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이거…… 이러면 곤란한데.]
늦은 새벽.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북적거렸던 세빛섬의 입구엔 남궁과 소민 두 사람뿐이었다.
우우우웅…….
룬과 무구를 얻을 수 있는 세빛섬과 가빛섬 두 곳은 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원래를 투명한 창으로 되어 있는 섬의 인공물이었지만 지금은 밖에서 볼 수 없도록 불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페인트칠을 해서 가린 것이 아닌 알 수 없는 이형(異形)의 힘으로 아예 건물 자체가 바뀐 것이었다.
‘그러니 저 건물 안에 수천 명이 들어가도 가능하겠지.’
아마도 내부 역시 보이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이른바 던전화.
기존의 건물이나 지형이 위상의 힘에 의하여 변하는 것을 뜻한다.
[두 섬을 거치지 않고 바로 솔빛섬으로 가겠다고? 과연 규류가 흥미를 가질 만하네. 이런 발칙한 생각을 또 누가 하겠어.]
그리고 모두가 사라진 이곳에서 남궁은 다시 현류의 앞에 섰다.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고?”
던전화가 되어 건물이 변했다는 것은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과도 같다.
[내 말을 못 믿겠다고?[
“너는 저 안에서 룬과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고 했지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남궁은 그런 그를 향해 검지와 중지를 펼며 말했다.
“카니발에서 그 두 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2가지. 야차 보따리와 같은 거래소에서 구입을 하거나 아니면 마물을 사냥해서 드랍 된 것을 얻거나.”
그리고 검지를 접어 중지를 현류의 얼굴에다 들이밀며 말했다.
“혹은 마물을 사냥해서다.”
[…….]
“룬과 아이템을 너희들이 과연 거저 줄까? 아닐걸. 그렇다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 마물은 그럼 누가 죽이지?”
남궁은 차갑게 말했다.
“지금 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무도 모르지. 과연 출구를 열고 몇이나 살아서 나올지 말이야.”
씨익-
그 순간 현류의 입가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너…… 마음에 드는군. 뼈다귀 하나 던져 주면 헥헥거리며 좋다고 몰려드는 멍청한 개들과는 달라.]
솨아아악-!!!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규류를 버리고 나한테 오는 게 어때? 듣자 하니 녀석하고 계약을 맺었다며? 뭐…… 대리 경매가 시작되기 전이니 기껏해야 구두 계약 정도밖에 안 되잖아.]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현류의 얼굴이 남궁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역시…… 알고 있었군.’
현류가 말한 내용은 올림픽도로에서 규류와 만났을 때 했던 두 사람의 비밀 대화였다.
하지만 녀석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상황에선 놈이 규류보다 위계가 높으니까.’
같은 무휘의 자식들이라고는 하지만 1위계와 2위계의 차이는 분명 명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화까지 도청 할 순 없었을 거야. 아마도 공간이 배제되었을 때 내가 사라졌었으니 그걸로 던져보는 것이겠지.’
[그런 건 언제든 뒤집을 수 있지. 어때. 나랑 계약을 맺으면 대리 경매에서 살아남게 해주지. 그뿐만이겠어?]
“아…… 그래?”
남궁은 그런 녀석을 향해 냉소를 지었다.
“솔직히 2위계보다 1위계에게 붙는 게 좀 더 좋을 수도 있겠지.”
[그럼, 그럼. 역시 머리가 돌아가는 군!]
“하지만 네가 직접 나한테 이런 헛소리를 하니 더더욱 네놈과는 거래를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드는데?”
[……뭐?]
“계약자를 장난감 바꾸듯 마음대로 바꾸는 녀석을 내가 어떻게 믿어? 아니면…… 대리자가 되어서 참가자를 방해하려는 수작인가?”
[그게 무슨…….]
“잔머리 굴리지 마. 인간과 계약을 한 게 규류 1명뿐이 아니란 것쯤은 나도 아니까. 너도 아니 다른 야차들도 마찬가지겠지.”
순간 현류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도 후보자를 데리고 왔잖아. 그런데 나와 계약을 하겠다고? 어디서 약을 팔아?”
남궁은 그런 그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 녀석의 계약자로밖에 안 보이는데.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건가?”
동시에 그가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흐, 흐익…….”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옅은 신음 소리.
반쯤 벗겨진 머리와 옷 안으로 튀어나온 뱃살이 두툼한 중년의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나타났다.
“김갑철. 나도 얼굴을 알 정도로 종로 일대의 유명한 부동산 부자라서 방송에도 몇 번 나왔거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현류는 김갑철의 등장에 입을 다물었다.
“룬과 무구의 던전을 건너뛰고 바로 보스를 잡으러 가려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뭔가 믿고 있는 배경이 있다는 의미겠지.”
[억측하지 마라.]
“억측인지 아닌지는 저자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네놈은 인간의 목숨을 하찮게 여길지 모르지만 저자에겐 하나뿐인 목숨이니까.”
스르릉-
그 순간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김갑철의 목 아래로 2개의 날카로운 검날이 보였다.
“사, 살려…….”
영혼 병사들의 것이었다.
“네 말대로 구두 계약으로 대리자들이 팔각 전쟁을 대비한 후보자를 미리 구하는 건 규율에 어긋나는 게 아니지. 어차피 진짜 계약을 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움찔-
마지막 말에 현류의 어깨가 아주 살짝 떨렸다.
“경매의 정보를 미리 알려주는 건 명백한 위반이지. 과연…… 자신의 후보자를 밀어주려고 부정을 저지른 자를 족장이 가만히 둘까?”
[마음대로 넘겨짚지 마라.]
“그러니 이제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꺼져. 너희들이 벌려놓은 판에서 우리끼리 알아서 놀 테니.”
[…….]
현류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남궁을 바라봤지만 화를 삭이는 듯 입술을 깨물며 사라졌다.
“후우…….”
그가 사라지자 남궁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슈우우욱-
동시에 조금 전 영혼 병사들에게 붙잡혀 있던 김갑철의 주위로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고생했어. 소민아.”
“아니야. 그런데…… 이걸로 된 거야?”
놀랍게도 조금 전 영혼 병사들이 검을 겨누고 있었던 김갑철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소민이 있었다.
“응. 현류 녀석도 당황한 모양이군.”
남궁은 소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름 아닌 그녀가 록산느에게 배운 변환계 마법을 사용하여 김갑철의 모습으로 위장을 한 것이었다.
과연 전설급 자질답게, 소민은 드루이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법의 범주 아래 있는 술법을 빠르게 익혔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단시간에 익힌 마법이 완벽할 순 없었다.
“용의주도한 녀석이라서 평상시였다면 확인을 했을 텐데…… 과연 무휘가 무섭긴 무서운가 보군.”
야차 일족의 족장인 초고위계, 무휘는 야차들이 날뛰는 것을 막지는 않았지만 부정을 저지르는 것에는 가차 없었다.
‘대리자 녀석들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지. 놈들도 일족의 수장 자리를 두고 서로 경합을 하고 있으니까. 만에 하나 무휘에게 찍히기라도 하면 자격을 박탈당할 테니 말이야.’
남궁은 그런 무휘의 성격을 이용한 것이었다.
애초에 김갑철은 이곳에 없었다. 이미 솔빛섬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걸로 놈은 더 이상 이 경매에 직접적인 관여를 할 수 없을 거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가자.”
만에 하나 생길 수 있는 변수까지 완벽하게 차단하고서야 남궁은 걸음을 옮겼다.
* * *
“우웁…….”
솔빛섬 안으로 들어가자 코를 찌르는 악취에 소민은 코를 막았다.
“아빠, 이게 무슨 냄새야?”
“마물들의 시체가 타면서 나는 냄새인 모양이다. 아마 김갑철의 짓이겠지.”
입구 주위부터 수북하게 쌓여 있는 새카맣게 탄 마물들을 보며 남궁이 말했다.
꼭 거대한 쇠똥구리처럼 생긴 갑충은 다른 상처는 없이 그대로 불에 태운 것처럼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다른 상처는 없는 걸 봐서는 확실히 김갑철 혼자 온 모양이로군.’
전생에 대리 경매의 8명의 우승자 중 한 명이 바로 김갑철이었다.
그는 야차 일족의 계약자가 되어 현류의 지원을 받으며 종로 일대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거점으로 엄청난 세력을 구축했었다.
‘대리 경매 이후 그는 마장동의 장길수를 잡으면서, 나중에 명훈의 무장수호(護國守護)와 대치한다.’
폭식이라는 능력을 가졌지만 미궁에서 다리 한쪽을 잃은 장길수는 김갑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장동 세력이 김갑철의 산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것은 대한민국의 가장 거대한 2개의 클랜 중 하나인 김갑철의 불야성(不夜城) 탄생의 시작점이 되었다.
“신유진, 상문길, 이원효, 장태호…….”
그의 밑에도 이름을 거론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곁엔 아무것도 없다.
불야성의 수장도 아니며 그 강자들 역시 지금은 없었다.
남궁은 마물의 시체에 다른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지금 그가 철저히 혼자라는 것을 확신했다.
‘제아무리 대한민국 절반을 먹어 치웠던 불야성의 수장이라도 지금은 아니지.’
남궁은 그가 죽인 마물들의 시체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쿵- 쿵- 쿵-
솔빛섬의 입구를 통과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거대한 밀림이 펼쳐졌다.
‘계단의 입구가 여러 개로 갈리던데 아무래도 김갑철과 길이 나뉜 모양이군.’
더 이상 김갑철이 죽인 마물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쿠르르르르…….]
대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커다란 코끼리가 걸어가는 것처럼 바닥을 울리는 육중한 갑충이 보였다.
“버거스터…….”
기다란 뿔이 머리 위에 3개가 나 있고 코뿔소처럼 짧은 다리에, 갈라진 등껍데기 안쪽엔 반투명한 날개가 2쌍 들어 있었다.
‘어째서 저게 여기에……?’
남궁은 마물을 확인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보스 몬스터 같은 위압감.
그런 녀석이 한마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빌어먹을 현류 녀석. 더 이상 방해할 수 없으니 아예 층에 있는 마물들을 바꿔 버린 건가.’
남궁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쯧- 하고 혀를 차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버거스터라…… 저건 내 검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최소 6번째 문이 열리고 나서야 나올 마물이 지금 눈앞에 보이자 그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 왜?”
“응. 저기 저놈들 말이야. 버거스터라고 해. 딱 봐도 심상치 않게 생겼지? 죽이는 것도 어려워. 저 녀석의 껍데기는 엄청나게 단단한데 탄성까지 뛰어나거든. 검이 거의 박히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
“녀석에게도 약점이 있긴 해. 저기 껍데기에 가려지지 않은 관절들 있지? 무게가 워낙 나가다 보니 관절 부분은 오히려 다른 녀석들보다 약해.”
남궁의 말에 소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하다 하더라도 검을 자르는 건 쉽지 않아. 마력을 집어넣어 안쪽에서 터뜨리는 게 효율적이야. 바깥은 단단하지만 껍데기 안쪽의 살점은 무르거든.”
“응. 알겠어.”
“쉽지 않을 거야.”
그동안 소민이 해온 훈련은 마력을 안정적으로 다루는 것이었지 섬세한 컨트롤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그런 감각은 실전을 통해서 익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그 발판이 되어주어야 한다.
“일단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으로 피해를 얼마나 줄 수 있는지 보자.”
“응, 응!”
소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쿠우우우--!!]
남궁이 영혼 병사를 소환하자 버거스터들이 이질적인 힘을 감지한 듯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스. 전방을 부탁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나머지 3명의 병사들이 소민의 주위를 둘러싸며 방어를 했고, 아스만이 달려오는 버거스터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카앙--!!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지만 아스의 도끼가 놈의 뿔에 맞고 튕겨 나갔다.
육중한 몸이 휘청거렸지만, 놈은 기다리지 않고서 그대로 아스를 향해 머리를 휘둘렀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스의 몸이 휘청거렸다.
쾅! 쾅! 쾅!!
아스가 버거스터의 이마를 향해 도끼를 연신 내려쳤다. 하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아스를 밀어붙이며 돌진했다.
쿠웅!!!!
아스가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버거스터의 돌진이 멈췄다.
크득…… 크드드득…….
하지만 놈은 벽 사이에 낀 아스를 터뜨려 버릴 기세로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지금이야!! 놈의 관절을 노려!!”
“……응!!”
소민이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콰즈즈즈즉----!!!!
그녀의 손끝에서 마력이 번쩍이자 아스를 밀어붙이던 버거스터의 머리 위로 붉은 뇌전이 번쩍였다.
[케에엑!!!]
녀석의 비명 소리와 함께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강렬한 빛이 섬 안에 쏟아졌다.
대전에서 그녀가 시전했언 뇌화(雷火)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함.
“아…… 다리 관절을 노린 건데. 어렵네.”
뇌화의 빛이 서서히 사라지자 소민은 머리를 긁적였다.
“…….”
하지만 그런 그녀와 달리 남궁은 오히려 뇌화에 맞고 쓰러진 버거스터의 시체를 보며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쿠웅-
조금 전 아스를 몰아붙였던 버거스터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군…….”
버거스터의 머리가 있어야 할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