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헉……! 헉……!!!”
연무장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주변으로 그 숨소리의 주인공을 보는 걱정스러운 눈빛들이 가득했다.
“포기해라. 글렀다.”
“……한 번만 더.”
“정말 너나 남궁이나 쓸데없이 포기를 모르는군.”
알렉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명훈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당신이 다시 온 건 나를 가르쳐 볼 마음이 들었기 때문 아냐?”
“아니. 네게 현실을 알려주려고 하는 거지. 711 부대? 날고 긴다고 해봐야 결국은 세계에 널리고 널린 게 특수부대다. 그중에서 탑도 아닌 서브.”
그는 바닥에 떨어진 명훈의 검을 발로 차 그에게 밀었다.
“남궁 때문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것 같아서 밟아주려는 것뿐이야.”
“저 새끼…… 말하는 본새하고는.”
호준이 알렉을 노려보며 당장에라도 달려갈 것 같은 기세로 몸을 들썩였다.
“가자.”
하지만 그런 그를 창환이 막았다.
“그냥 보고 있을 겁니까? 저거 딱 봐도 형님 괴롭히려고 온 거잖습니까. 도와주기는 개뿔……!!”
“괴롭히든 도움을 받든 명훈이가 선택한 일이야. 우리가 왈가왈부 할 필요 없어.”
“하아…… 이런 상황에 도대체 대장은 어딜 간 건지…….”
청와대 복도에서 무스타파를 만나 갑자기 중동으로 가게 된 남궁은 연이은 사건들로 그들에게 아직 제대로 된 연락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명훈이는 놔두고, 우리는 우리 일이나 하자.”
고달픈 훈련이었지만 창환은 압도적으로 강한 알렉과의 대련이 분명 명훈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를 모르겠군. 강자와의 싸움은 경험을 채워줄 순 있어도…… 기술적인 부분은 결국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법인데.’
계속해서 얻어터지기만 하는 명훈이 과연 알렉 트라만의 검술을 익힐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끄응…….”
명훈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야차 환도】를 집으려 했다.
‘무겁다.’
그리고 손잡이를 드는 순간, 명훈은 쇳덩이를 드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전신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는 감각을 느꼈다.
[크르르…….]
자신의 주인이 힘들어하는 걸 봐서일까.
훈련장 한편에 웅크리고 있던 명훈의 소환수가 알렉을 바라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검은 어디서 배웠나.”
“처음에는 부대에서 배웠고 그 뒤로는 여기저기에서…… 도장을 돌아다니며 익혔다.”
“잡식이로군. 그러니 검이 더럽지. 솔직히 말하지. 일단 네 무기부터 잘못되었다.”
명훈은 알렉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기술로 검의 무게를 커버하고 있다지만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결정적인 순간에 반 템포씩 늦어. 그래, 너는 그런 검보다는 이런 쪽이 어울릴 거다.”
알렉은 명훈의 환도 대신 자신의 【별해검】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적절한 검의 무게는 네 기술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끌어 올려줄 거다. 뭐, 그래도 잡기들로만 가득한 지저분한 검술이지만.”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냐?”
알렉의 말에 명훈도 질세라 반박했다.
“나야말로 여의도 때부터 눈치챘어. 당신도 장검술이 익숙하지 않다는 거 말이야. 스텝을 보면 더 가벼운 검을 쓰는 것 같은데. 아니야?”
알렉은 명훈의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곧 웃었다.
“남궁이 그래도 기대를 하는 이유가 있긴 하군. 맞아. 원래 내 전공은 단검술이다. 장검술을 익힌 건 검을 얻고 난 뒤니…… 기껏해야 1년도 안 되지.”
“그런데도 그 정도의 습득력이라니…… 계시자는 다르긴 다르군. 진짜 현실을 알려주니까.”
“그러는 넌?”
“부대에서부터 도장을 다니면서 눈동냥을 한 것까지 대충 10년. 그래도 당신에겐 안 되는군.”
창그랑-
그때였다.
“……?!”
명훈은 자신의 앞으로 떨어진 【별해검】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알렉을 바라봤다.
“장인은 무기를 탓하지 않지만, 장인이 좋은 무기를 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한 법이지.”
알렉은 그렇게 말하며 허리에 달린 가죽 주머니에서 나이프 몇 자루를 꺼냈다.
“한 번 써봐.”
꽈악-
손잡이를 잡는 순간부터 착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별해검】을 잡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같은 무기라면 10년의 경력이 어쩌면 내 1년과 비슷할 수도 있지.”
“그 말이 더 열받는데. 내가 그토록 노력한 10년의 시간이 고작 1년 만에 따라잡히다니 말이야.”
“아니지. 나와 비슷하다면…….”
알렉은 그를 향해 피식 웃었다.
“가츠마타에게 질 리 없다는 뜻이지.”
카아아앙……!!!
그리고 두 사람의 검이 부딪혔다.
“방금 저거 무슨 의미일까요?”
“뭐가?”
“이상하지 않아요? 알렉이 자신의 검을 명훈 형에게 줬잖아요.”
“뭐, 그냥 빌려준 거겠지. 조금 전에 말했잖아. 형님이 무기가 맞지 않아서 진짜 실력을 낼 수 없다고 말이야.”
호준은 경인의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지만, 그의 대답에 오히려 훈련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의혹은 더욱 커졌다.
“알렉은 명훈이 일본에 갈 때 자신의 검을 맡기려는 걸까.”
“에이, 형님도. 그럴 리가요. 계시자가 위상에게 받은 선물을 남에게 빌려준다고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흐음…….”
창환은 알렉을 바라봤다.
‘이상한데.’
저격수의 감일까.
이유는 알 수는 없지만, 어쩐지 그는 알렉이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 *
“여긴…….”
“오, 이제 깨어났군. 한잔하는 게 어때? 두통엔 술이 직방인데 말이야.”
정신을 잃었던 박효주는 눈을 뜨자 시체가 가득했던 끔찍한 광경이 아닌 포근한 침대 속이라는 것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훑었다.
쿵- 쿵- 쿵-
창밖으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끔찍했던 화물선의 풍경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박효주가 침대에서 고개를 들어 남궁을 바라봤다.
“죄, 죄송합니다. 흐어어엉…….”
창밖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바닥에 뻗어 있는 무스타파의 모습도 보였다.
“몰디브야.”
남궁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무스타파를 발로 떨쳐내며 박효주에게 대답했다.
“모, 몰디브요……?”
“평온하지? 카니발에 영향을 받지 않은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거든.”
그의 말대로 이곳은 예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숙소 밖으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죠?”
“마물의 침공 이후 교통편이 끊겨 외부의 유입이 막혔거든. 물론, 이곳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갈 방법은 없어졌지만 현재는 대륙보다 섬들이 더 안전하지.”
“그래도…… 위험한 거 아닌가요? 마물이 소환이라도 되면 아예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거잖아요.”
박효주는 불안한 듯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래서 저렇게 웃고 떠드는 거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현실판 엘도라도네요…….”
“하지만 선을 넘게 되면 그저 환락의 땅이 되어버릴 수도 있지.”
남궁은 담배의 불을 끄고는 술을 삼켰다.
뜨거울 정도로 독한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이제 곧 마물의 습격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망가지는 사람들이 생기겠지.’
마치 꺼지기 직전에 타오르는 촛불처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몰디브라니…… 구명정으로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나요?”
“당연히 불가능하지. 운 좋게 화물선에서 주술사 하나를 영입했거든.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어.”
“……주술사요?”
키만 얀을 영혼 사역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박효주는 여전히 어리둥절해 보였지만 남궁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것 같아요. 이제 방법을 강구…….”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던 박효주는 찌릿한 두통에 휘청거렸다.
툭-
흔들리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남궁이 다시금 침대에 눕혔다.
“쉬어. 네가 아니더라도 일은 이미 진행되고 있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박효주는 이불에 얼굴을 묻으며 대답했다.
우우우웅…….
그때였다.
“형님!!!”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미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느라 수고했다.”
“에이, 수고는요. 런던에 가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니죠. 오히려 연락받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저는 형님께서 이동술이라도 익히신 줄 알았습니다.”
일그러진 사이로 튀어나온 미카엘이 남궁을 와락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성물은?”
“일단 멕시코에 생성된 던전의 성물은 확보했습니다. 사계절의 방랑자의 성물이더군요.”
“잘했어.”
“에이라 미쉘이 제게도 왔었습니다.”
“그녀가 뭐라고 하던?”
“일곱 뱀의 성물을 모두 확보할 수 있다, 형님께선 절대로 성물을 완성시킬 수 없을 테니 자신과 힘을 합치자던데요.”
“들리는 소문엔 하나가 록산느에게 있다던데.”
“네, 맞습니다. 그 자리에 그녀도 있었거든요. 그리고 계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물을 보여줬습니다.”
미카엘은 탁자에 놓인 사과를 베어 물며 말했다.
“아, 그리고 그 자리엔 진웨이도 있었습니다. 분위기를 봐서는…… 이미 에이라 미쉘과 손을 잡은 것 같았어요. 첫 제안을 받은 록산느는 고민을 하는 것 같았고요.”
“좀 놀랍네요. 록산느 씨가 그런 일로 고민을 하고 있다니요.”
아이슬란드에서 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던 박효주는 미카엘의 이야기가 제법 충격이었다.
“그럴 수밖에요. 지금 에이라 미쉘이 확보한 3개의 성물 중에는 가시덩굴의 미망인의 것도 있거든요.”
“성물을 인질로 삼았다…… 이건가.”
과연 그녀다웠다.
‘에이라 미쉘과 손을 잡을 생각이 없다 해도 성물 때문에 방해도 할 수 없을 테니.’
“진웨이가 보고 배운 모양이야. 내게도 비슷한 수법을 쓰려는 것 같다. 성물을 인질 삼아 내 행동을 제약시키려고 말이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나머지 계시자들은 지금 뭘 하고 있지?”
“음…… 덴은 만신전이 시작하자마자 종적을 감췄어요. 마법 연구를 한다는 얘기가 있긴 한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알렉이 2개의 성물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이렇다 할 제스처를 취하지 않고 방에만 있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남궁은 그가 가진 성물 중 하나가 뭔지 예상이 되었다.
‘알렉이 미풍의 어머니의 성물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로군. 그렇지 않다면 이미 에이라 미쉘이 그와 접촉을 시도했을 텐데.’
적색지대 이후 사이가 뜸한 둘 이었지만 에이라는 그런 사소한 불편함 때문에 만신전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 접촉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알렉이 에이라와의 만남을 거절하고 있다…… 시간을 끌고 있군.”
그리고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걸 직감했다.
‘전생과 비교해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게 된 게 알렉 트라만일 테니까. 그의 생각이 앞으로 있을 카니발에 많은 영향을 줄 거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무명이 얘기한, 성흔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계시자의 힘을 잃었다면 에이라 미쉘이 그걸 알게 되었을 때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당장 무력으로 그가 가진 성물을 빼앗으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니나가와 에리카는?”
“환선굴의 성물을 포함해서, 지금 소문엔 그녀도 3개의 성물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같았어요.”
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잠잠한 걸 봐서는…… 보유한 성물을 가지고 딜을 하려는 거 아닐까요?”
“모르긴 몰라도 진웨이와 덴 하울도 1개의 성물은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이대로 괜찮을까요?”
계시자들이 최소한 1개의 성물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궁만이 아무것도 없었다.
박효주가 걱정스러운 듯 그에게 물었다.
“서두를 필요 없어. 아직 7개의 성물이나 찾지 못했어.”
“하지만 발견된 성물 중에서 완성할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지금 누가 어떤 성물을 확보하고 있다고 하는 건 결국 입소문에 불과해. 거래를 위해서라도 녀석들은 서로가 가진 패를 확인하고 싶겠지.”
“흐음…… 그렇겠죠.”
“그렇게 보고 싶다면 보게 해주면 되지.”
“……네?”
남궁의 말에 박효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미카엘. 계시자들에게 가서 내 말을 전해. 이틀 뒤, 이곳에서 성물을 두고 거래를 시작할 것이다. 참가하고 싶은 자들은 모두 오라고.”
“자, 잠깐만요! 우리는 성물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런데 무슨 거래를 한다는 거예요?”
“한번 봐봐.”
남궁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모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