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저……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그저…… 위상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에이라 미쉘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애원하듯 남궁에게 말했다.
까크크큭…!!
남궁이 그녀의 어깨에 박아 넣은 검을 비틀었다. 그러자 뼈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살점을 파고들었다.
“아아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지만, 그럴수록 검날은 더욱더 깊게 박힐 뿐이었다.
“그건 대답이 안 돼.”
남궁은 발버둥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네가 헛소리를 했지. 덴 하울이 내게 누명을 씌우려고 했다는 걸 알려주는 대신, 나와 손을 잡자고 말이야.”
꽈악-
그는 에이라의 손등을 밟으며 말했다.
“그러니 얘기해.”
“미, 미풍의 어머니께서…… 알려주셨어!! 사계절의 방랑자가 전설급 퀘스트를 시작할 거라고!”
‘흐음…….’
“계속해.”
“……어머니께서 내게 그 사실을 당신한테 얘기하라고 했어. 그렇게 해서 덴 하울이 퀘스트를 실패하게 만들고, 그를 제물로 쓰게 말이야!”
그녀는 다급히 소리쳤다.
‘제물……?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건가?’
남궁은 살짝 눈을 흘겼다.
“다, 당신도 알 거야. 전설급 퀘스트는 세상의 판도를 바꿀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위상마다 하나씩만 열게 해놨을 정도로 중요하지.”
에이라는 남궁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만큼 달성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해. 그러니 조, 조금은 기뻐해도 좋지 않겠어? 당신한테 누명을 씌우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니까.”
“내가 원하는 대답은 그런 사탕발림이 아니란 거 알 텐데.”
“…….”
감정 변화 없는 그의 대답에 에이라의 입술이 씰룩였다.
“크흑…… 그래. 미풍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사계절의 방랑자가 계획한 퀘스트는 단순히 당신에게 누명을 씌우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당신을 제물로 만들어 죽이는 것이랬어.”
말을 하던 그녀는 어느새 남궁의 눈치를 슬쩍 보며 박혀 있던 검을 뽑아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회귀자인 당신이 죽는다? 사실 그거야말로 앞으로의 결말을 바꾸기에 충분한 사건이니까. 전설급 퀘스트에 어울리지.”
그녀는 눈썹을 들썩이며 그의 비위를 맞추듯 배시시 웃었다.
“그 사실을 안 미풍의 어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셨어. 당신을 도우라고.”
“그 말은 네 위상이 내 편이 되고자 한다는 뜻인가?”
“맞아. 전에도 당신이 말했잖아. 어차피 우리는 경쟁을 해야 하는 사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경쟁자가 너무 많지. 조금 줄어들 때까지는…….”
그녀는 굳은 피가 묻은 손을 내밀며 남궁을 향해 말했다.
“손을 잡는 것도 좋잖아?”
“네 말대로……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그럼!!”
“게다가 만신전에는 제물이 필요하니까.”
그러자 에이라 미쉘은 마치 기회라는 듯 소리쳤다.
“역시 얘기가 통하는군. 나도 알아! 내가 착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 하지만 덴 하울처럼 누명을 씌우는 짓은 안 해. 원래 나쁜 놈 보다 착한 척하는 놈이 더 나쁜 거라고.”
남궁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었다.
“전생에도 그랬지 않아? 덴 하울은 당신이든 아니든 간에 누군가를 누명 씌웠을 게 분명해.”
“…….”
“나와 손을 잡으면 당신이 성물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겠어.”
“그래서 네가 얻는 이익은?”
“그거야 회귀자인 당신이라면 잘 알 테지. 지금 전 세계에 소환된 16개의 던전의 의미를 말이야.”
그녀는 눈을 빛내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성물을 완성시키면 위상의 힘을 쓸 수 있는 신전을 소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 계시자 중 한 명을 제물로 바치면, 승패와 상관없이 나머지 위상들의 신전도 소환 시킬 수 있지.”
그녀의 말에 남궁의 의혹은 확신으로 변했다.
‘에이라 미쉘은 분명 만신전에 대해서 알고 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5번째 문을.’
“욕심 부리지 않겠어.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퀘스트의 보상은 당신이 가져. 절대로 손해 볼 일은 아니잖아?”
그녀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미래를 겪어 알고 있는 남궁과 그녀의 입장은 분명 다를 것이다.
‘위상이 스스로 미래를 언급하는 것은 규율에 어긋나는 행위다. 위상은 절대로 손해 보는 짓을 하는 족속들이 아냐. 리스크를 안고서까지 이런 일은 벌였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텐데…….’
하지만 부족하다.
이 정도 일을 벌이는 것치고는 에이라 미쉘이 얻을 보상이 너무나 약했다.
‘뭔가 더 있는 게 분명해.’
그것이 남궁이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응?”
“미풍의 어머니가 사계절의 방랑자의 계획을 읽고 선수를 쳤다는 것까지는 좋아. 그런데 그걸 과연 사계절의 방랑자가 몰랐을까?”
남궁은 천천히 그녀를 훑듯이 바라봤다.
“전설급 퀘스트는 네 말대로 단 한 번만 내릴 수 있을 만큼, 신중해야 하는 것이야. 그런데 그런 걸 다른 위상이 알게 둔다?”
저벅- 저벅- 저벅-
남궁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나라면 절대로 자신의 계획을 다른 자가 알게 하지 않을 것 같은데.”
“뭐…… 위상의 일이야 내가 어찌 알겠어. 하지만 좋은 명분 아냐? 어차피 한 명은 죽어야 한다면, 누명을 씌우려고 한 덴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면 되니까. 안 그래?”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스르릉-
남궁의 검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아무리 봐도 수상하단 말이야.”
“뭐, 뭐가?”
“네 말대로 전생에 덴 하울은 설귀산에서 누군가에게 누명을 씌웠지. 그 대상은 알렉 트라만이었다.”
“……!!”
그녀는 남궁의 말에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 당시 5번째 문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열렸어. 열악한 환경이었지. 하지만 흐른 시간만큼 살아남은 사람들의 실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았다. 너희 계시자들도 마찬가지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당시 설귀산을 공략하는 데 투입된 인원은 100명. 그것도 고작 특수부대 출신의 허접한 녀석들이 아닌, 진짜 능력자들이었다.”
남궁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 100명의 죽음으로 인해 알렉 트라만은 누명을 쓰고 말았지.”
꽈악-
그의 손가락이 간신히 상처를 치유한 에이라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아악!!!”
“내게 누명을 씌우려면 적어도 그 10배는 희생양이 돼야지.”
남궁은 손가락에 좀 더 힘을 주었다.
“그런데 고작 내게 누명을 씌우려고 준비한 희생양이 다섯이라고? 왜 그럴까?”
꿀꺽-
살벌한 남궁의 눈빛을 본 순간, 그녀는 고통도 잊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네 광신술의 수준이 아직 거기까지밖에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남궁으로 인해 빠르게 공략된 지옥문들.
단축된 시간만큼, 계시자들의 실력이 아직 낮은 수준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으, 으흑…….”
손가락이 어깨의 살점을 점점 파고들기 시작했다.
“덴 하울이 받은 그 퀘스트.”
남궁은 다섯 손가락이 파고든 어깨를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처음부터 가짜지?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미풍의 어머니께서 사계절의 방랑자가 꾸민 계획을 알고 언질을 주신 거라고!!”
“아니. 계획을 안 게 아냐. 당연히 알고 있었던 거지. 왜냐면 전생이든 지금이든…… 애초에 모두 미풍의 어머니가 꾸민 일이니까.”
“크윽……!!”
“덴 하울은 내게 퀘스트를 받았다고 한 아니라, ‘퀘스트가 있다’고 했었어.”
그래서 덴이 아닌 백악관의 수뇌부들에게 퀘스트를 준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사계절의 방랑자는 어째서 자신의 계시자가 아닌 엉뚱한 자들에게 퀘스트를 내렸을까.
“엉뚱한 자들에게 내릴 수밖에 없었던 거지. 덴 하울에게 직접 퀘스트를 내렸다면 그가 의심을 했을 테니까. 그렇기에 위상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에게 퀘스트를 준 거야.”
“그, 그럴 리가……!! 내 위상이 왜 남 좋은 일을 시킨다는 거야? 단 한 번밖에 내릴 수 없는 귀한 퀘스트를……!!!”
“퀘스트는 빼앗을 수 있으니까. 안 그래? 미풍의 어머니가 네게 말해줬을 텐데.”
“그게 무슨…….”
그 순간, 에이라 미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백악관의 수뇌부들은 이미 죽고 사라진 지 오래겠지. 당연하겠지만 사라진 퀘스트는 네가 돌려받았을 테고.”
남궁은 말했다.
“흠, 이 자리에서 널 죽여볼까? 그럼 알 수 있을 텐데.”
“노, 농담도…….”
“모르긴 몰라도 백악관은 초토화 되어 있겠지. 나와 손을 잡겠다고 한 이유도 입막음을 위한 것이겠지?”
이런저런 부정을 하던 그녀도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설귀산에서 돌아오면 덴이 백악관에서 벌어진 사태를 알아차릴 테니까. 그 전에 그를 처리하고 싶었겠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어떤 경우의 수를 떠올려도 그를 납득시킬 만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빌어먹을.’
동시에 지금껏 자신에게 행했던 모든 고문들이 떠올랐다.
남궁은 자신의 목을 정말로 벨 수 있는 인간이다.
“덴 하울과 백악관이 네 손에 놀아난 거야 내 알 바 아냐. 하지만 나를 이용해서 손 안 대고 코 풀 생각을 한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오싹-
에이라 미쉘은 밀려오는 공포에 당장에라도 일어나려 했지만,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다리에 힘이 풀려 자꾸만 고꾸라졌다.
“그, 그럼……!!”
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제 퀘스트도 드리죠!! 당신 말이 모두 맞아요. 미풍의 어머니께서 이번 일을 꾸미시긴 했습니다.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한 것도 죄송합니다. 하지만……!!”
에이라는 그 어떤 핑계도 대지 않고 솔직한 심정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듯,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남궁을 향해 빌었다.
“앞으로 더 많은 문이 열릴 거예요. 성물의 완성자가 1명인 것보다는 제물을 바치고 7명이 되는 게 미래를 위해 더 나은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하지만 스스로 제물이 될 사람은 없을 테고, 누군가는 제물을 선택하는 데 총대를 메야 해요. 저는 당신들이 하기 싫어하는 잔혹한 일을 대신 하려는 거라고요!!”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 그렇죠?”
“그럼 이건 어때. 이왕 총대를 멜 생각을 했다면 말이야.”
남궁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네가 제물이 돼라.”
……딸꾹.
에이라 미셀의 어깨가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