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270)

42화

“흐음…….”

남궁은 천천히 눈을 떴다.

문을 통과하는 순간 마치 깊은 해저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퉁– 퉁-

뒤를 돌아보자 문은 사라졌고 단단한 돌벽만이 남아 있었다.

‘과연…… 출구는 없다는 건가.’

남궁은 고개를 돌려 동굴의 외길을 바라보며 이제부터는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널 아스라고 부르마. 괜찮지?”

그는 자신과 함께 문을 넘어온 아스테리온의 사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의 주인이었던 때와는 달리 남궁과 계약을 맺고 영혼 기사가 된 지금은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한다는 게 맞겠지.’

남궁은 그 이유가 자신의 사령술의 레벨이 낮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하데스의 투구를 쓸 수 있었다면 달라졌으려나.”

카니발이 시작되기 전 프리 퀘스트에서 요르에게 얻었던 넘버링 8의 전설등급 보구, 【하데스의 투구】를 떠올리며 남궁이 말했다.

“뭐, 죽었다고 해서 모두 명계의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겠지. 하긴…… 그곳은 사자(死者)에게조차 끔찍한 곳이니까.”

남궁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투구를 아스에게 실험해 봤다.

하지만 투구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쿠웅-

마치 사과를 하는 것처럼 아스는 고개를 천천히 떨구었다.

“널 나무라려고 한 말은 절대 아냐. 너는 미궁 밖을 나가고자 소망했었다. 소망은 삶을 바라는 자들이 가지는 거니까.”

남궁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넌 죽은 게 아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 명을 떠올렸다.

전생에 자신과 함께 666,666마리의 상급 마족을 사냥했던 기사를 말이다.

크르르르…….

그 순간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마치 전생에 퀘스트를 완료하고 이별하던 그때의 울음소리 같았다.

자신 알고 있는 유일한 명계의 존재.

‘아스가 이 투구를 쓰지 못한다는 건 결국 이것을 써야 할 주인은 따로 있다는 뜻이겠지.’

남궁은 전생의 마지막 동료였던 그를 떠올리며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나 역시.”

절대로 죽을 수 없다.

남궁은 아스를 지나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멈춰라.]

남궁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단순히 외부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너는 누군데 이곳에 들어왔는가.]

머리에서 직접 울리는 울림에 남궁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의념을 보낼 수 있는 존재라면 적어도 상급 마족이거나 정령왕 혹은 드래곤 정도일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존재들은 최소 13번째 지옥문이 열리고 난 뒤.

아무리 자신으로 인해 미래가 바뀌어도 최소 수년은 흐르고 난 뒤에 가능한 일이었다.

‘벌써 놈들과 조우할 리가 없는데…….’

남궁은 저 안에 있는 존재가 과연 누구일지 쉽사리 가늠하기 어려웠다.

“…….”

남궁은 과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검은 티켓이 정말 미궁의 보상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물론, 구울왕의 묘터 때처럼 던전의 보상은 전생과 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미궁의 보상은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건 존재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 이질감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야말로 그쪽이 누군지 궁금하군. 나는 미노타우르스의 미공에서 이것을 얻었다.”

그는 티켓을 꺼내 허공에 흔들었다.

“이게 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어. 단지 이게 나를 강제로 이곳으로 소환했다.”

남궁은 주위를 훑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이곳이 란의 둥지라는 것. 지금 나와 대화를 하고 있는 네가 그 란인가?”

[크, 크큭…… 내가 란이냐고?]

오싹-

그 순간, 들려오는 대답에 남궁은 자신도 모르게 살이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온 모양이로군.]

‘퀘스트의 이름은 분명 란의 둥지였다. 하지만 분위기를 봐서 대답을 하는 자는 란이 아니다.’

가능성은 하나였다.

‘란을 죽이고 이 둥지를 차지한 포식자.’

스르릉-

남궁은 천천히 검을 뽑아 쥐었다.

[그새 눈치를 챘나? 사냥개 같은 놈이로구나. 냄새를 잘 맡는 걸 보니 말이야.]

“나는 일곱 뱀의 계시자. 위상이 선택한 자다. 네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상보다 높은 격을 가진 자는 아닐 터.”

저벅- 저벅- 저벅-

그는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헤할 생각이라면 그건 위상에게 이빨을 드리우는 것과 같다는 걸 명심해야 할 거다.”

[위상이라…… 놈들의 장기 말 주제에 특별한 존재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군. 귀엽구나. 귀여워.]

‘위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건 또 무슨 태도일까.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상위의 존재는 분명 8명의 위상들이었다.

최상위 종족이라 할 수 있는 상급 마족, 정령왕, 그리고 드래곤조차 위상에게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남궁은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이곳에 있는 자가 누군지 궁금했다.

* * *

[란의 둥지를 열어? 하하, 과연…… 누가 이런 발칙한 짓을 했을까? 내 허락도 없이 말이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空虛)와도 같은 공간에서 뱀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해. 당신도 알 텐데. 판은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틀어졌다는 걸 말이야. 우리 모두가 시간축이 뒤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어.]

퉁-

그 순간 마치 천장에서 조명을 쏘는 것처럼 한 곳이 밝아졌다.

[그래. 카니발이 시작되고 25년까지. 그 시간을 기점으로 우리는 우리의 기억이 바뀌었다는 걸 알지.]

퉁-

또 하나의 불이 켜졌다.

[누군가 시간을 회귀했다.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어렴풋한 그 기억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었고.]

퉁-

불은 계속해서 켜졌다.

[그건 공정하지 못해. 그렇다면 우리도 처음 계획과는 달리 행동해야지.]

[공정?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반대야. 설사 회귀자가 있다 한들 그것 역시 카니발의 안배일 뿐이다. 그자는 살아남은 거고 이 축제를 다시 즐길 준비가 된 것뿐이다.]

요르가 아니었다.

오히려 회귀자를 두둔하는 그 말에 요르는 살짝 한쪽 눈을 찡그리며 그 그림자를 바라봤다.

[왜? 뭔가 탐탁찮은 점이라도 있는 건가.]

[헛다리짚지 마.]

[회귀자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조금은 남은 계시자들에게도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함일 뿐이다.]

[그래. 미래를 아는 자가 있다면…… 그자가 모르는 미래를 일으키면 그만이니까.]

[가령 카니발이 시작되고 30년이 되었을 때 일어날 일 같은 것 말이야.]

콰앙--!!

순간, 탁자를 내려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조명이 켜진 자리에는 그림자들이 앉아 있었지만 제각각 모습이 달랐다.

[웃기는군. 축제는 시작되었어.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위상들이 개입을 하는 건 규율 위반이야.]

[말을 선택하는 건 각자의 몫이다.]

[열 내지 마. 너답지 않군. 요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여긴 모든 위상이 제약 없이 대화할 수 있도록 얼굴을 가린 그림자 회랑이니까. 사라지고 싶으면 계속해 보든지.]

[키득- 네가? 날? 어차피 누가 누군지 모두 아는데 같잖은 짓이야.]

요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조금 전 말을 건 그림자의 얼굴이 기묘한 미소를 띠었다.

[자자, 너무 서운해하지 말게. 자네의 계시자가 다른 위상의 계시자보다 눈에 띄는 건 사실이니까. 오해일지도 모르지만…….]

[오해가 아닐 수도 있지.]

[저 녀석은 일곱 마리의 뱀보다 더 알 수 없는 속내를 가진 녀석이니까.]

[그래. 그가 회귀자를 품고 있을 지 누가 알겠어.]

화르르륵……!!

그 순간 그림자가 걷히며 요르의 얼굴이 나타났다.

[네놈들이야말로 혓바닥이 길구나.]

그는 굳은 얼굴로 주위를 훑었다.

[조금 전 그림자 회랑이라고 주의를 준 게 당신 아니야? 그런 자가 얼굴을 보이다니.]

[닥쳐. 해와 달의 관…… 아니. 두르가.]

요르는 그림자들 중 하나를 쏘아 붙이며 말했다.

[회귀의 안배도 네놈이 만든 주제에 이런 짓을 벌여? 공평한 기회? 헛소리하고 있네. 네놈의 그 시커먼 속을 우리가 몰라?]

[…….]

[너는 인간을 위한 안배라고 하지만 실상은 너의 계시자가 그 안배로 회귀를 하길 바란 거잖아. 다시 돌아와 모든 걸 독식하게 하려고.]

요르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어쩌냐? 네놈이 고른 계시자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 속이 조바심이 나는 거겠지. 회귀자를 계시자로 둔 위상이 누구지?]

쿵-!

요르가 탁자를 내리치자 두르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림자가 걷혔다.

[그게 내 계시자라 생각하는 거잖아. 새끼야.]

그가 눈썹을 찡긋거렸다.

[뭐, 뭐라고?]

[인간을 위한다는 놈이 회귀자를 찾기 위해 30년 뒤에 있을 계획을 먼저 당겼다고? 이제 막 2번째 문이 열렸을 뿐이다. 그런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진정하게. 우리가 규율을 어긴 건 아니니까.]

[카니발 50년. 우리는 그 사이에 일어날 일을 정하는 것뿐. 순서는 상관없지.]

[왜 그렇게 역정을 내지? 당신답지 않군.]

[설마…… 정말로 자네의 계시자가 회귀자가 맞는 건가?]

꽈악-

요르는 책상을 내려친 손으로 주먹을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나도 모르니까. 내 계시자가 회귀자인지 아닌지 말이야. 그래도 하필 그놈이 있는 곳을 열다니…… 아무리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해도 말이지.]

비소(誹笑)였다.

요르는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이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즐기는 듯 보였다.

[너희들 감당할 자신 있나?]

[겁을 주려고? 웃기지 마. 뭐가 문젠데? 그는 봉인되어 있고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거쳐야 할 관문이기도 해.]

[두르…… 아니, 해와 달의 관망자의 말이 맞다. 그리고 회귀자를 판별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지.]

[그는 시간을 먹고사는 자니까.]

그의 말에 나머지 목소리들은 기다렸다는 득 반박했다.

[내 계시자가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그다음은 너희들의 계시자 중 한 명이 그 의심을 받게 될 거다.]

그는 다른 위상들을 향해 말했다.

[기대해도 좋을 터. 그때 치러야 할 시험은 내가 정할 것이니. 어디, 다음에 보자고.]

[…….]

[…….]

요르의 말에 남은 7개의 그림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퉁- 퉁- 퉁-

대답 대신 하나둘 조명이 꺼지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모습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요르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된 건가.’

그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서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위상들이 너를 시험할 거란 건 예상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너무 나댔단 말이지. 하필 골라도 이곳을 고르다니.]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동굴 속 남궁의 모습이 보였다.

[죽지 마라.]

요르는 턱을 괸 채 남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게 받아내 주마.]

* * *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다르군.”

동굴의 끝에 도달하자 남궁은 수많은 기둥에 묶인 사슬에 포박되어 있는 뭔가를 발견했다.

[클클…… 대단찮은 꼴이지.]

눈앞에 있는 그것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웠다.

어찌 보면 뱀처럼 보였고 한편으로는 사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거인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사람처럼 보였다.

[위상의 계시자라고? 의외로군. 이렇게나 빨리 나를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퀘스트를 받았다.”

말이 안 되는 묘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남궁의 눈에는 정말로 그렇게 보였으니까.

“란의 둥지에 도전하라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너는 란이 아닌 것 같고…… 네 정체는 뭐지?”

[정말로 위상에게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한 모양이군. 몇 번째 문이 열린 거지?]

“이제 두 번째다.”

[……뭐?]

그 순간 뭔가의 형태가 일렁였다.

남궁은 그 모습이 정확히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녀석의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순 있었다.

[두 번째?]

그것은 당혹감이었다.

“그래. 써펀트의 문을 닫고 난 뒤 생성된 미궁의 던전에서 얻은 보상으로 이곳으로 올 수 있는 티켓을 얻었다.”

[말이 안 되는군. 고작 두 번째 문이 끝난 시점에서 이곳에 들어왔다는 말이더냐. 위상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솨아아악--!!

그 순간 검은 연기가 남궁을 향해 쏟아지듯 뿜어졌다.

[아니면 너…… 뭔가 감추고 있는 건가.]

연기 속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분명 말했을 텐데. 나는 퀘스트를 받았다고.”

섬뜩한 안광을 바라보며 남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위상의 꿍꿍인지 아니면 내가 대단해서인지는 상관없어. 중요한 건 퀘스트의 내용이 너를 죽여야 하는 것인지 살려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나와 있지 않았다는 거지.”

그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크, 크큭…… 마치 네가 나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같이 들리는데. 고작 두 번째 문을 끝낸 주제에 말이야. 믿는 구석이 있는가?]

“글쎄.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네가 숨기고 있는 것을 얘기한다면 나도 믿는 구석을 얘기할 수도.”

[자신감 하나만큼은 쓸 만하군.]

남궁은 자신의 몸을 휘감은 연기를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연기는 지독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기분.

[란은 마물의 이름이 아니다.]

연기는 그에게 말했다.

“그럼?”

[위상의 이름이다.]

“…….”

남궁은 그 말에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이곳이 위상의 영역이라는 말인데…… 그럼 넌? 위상의 영역에 있는 네놈은 누구지?”

솨아아악--!

그 순간 연기의 형상이 변했다.

네 발 짐승의 형태였지만 무엇을 닮았는지 표현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위상의 영역을 빼앗은 자겠지.]

주둥이는 길게 튀어나와 있었는데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꽃잎이 갈라지는 것처럼 주둥이가 네 방향으로 갈라졌다.

“……란은 어디에 있지?”

[어디 맞혀봐.]

놈은 남궁의 앞에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말했다.

[놈이 어디에 있는지.]

당장에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이 공포스러운 놈의 입을 보며 남궁은 차갑게 웃었다.

“재밌는 새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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