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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145/270)

145화

[크…… 크하하하하!!!!]

해와 달의 관망자는 남궁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이게 다 네가 만든 그 말도 안 되는 안배 때문이잖아. 두르가.]

[……멋대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이제 와서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지금 저놈 때문에 우리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는데.]

빛 무리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요르.”

남궁은 그들의 모습을 훑고는 자신의 위상을 불렀다.

[알겠다.]

요르는 그의 생각을 읽은 듯 가볍게 손을 저었다.

솨아아아악---!!

그러자 시야가 역전되며 처음 보는 공간이 나타났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감염자와 변이자들로 폐허가 된 도시에 있었지만, 지금은 고대의 신전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원형의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앉아라.]

요르가 남궁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날뛰던 빛 무리들이 일제히 하나둘 원형 탁자의 의자 위로 안착했다.

[이곳은 그림자 회랑이다. 카니발을 주관하는 위상들이 참가자들을 관찰하는 곳이지.]

“이런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단 말이군. 신이 된 기분이겠어.”

원탁과 의자 아래 바닥에는 전세계의 풍경이 차례차례 비쳐지고 있었다.

[실제로 신인데?]

요르는 턱을 괴며 피식 웃었다.

[하긴, 네가 우릴 그리 여긴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테지. 신이든 인간이든…… 그런 등급이 무슨 상관이겠나.]

타앙-!!!

그의 허리 뒤로 칠흑같은 뱀의 꼬리가 튀어나와 탁자를 내려쳤다.

[중요한 건 네가 우리와 함께 이곳에 있다는 것이겠지. 드래곤이든 정령왕이든…… 제아무리 계의 상급자라 하더라도 위상이 아닌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 이 금역에, 인간인 네가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떠들썩 했던 홀 안이 조용해졌다.

의자 위에 떠 있던 빛의 구가 서서히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이었나.’

남궁은 위상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모습은 가지각색이었다.

늙은 노인도 있고 다부진 근육질의 장정도 있었다. 혹은 인자한 여인부터 눈을 반짝이는 아이의 모습까지…….

모습만 놓고 본다면 그들은 한 없이 인간과 닮았다.

빠득-

하지만 그렇기에 남궁은 더욱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무나도 친근한 저 모습으로 인간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양분 삼아 유흥을 즐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회귀 같은 기회를 주는 게 아니었어.]

[내 불찰이다. 다시 기회를 얻게 된다면 우리들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욱더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인간의 무지가 이 정도 일 줄이야.]

원탁에 앉아 있는 위상들 중 여인의 말에 늙은 노인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저들이 미풍의 어머니와 해와 달의 관망자로군.’

남궁은 마치 그들의 얼굴을 눈에 새기려고 하는 듯 깊게 바라봤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간단하다. 관객이면 관객답게 카니발에서 물러나 지켜보기만 해라.”

[강림을 포기하라는 뜻이냐. 그건 거래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로 보이는데.]

다부진 근육을 가진 사내는 화롯불을 다루는 자가 틀림없었다.

“어차피 진웨이는 만신전의 승리는커녕 제물이 되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인데 뭘 믿고 그렇게 콧대를 세워 말하는 거지?”

[……뭐?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진정하세요.]

모묙의 가지들로 둘러싸여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이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가시덩굴의 미망인…….’

남궁은 그녀를 바라봤다.

록산느의 위상인 그녀는 인간에게 딱히 우호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가장 중립적인 위상.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위상이기도 했다.

단순히 개인적인 친분이나 그녀의 능력만이 아니라 위상의 성격 또한 남궁이 록산느를 동료로 만들었던 하나의 요인이었다.

[만신전이 우리의 의도와는 달리 흘러갔지만 좋아요. 그것마저 계시자들이 만든 결과니까. 우리의 강림을 원치 않다면 그리해도 좋습니다.]

[……잠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강림을 포기하겠다니. 카니발에 있어서 위상의 강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알아요. 위상은 결국 인간의 숭배가 있어야 더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는 것. 카니발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런 숭배를 위한 장이라는 것도.]

[그걸 알면서 성전을 포기하자고? 그러다 다른 카니발의 위상들에게 뒤처지기라도 하면?]

[황혼의 순간이 왔을 때 소멸당하고 싶어? 그렇게 되면 이 차원도 끝이라고!]

가시덩굴의 미망인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반발이 일었다.

[후…… 답답하군. 어리석은 인간들이 무엇을 알겠어.]

[저들에겐 지금 이 순간이 잔혹할지 모르지만 이 시기조차 저들을 살리기 위한 우리의 안배라는 걸 말이야.]

[그런 것도 모르고 날뛰는 녀석…….]

남궁은 그들의 말을 유심히 살폈다.

‘카니발이 다른 곳에서도 벌어진다는 건가. 하긴…… 따지고 보면 올림푸스의 신들이나 우리가 지금껏 믿었던 신들도 과거의 위상들이라고 했었어.’

그렇다면 이미 이 세계에도 위상들이 존재했었다는 말일 테니, 다른 차원에 위상이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카니발이 끝난 이후겠지.’

과연 모든 문을 클리어하고 나면 그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어쩐지 남궁은 다른 차원의 위상들의 존재가 자꾸만 걸렸다.

[우리는 성물을 완성하고 성전을 세우길 원한다.]

[그래, 네가 바라는 것은 뭐지?]

위상들이 남궁에게 물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그들이 이제 그와 거래를 하려는 의지가 보인다는 점이었다.

“간단하다. 카니발을 끝내.”

[그건 불가능하다. 우리가 카니발을 관장하지만 카니발은 원한다고 해서 열고 닫는 그런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태초부터 이어져 온 행위니까.]

“그렇다면 성전을 소환하는 것은 포기하도록 해.”

남궁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단순한 허풍인지 아니면 진짜로 할 수 없는 일인지 말이다.

[설령 성전을 포기하더라도 카니발은 끝낼 수 없다. 애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거든.]

사계절의 방랑자의 대답에 남궁은 요르를 바라봤다. 그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교섭은 결렬이군.”

[이봐! 지금까지 우리가 하는 말 못 들었어? 황혼의 순간이 온다고!!]

[그때가 오면 모든 위상들이 한 곳에 모여 최후의 전쟁을 벌인다. 우리는 그 전에 강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신전을 통해 성전을 내려 신도들을 모아야 하고.]

[관두라니까. 쇠심줄 같은 놈. 저 녀석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알겠다.”

남궁이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부서진 2개의 성물을 제외한 나머지 6개의 성물이 나타났다.

[…….]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위상들의 입이 조용해졌다.

쾅-!! 쾅-! 쾅---!!

남궁이 있는 힘껏 성물을 주먹으로 두들겼고, 그의 주먹이 원탁을 내려칠 때마다 성물들은 사정없이 산산조각 났다.

[자, 자, 잠깐!!!]

위상들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마지막 한 개의 성물이 남았을 때 누군가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설마 쪽팔리게 인간에게 부탁이라도 하려는 거야? 차라리 성위전쟁에서 패배하면 패배했지 그런 짓은 하지 마라.]

[나도 동감이다. 다음을 기약하면 그만이지.]

[……너희들은 그렇겠지.]

남궁을 막은 위상은 다름 아닌 미풍의 어머니였다.

‘가장 먼저 부쉈어야 하는데 이게 남아 있었나.’

어차피 다 부술 생각이었어서 순서를 보지 않았었는데. 남궁은 그녀가 자신을 막은 것에 조금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사정이야 모두 알고 있을 테니 내게 부탁을 할 위치가 아닐 텐데.’

설귀산에서부터 에이라 미쉘이 했던 일까지…….

위상들 중에서 가장 자신과 관계가 좋지 않은 그녀가 말을 건 것이다.

[너희들이야 이번이 아니더라도 기회가 있지. 하지만 나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성위전쟁에 참가도 해보지 못한 채 소멸할 수는 없다고.]

[뭐야…… 그런가?]

[김새는군.]

미풍의 어머니의 말에 다른 위상들은 어쩐지 반박보다는 그녀를 측은하게 대하는 모습이었다.

‘성위전쟁이 뭐지? 대충 분위기를 봐선 다른 차원에서 열린 카니발이 끝난 뒤에 벌어지는 위상들끼리의 이벤트인 것 같은데…….’

남궁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생에 카니발에선 모든 계시자가 죽었으니 승자가 있을 리 없었으니까.

[성물은 다시 만들면 된다. 잘 생각해 봐. 두르가, 당신이 만든 안배를 통과해서 회귀를 한 자가 저 인간이라면 결국 전생에 우리는 카니발에 실패한 것이란 말이잖아. 그게 무슨 의민지 알 텐데?]

[계시자가 모두 죽었다는 것이니…… 우리 위상들 중에 승자가 나오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그래. 그럼 우리는 끝이다. 우리끼리 경쟁을 할 일이 아니었어. 힘을 합쳐야 할 때라고.]

[……그래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 순간 위상들이 미풍의 어머니의 말을 주시했다.

[인간을 너무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뭐, 솔직히 우리가 인간들이 발버둥치는 걸 유흥거리로 삼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멸망하길 바란 건 아니야.]

“당장에라도 이걸 부숴 버리고 싶은 말이군.”

남궁은 들고 있던 성물을 내려 칠 기세로 말했다.

[잠깐, 잠깐! 지금 우리도 후회 중이야. 일이 이렇게 꼬이길 바랄리가 없잖아? 그러니…… 너희를 강하게 만들어 주겠어.]

[무슨 말이야. 라나, 그게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일이었잖아. 성전을 열어서 위상의 힘으로 인간을 강화시켜주는 거랑 뭐가 달라?]

[다르지. 성전을 세우면 결국 위상의 계시자들은 신도들을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될 테고, 그렇게 되면 또다시 분쟁이 일어나겠지. 그걸 막기 위해 남궁이 우리를 협박하는 것이고. 안 그래?]

“잘 아는군.”

[위상이 관여하는 것이 싫다면 너희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어떻게?”

[우(无)의 탑을 열어주마.]

[……이런 미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걸 소환하게 되면 이 세계가 완전히 바뀐다고!]

미풍의 어머니의 제안에 다른 위상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탑이 뭐지?”

[말 그대로 우가 갇혀 있는 탑이다.]

“전에 너희가 나를 엿 먹이려고 만나게 했던 위상 말이로군. 이 사슬의 주인 말이지.”

[……맞다.]

미풍의 어머니는 남궁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잘 생각해. 놈이 풀어나기라도 하면 성위전쟁에 나가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럼 별수 있어? 성전을 열지 않고 인간들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그것 말고 또 뭐가 있냐고.]

“그런데 그 탑이 소환된다 한들 우리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뭐지?”

[탑 안에 우(无)가 갇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곳에 꼭 우(无)만이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

[그곳엔…….]

미풍의 어머니는 남궁을 향해 말했다.

[카니발에 패배했던 온갖 종족이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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