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자, 잠깐……! 세계수의 지팡이는 요정족의 보구입니다. 그런데 조건을 더 올리다니요!
남궁의 말에 여왕은 당혹스러운 듯 소리쳤다.
-계약자 한 명을 얻기 위해 보구를 내어놓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인데……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것인지요.
“계산은 바로 해야지. 계약자 한 명? 그게 아니지. 멸족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얻는 거다. 게다가 지팡이는 1년 뒤 돌려주기로 했으니 너희는 아무런 손해도 아니잖아?”
-그, 그건…….
“그렇다면 지팡이 하나는커녕 가진 보물을 다 내놔도 모자라지. 안 그래?”
여왕은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 못했다.
“멸족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최고의 자질을 가진 마법사가 너희와 함께하려는 것이다. 그야말로 전화위복이지.”
-……뭘 원하십니까.
그녀는 더 이상 남궁과 언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듯 먼저 제안을 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보구나 무구를 달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 그렇다면 다른 일족에서 들고 일어서겠지.”
-퍽이나 감사하네요.
여왕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빠, 너무 그들을 몰아세우지 마.”
그때였다.
잠들어 있었던 소민이 깨어난 듯 낮게 하품을 내쉬며 말했다.
“아빠는 꼭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재우려고 하는 것 같아. 결국 계약을 맺을 사람은 난데 그런 식으로 여왕님을 대하면 불편해서 어떻게 해?”
-하. 하하…… 아닙니다. 소민 양이라 하셨죠? 반갑습니다. 저는 요정족의 여왕, 메멜이라고 합니다.
여왕이 오히려 남궁의 눈치를 보면서 황급히 소민을 말리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남궁 님은 잘못이 없으십니다. 저희가 오히려 부탁을 드려야 할 입장인걸요.
“흐음…… 정말요?”
-그럼요. 그럼요.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지요.
[와…… 천하의 페어리 퀸을 이런 식으로 구워삶을 수도 있다니. 남궁 님, 진짜 존경합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규류는 슬쩍 남궁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귓속말을 했다.
“악역은 내 역할이고 이제부터는 소민이가 할 일이지.”
남궁은 달라붙는 규류를 떨궈내며 말했다.
“그럼 됐어요. 이제는 저와 얘기를 해요. 아빠가 뭐라 해도 저와 요정족의 유대가 중요하죠. 만약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말씀대로 전 한국을 떠날 생각은 없으니까.”
‘다 듣고 있었군.’
딸의 말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말씀 마시지요. 저희가 더 환영입니다. 전설급 마력 자질을 가진 것도 모자라 사상 마법이라니…… 요정들만큼 영체를 다루는데 뛰어난 종족도 없지요.
여왕은 슬쩍 남궁을 본 뒤 소민에게 말했다.
그 순간 남궁은 검지와 중지를 펼쳐 자신의 두 눈을 가리켰다가 그녀를 가리켰다.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
혹은 알아서 하라는 의미.
여러 가지 의미가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는 그의 제스처에 여왕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차분히 얘기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아직 1차 경매가 끝나지 않은 일족들도 있고…… 아! 그래, 지팡이를 보시러 가시죠. 마음에 드실 겁니다.
여왕은 손뼉을 치며 3명의 대귀족들에게 손짓을 했다.
솨아아악---!!
4명의 요정들이 동시에 주문을 읊조리자 주위의 풍경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여긴…….”
호숫가가 보이던 풍경은 사라지고 울창한 숲속에 나무뿌리로 만들어진 동굴 하나가 보였다.
소민이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와…… 여왕이 직접 인간을 요정계로 초대하다니. 이거 진짜 오늘 일 났네요.]
-인간은 상관없어. 냄새나는 야차가 이곳에 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지.
[어이쿠, 그러신가? 어쩌지? 왔는데? 낄낄낄.]
규류는 얄밉게 입을 가리며 넬랴를 향해 웃었다.
딱-!!
[……켁!!]
남궁이 그런 그의 정수리에 꿀밤을 꽂았다.
“얌전히 있어라.”
-ĦĿغŦŊ…… ϪØυ!!
규류가 그의 눈치를 살피는 동안 여왕이 주문을 외웠다.
“소민아. 혹시 저 주문도 알아들을 수 있어?”
“응. 주문이라고 하기엔 별거 없는데? 그냥 화원의 문이여, 열려라, 라고 하는 거야.”
-말도 안 돼. 아무리 마력의 자질이 대단하다고 해도 요정족의 고어를 이해한다고?
그녀의 옆에 있던 넬랴가 깜짝 놀란 얼굴로 소민을 바라봤다.
“그쵸? 점점 더 마음에 들죠?”
-하, 하하…… 그러네요.
가장 먼저 거절 의사를 밝혔던 넬랴는 어색하게 웃으며 소민에게 대답했다.
-사상 마법을 익힐 수 있다는 건 영혼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이니까. 사실 마력의 자질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사상술 때문에 지팡이를 빌려 드리는 겁니다.
쩌적…… 쩌저저적…….
여왕의 주문이 끝나자 뿌리 덩굴로 가려졌던 동굴의 입구가 나타났다.
끼이익…….
그 안에 있던 나무 문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쇠가 풀리며 문이 열렸다.
-들어오시죠.
여왕의 인도에 따라 남궁들은 보고의 안으로 들어갔다.
“우아…….”
동굴의 입구는 작았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처럼 거대한 공동(空洞)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빼곡하게 말린 약재와 포션부터 각종 도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많은 아이템들이 무색하게 그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요정족의 보구.
“세계수 지팡이.”
남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동의 중앙에 세워진 지팡이는 두 개의 줄기가 서로 나선으로 얽혀 있었고 끝에는 청옥(靑玉)이 박혀 있었다.
“엄청나군…….”
외관으로 보면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지만 아이템의 정보를 본 순간 모두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넘버링 6.
이름 : 세계수 지팡이
등급 : 레전더리(최초)
▶ 요정계를 구축하는 요정족의 보구.
▶ 사용자의 마력을 증폭시킨다.
▶ 마법 시전 시 마력 소모가 줄어든다.
▶ 1등급 실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 제한 : 하루 1회
▶ 지팡이의 청옥 속에는 요정족의 마법이 담겨 있다고 전해진다.
▶ 지팡이에게 인정을 받으면 특별한 요정과 만날 수 있다는 풍문이 있다.
과연 레전더리답게 빼곡하게 여러 가지 효과들이 붙어 있었다.
‘마력 증폭과 마력 소모가 동시에 있는 아이템은 거의 없는데…… 거기에 요정족의 마법이라.’
남궁은 역시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이다.’
고작 2번째 문이 끝난 시점에서 레전더리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는 건 계시자들과의 격차를 단번에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단순히 계시자들을 따라잡기 위함이 아니었다.
‘1등급 실드 마법이면 현시점에서는 알렉 트라만이라도 뚫을 수 없을 거야.’
지금 소민이 착용하고 있는 【고블린 로드의 팔찌】의 실드 마법은 5등급이었다.
잔몹들이라면 모를까, 사실 5등급의 실드 마법은 보스전에서 쓰기엔 터무니없이 약했다.
하지만 1등급 실드라면 다르다.
비록 1번뿐이긴 하지만 절제절명의 위기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치트와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것이 꼭 마물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말이다.
“특별한 요정이 뭐예요?”
하지만 그와는 달리 소민은 지팡이의 설명 가장 마지막 옵션을 더 눈여겨본 듯 보였다.
-말 그대로 특별한 요정입니다. 대대로 지팡이를 수호하는 왕족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이나…… 저희도 잘 모르겠군요.
여왕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어떠신가요. 마음에 드시나요? 처음 제안처럼 1년 동안 지팡이를 빌려 드리죠. 그리고 만약에 정령목을 대신하는 방법을 또 찾게 된다면,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지팡이를 쓰셔도 좋습니다.
꽤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건 거의 지팡이를 주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까.
“이 정도의 보상을 마다할 이유가 없죠. 저라도 괜찮다면 저는 도움을 받고 싶어요.”
-좋습니다.
소민의 대답에 오히려 여왕이 서둘러 그녀와 계약을 하려 분주했다.
조르디를 잃은 지금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틀림없었다.
우우우웅…….
여왕이 눈물을 머금고 공동 안에 있는 지팡이의 위에서 손을 젓자 지팡이가 천천히 분리되어 점차 크기가 작아졌다.
-조, 조심해서 다뤄주시길…….
꽈악-
날아온 지팡이를 소민이 움켜잡았다.
화아아악!!
그러자 그녀의 주위에서 날카로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어?”
바람은 서서히 색깔을 갖추며 다시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
그 광경에 여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위그…… 라시온?
마지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숭고하다는 듯 조심스러웠다.
“그게 누구지?”
-세계수의 요정. 그녀는 최초의 요정이자 요정족의 시초입니다.
파앗---!!!
“꺅!!!”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형상을 이루려던 바람은 순식간에 풍선이 터지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딸꾹-
사정없이 뻗어 엉망이 된 머리가 된 소민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 세계수의 지팡이가 사용자와 함께 하길 원합니다.
▶ 사용자의 역량에 맞춰 세계수의 지팡이의 능력치가 하향 조정됩니다.
“바, 방금 뭐였어요?”
-아무래도 지팡이가 당신을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그럴까요? 지팡이의 모습이 바뀌었어요.”
소민은 여왕의 대답에 조금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키에 맞춰 작아진 지팡이는 처음과 달리 조금 빈약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아직은 지팡이의 힘을 모두 끌어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니까. 언젠가 그녀를 만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여왕의 말에 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새로운 계약자가 마음에 드나?”
남궁이 물었다.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네요. 남궁, 아무래도 당신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여왕은 넋을 놓고 소민을 바라보는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저희가 당신들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 처지였군요.
우우우우웅……!
그때였다.
여왕이 손을 들어 올리자 3명의 대귀족을 필두로 수많은 요정들이 소민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요정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그것은 요정족에게 인정을 받아 마땅한 자격을 갖춘 것이니까요.
“이건……?”
수백의 요정들의 날갯짓 소리가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저희가 몰라 뵀습니다.
착-!!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한순간에 멈췄다.
작은 요정들이 그녀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요정족은 이제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여왕이 말했다.
* * *
[이제 야차와 요정족은 대리 경매에서 빠지게 되겠군요. 다른 일족들이 난리를 치긴 할 텐데…… 뭐, 그 정도는 여왕께서 알아서 하실 수 있겠죠.]
-다른 이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려 하지 말게. 누가 무휘의 자식 아니랄까 봐 욕심이 많군.
[클클. 죄송합니다. 팔각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같은 배를 탔다는 걸 자꾸 깜빡합니다요.]
규류는 여왕의 말에 히죽거렸다.
넬랴가 차원문을 준비하는 것을 소민이 구경하는 사이, 남궁은 따로 여왕을 만났다.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면 저는 다른 일족에게 통보를 하겠습니다. 계약자를 먼저 선점한 대가로 아마 야차와 요정은 많은 것을 내어 놓아야 할 겁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다. 규류, 너도 가서 넬랴를 도와.”
[네입, 알겠습니다요!!]
규류가 경레를 하며 떠나자 여왕이 남궁을 바라봤다.
-거래는 이걸로 되었습니까?
“그럼?”
-철두철미하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유한 부분도 있으시군요.
“무슨 뜻이지?”
남궁이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여왕이 오히려 그를 붙잡았다.
-지팡이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남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었지. 그런데 딸이 당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말라고 해서 말이야. 없던 일로 하지.”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제가 한 가지 정보를 드리는 건 어떨까요. 당신에게 빚을 지워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내게 빚을? 멸족할 미래도 알지 못하던 너희가 내게 빚을 질 만큼 대단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 순간 여왕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미래를 알고 있죠. 하지만 그 미래엔 저희가 없었을 테니…… 어쩌면 그 미래엔 영원히 알려지지 않았을 정보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뭐지?”
그녀는 남궁의 손목을 가리켰다.
-우(无)를 만났군요.
“……?!!”
생각지 못한 그녀의 말에 남궁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차 싶은 생각에 고개를 돌렸지만 여왕은 이미 그의 감정을 읽고 말았다.
“네가 우(无)를 안다고?”
-그렇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군. 위상조차 우(无)에 대해서 명확히 알지 못했어. 그런데 그 아래의 대리자 일족인 너희가 우(无)를 안다고?”
여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상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들은 전능(全能)하지만 전지(全知)하지는 않으니까요.
그 순간 남궁은 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처음 회귀를 하던 당시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얘기를 그녀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상의 유일한 허점.
그렇기에 그는 지금 그 부분을 집요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저희는 위상의 명령을 받들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아래에 있는 자들이 아니니까요.
“무슨 뜻이지?”
그녀가 말했다.
-대리자 일족은 우(无)에게서 태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