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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270)

15화

“하아, 이형(異形)의 왕이라니…… 설마 팔각전쟁까지 아시는 겁니까. 이거 완전 소름 돋네.”

규류는 자신의 팔을 쓸어 넘기며 몸을 떨었다.

팔각전쟁(八角戰爭).

대리자 일족들끼리 권좌를 두고 싸우게 될 전쟁.

하지만 아직 먼 얘기라 생각했던 그 이름을 벌써 듣게 되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모를 리가 없지. 내가 그 지옥의 마지막 생존자였으니까.”

“아무리 회귀자라 해도 이거 너무 다 아는 것 아니십니까. 특전도 이런 특전이 없네.”

“배부른 소리 하지 마. 이쪽도 리스크를 가지고 하는 거니까. 아직은 내가 회귀자라는 것을 모르지만 곧 놈들이 알게 될 거다.”

그렇게 되면 분명 나머지 팔무성들은 남궁을 방해하려 수단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생존을 내걸지만 결국 그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 영웅의 환상에 빠지게 될 뿐이었다.

‘대리자 일족들이 자신들끼리 경합을 벌이듯, 결국 팔무성도 자신의 이권을 위해 다투게 된다.’

그가 회귀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의 화살이 가장 먼저 자신을 겨눌 것이 분명했다.

그 전까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득을 가져가야 한다.

알게 된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힘을 가지는 것.

남궁은 그것이 놈들을 상대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것도 그러네요.”

규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패를 거는 건 네 마음이지만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니야. 불안하다면 됐다. 나는 나대로 방법을 찾을 테니.”

“자, 잠깐!!!”

남궁이 공간을 벗어나려 하자 규류는 다급히 소리쳤다.

“계약하겠습니다!”

그의 외침에 뒤돌아선 남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좋다.”

“뭐…… 아시겠지만 대리자 일족의 계약은 3번째 문이 열리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이렇게 계약자를 선택하는 건 사실 규율 위반이기도 해서…….”

“당장 계약서를 쓰자는 것은 아냐. 단지 네 심장 보따리를 한 번 열기만 하면 된다. 그 정도는 재량으로 할 수 있을 텐데.”

“뭐…… 좋습니다. 까짓거 저도 모험 한번 하죠. 남궁 님 말씀대로 도박을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요.”

그는 결심한 듯 말했다.

“이제 알겠거든요. 처음 만나자마자 제 진명을 알고 계셨던 것도 그렇고…… 본능적으로 오싹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 말이죠.”

“뭐라고 생각하는데?”

“전생에서도 저와 계약을 맺으신 거군요. 안 그렇습니까?”

“뭐, 비슷하다.”

“……여튼 이번 일로 족장님께 오지게 욕을 처먹겠네요.”

“걱정 마. 죽진 않을 거니까. 누가 뭐라 해도 현 족장의 둘밖에 없는 핏줄이잖아.”

“그래서 더 마음 편하게 죽이려고 할걸요. 현류가 있으니까.”

남궁은 규류의 말에 피식 웃었다.

“자신감을 가져라. 족장은 생각보다 널 높게 보고 있거든.”

“진짜입니까? 혹시…… 그것도 전생에서 보신 겁니까? 아버지께서 저를 인정하셨나요?”

규류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니. 보지 못했다.”

“피이…….”

그의 대답에 규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냥 듣기만 했으니까. 그게 네 아버지, 야차 일족 최고위계인 무휘(武揮)의 유언이었거든.’

사실 남궁이 규류의 진명을 알고 있었던 이유는 그와 계약을 맺어서가 아니었다.

‘사신 그는 네가 일족의 수장이 되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넌 그 전에 죽었지.’

이유는 간단하다.

현류가 관리하던 종로구에 최휘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류가 죽고 난 이후 야차 일족의 차기 수장으로 가장 유력했던 현류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다.

지옥문이 열리고 14년.

그가 지원하던 최휘수 역시 죽고 말았으니까.

바로 남궁의 손에 의해서.

결국 규류와 현류가 죽고 야차 일족이 무너지기 직전, 남은 야차들은 최휘수를 죽인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

남궁은 손바닥을 펼쳐 잠시 바라봤다.

‘……유언은 지켜주마. 무휘.’

아직까지 인간의 피를 묻히지 않은 손이었지만, 그렇다고 깨끗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그는 지그시 규류를 바라봤다.

“뭐 해?”

“……네?”

“보따리 열어.”

규류는 그의 말에 주섬주섬 자신의 가슴을 갈랐다.

쩌어어억……!!

가슴을 가린 후 규류는 손을 집어넣어 여전히 뛰고 있는 자신의 붉은 심장을 꺼냈다.

심장의 한편에는 작은 주머니 하나가 달려 있었다.

“…….”

몇 번을 봤던 광경이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목숨을 걸고 여는 주머니기는 하지만…, 사실 아직 족장님께 아이템은 몇 개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겨우 1번째 문이 열렸을 뿐이잖습니까.”

“상관없어.”

“그럼…….”

규류는 심장에 달려 있던 주머니를 풀어 남궁에게 건넸다.

“저는 나가 일족과 거래를 하고 오겠습니다. 그동안 보고 계시지요.”

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야차의 심장 주머니를 확인하시겠습니까?

파앗-!!

규류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는 진득한 점액이 묻어 있는 주머니를 풀었다.

그러자 보따리를 봤을 때처럼 예의 그 아이템들이 들어 있는 창이 나타났다.

규류의 말대로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단 3개뿐이었다.

넘버링 374810.

이름 : 묘족의 두건

등급 : 매직(최초)

▶ 사라진 일족 중 하나인 묘족이 쓰던 두건.

▶ 두르면 날렵해진다고 한다.

▶ 가격 : 35,000헤드

넘버링 88790.

이름 : 무휘의 칼날

등급 : 레어(최고)

▶ 야차 일족의 족장인 무휘가 유년 시절 사용했던 단검.

▶ 특별한 것은 없으나 날이 예리하다.

▶ 가격 : 50,000헤드

남궁은 목록의 가격을 봤다.

야차 보따리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과는 가격 차이가 심했다.

고블린 로드를 잡고 얻은 헤드까지 합쳐 남궁의 잔여 헤드는 기껏해야 3만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가격이 비싸. 확실히 심장 주머니는 3번째 지옥문이 열린 뒤에나 쓸 수 있게 조정이 된 모양이겠지.’

현재로서는 살 수 있는 게 없었다.

딱 하나만 빼고.

넘버링 없음.

이름 : 빛바랜 기사의 펜던트

등급 : 노멀(최초)

▶ 한때 추앙받던 기사의 성물이다.

▶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이 슬어 훼손되었다.

▶ 현재로서는 특별함을 찾아볼 수 없다.

가격 : 4,000헤드

“…….”

남궁은 주머니 안에서 낡은 펜던트를 꺼냈다.

설명대로 녹이 잔뜩 슬어 있었고 부식도 심해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영락없이 쓸모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실제로도 그렇고.’

4천 헤드를 주고 살 만큼의 물건은 절대 아니었다.

▶ 빛바랜 기사의 펜던트를 구입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민 없이 그것을 샀다.

“구해 왔습니다!”

펜던트를 주머니 안에 넣자, 기다렸다는 듯 공간이 일그러지며 규류가 낡은 주머니 하나를 들쳐 메고서 달려 왔다.

“나가 녀석들. 어찌나 까다롭게 구는지 말입니다. 그래도 제가 살살 구슬려서…….”

“고생했다.”

“아, 넵.”

칭찬이지만 규류는 종알거리던 입을 바로 닫고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민 남궁을 바라보며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여기 있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주머니를 건넸다.

넘버링 없음.

이름 : 늪 해파리의 점액

등급 : 노멀(최고)

▶ 나가 일족이 사는 북쪽 해협 앞에 자리한 검은 늪에 서식하는 해파리의 점액.

▶ 강력한 접착력을 가진다.

“그런데 이걸로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누구 팔다리가 잘린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요?”

“아니. 만약 그랬다면 점액을 살 게 아니라 응급키트를 샀겠지. 뭐, 애초에 그런 부상자를 만들지 않겠지만.”

“하긴, 그러시겠죠. 그럼 어디에 쓰실 생각이신지……?”

차르릉-

촤악!!!

그 순간, 남궁은 조금 전 심장 주머니에서 구한 펜던트 위에 들고 있던 점액을 있는 힘껏 문지르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그러자 펜던트가 닿은 부분의 점액들이 마치 끓는 냄비의 넘치는 물처럼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어?”

남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펜던트를 점액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펜던트를 뒤덮고 있던 녹이 서서히 흘러내렸다.

“이게 어떻게…….”

펜던트 전체를 뒤덮고 있던 검푸른 녹이 사라지자 남궁의 손에는 마치 새것같이 반짝거리는 은색의 펜던트가 있었다.

“됐군.”

남궁은 제 모습을 되찾게 된 펜던트를 보며 만족스러운 고개를 끄덕였다.

규류는 깨끗하게 변한 펜던트의 모습에 깜짝 놀란 듯 멍한 표정으로 남궁을 바라봤다.

“늪 해파리의 점액이 가진 강력한 흡착력은 단순히 뭔가를 붙였다 떼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무구의 녹을 제거할 수도 있지.”

“히야…… 그렇군요. 이런 건 처음 봅니다. 크, 역시 회귀자.”

남궁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며 규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야 전생 덕분에 알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딱히 내가 찾아낸 건 아냐.”

“그럼요?”

“언젠가 알려질 방법이란 말이지.”

그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공방왕(工房王) 만덕수.

‘전생에 나도 꽤나 신세를 졌던 사람이지.’

점액의 용도를 발견한 것뿐만 아니라, 그는 무너진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각종 도구와 생필품들을 만든 장인이었다.

무장공(武裝工)이라 불린 진수혁이 무구 제작에 특화된 자라면 그는 도구 제작의 1인자였다.

비슷한 능력을 가진 자들도 많았지만, 두 사람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 팔무성의 클랜들이 영입을 하려 눈에 불은 켰던 것이 기억난다.

‘생각해 보니 확실히 대한민국에 손재주가 뛰어난 자들이 많군.’

반대로 말하면 이건 기회였다.

‘진수혁과 만덕수와 같은 1인자를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 없으니 다른 녀석들이 오기 전에 그들을 영입할 수 있다.’

남궁은 반짝이는 펜던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넘버링 998(신규).

이름 : 성기사 라울의 펜던트

등급 : 레어(최고)

▶ 과거 최고의 성기사라 불렸던 라울의 성물.

▶ 녹이 깨끗하게 벗겨져 펜던트의 힘이 돌아왔다.

▶ 소지자에게 정화의 힘을 부여한다.

가격 : 550,000헤드

“켁……?! 레어템? 족장님께서 주실 때만 해도 웬 쓰레기인가 싶었는데…….”

“모르는 게 당연해. 기껏해야 넌 2위계의 야차일 뿐이잖아.”

“끄응. 자꾸 위계를 말하지 마십시오. 괜히 현류 그 녀석이 생각나니까요.”

규류는 그의 말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맛보기에 불과해. 일족의 수장이 주는 아이템은 모두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앞으로 미심쩍은 물건을 입수하게 되면 남궁 님께 말하라는 것이군요.”

“맞아.”

남궁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규류는 마치 선생님께 칭찬받은 아이처럼 히죽거렸다.

“그건 그렇고…… 4천 헤드가 순식간에 10배가 넘는 가격이 되었군요. 다시 파시겠습니까? 남궁 님이라면 계약자의 특전으로 10% 추가금을 붙여 드리겠습니다만?”

“아니. 이건 내가 쓸 거야.”

“과연.”

규류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촤아아악---!!!

배재되었던 공간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자 남궁의 눈앞에는 다시금 상처받은 도시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기로군.”

하지만, 도로에 엉켜 있는 차량들과 한강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연기들보다 그를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최초의 던전.”

그는 과거 선유도라 불렸던 작은 섬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울왕의 묘터.”

창그랑-

그 순간,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가볍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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