에 손을 얹었다.

움찔-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녀의 손에 남궁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에 체감이 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서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신은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탑을 부수겠다는 그 의지를 우리에게 말했지. 그것을 믿어 보려 한다.]

“단지 그뿐은 아닐 텐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레오릭과 관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지?”

[클클…….]

“도대체 언제부터지? 널 만났을 땐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처음 봤을 때부터.]

“……뭐?”

[당신에게 그의 냄새가 배어 있었거든. 어린 시절부터 맡아 왔던 냄새 말이야.]

남궁은 그녀의 말에 슬쩍 소매를 들었지만 느껴지는 것은 바실리스크의 피 냄새뿐이었다.

[아비가 자식을 잊지 못하듯 자식이 아비를 몰라볼 리 없잖느냐.]

투구 뒤로 보이진 않지만 그의 모습에 라테아는 웃는 듯 보였다.

[자네도 그럴진대. 안 그래?]

남궁은 그녀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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