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70)

12화

▶ 1번째 축제가 막을 내렸습니다.

▶ 생존자 전원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 500헤드가 지급되었습니다.

마치 폭죽을 터뜨린 것처럼 하늘에 붉은색으로 떠 있는 글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음침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이현상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모든 군 병력이 동원되어 현재 마물들은 대부분 소탕이 되었으나 피해가 큽니다.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안전한 집 안에서 방침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정부는…….

부우우우웅…….

하늘에 떠 있는 알림을 바라보던 남궁은 차 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속보를 들으며 액셀을 밟았다.

-교통 속보입니다.

-현재 평택 파주 고속도로 서오산 분기점 파괴로 인해 교통이 불가능합니다.

-영동 고속도로 여주 톨게이트 방면 도로가 파괴되어 운전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중부 고속도로 곤지암 근처 일대 현재 교통이 어렵습니다.

-또한 경찰당국의 도로 통제가 이어지고 있는…….

-다음은 수도권 상황입니다.

…….

다행히 빠르게 고블린 로드를 처리한 덕분에 생각보다 혼란은 적었다.

‘전생에서는 1번째 지옥문이 열리고 난 뒤에 거의 대부분의 통신 회로가 끊겼었지. 뿐만 아니라 도로도 거의 파괴되어 움직이지 못했어.’

기차와 비행기는 혼란으로 이용하기 어려웠지만, 도로의 피해가 적어 남궁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서울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형님. 고속도로를 이용하기 어려운가 봅니다. 국도로 빠져서 가시죠.”

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리도 아니네요. 지금 긴급 기자회견을 시작한답니다.”

안정적이다고 생각하는 남궁과 달리 명훈은 핸드폰으로 대통령의 회견을 보며 말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야. 본격적인 시작은 자정이 되고 난 이후부터일 테니까. 그 전에 서둘러서 서울로 가야 해.”

남궁은 차 안의 시계를 바라봤다.

“자정이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처음으로 이 세계와 제대로 조우하게 되지. 앞으로 계속해서 이번과 같은 문이 열릴 거야. 그 안에서 지금처럼 마물들이 튀어나올 거고.”

꿀꺽-

명훈은 남궁의 말에 긴장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군부대가 움직이면 그래도 괜찮겠죠?”

“역부족이야. 현존하는 화기로 막을 수 있는 마물은…… 기껏해야 3번째까지겠지.”

“그럼…….”

“처음 고블린을 잡았을 때 기억 나? 자정이 되면 대리자 일족이 찾아갈 거라고.”

“아, 네.”

“대리자 일족은 이 빌어먹을 판을 만든 8명의 위상들을 대신해 우리와 거래를 하는 자들이야. 마물을 사냥하고 얻은 헤드로 그들에게서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지.”

“형님, 혹시 그럼 이거도…….”

“맞아.”

남궁은 명훈의 다리 사이에 끼워 넣은 참수검을 힐끔 보며 대답했다.

“이걸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지옥문이 열리는 걸 먼저 아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녀석들을 계시자라 부르지. 나와는 조금 다른 케이스지만…… 어쨌든 놈들은 위상에게 선별되어 이 상황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지.”

“혹시 알렉 트라만이란 사람인가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명훈의 말에 깜짝 놀란 듯 남궁이 되묻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보여줬다.

“하하…… 여기 나오고 있거든요.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핸드폰 액정 뒤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수많은 플래시 세례 속에 한 남자가 단상에 올라 발표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찾아온 이변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미래를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때입니다. 저는…….

‘계시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군.’

남궁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전생의 기억대로 계시자 중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건 알렉 트라만이었다.

‘영국 출신이지만 그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배우니까. 다른 계시자들보다 훨씬 더 파급력을 가지고 있지.’

아직 나머지 6명의 계시자들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지만, 알렉의 등장으로 인해 그들 역시 음지든 양지든 각자의 방식으로 행동을 시작할 것이다.

‘계시자라고 해서 인류의 구원자 같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알렉처럼 대중을 이끄는 자가 있다면 그 반대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대표적인 예가 최휘수였다.

비단 그뿐만 아니더라도 계시자들에게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 역시 특별히 이날을 위해 수련받은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했으니까.

‘테레사의 재림이라고 불리는 팔무성의 성녀(聖女) 에이라 역시 대중의 앞에서와 달리 그 이면 뒤로 손에 묻힌 피는 결코 적지 않으니까.’

쉽게 믿어서는 안 되며 항상 경계해야 한다.

“…….”

25년이란 세월 동안 단순히 마물을 사냥하는 것 이외에도 속고 속이는 줄다리기를 해왔던 남궁은 이제 쉽게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자신에 입맛이 썼다.

“기자회견까지 한 마당에 이제 알렉은 대놓고 구원자 놀이를 시작할 거야.”

전생에도 그는 다른 계시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클랜을 만들었었다.

“영향력이 있는 자니까…… 그만큼 사람들도 선동당하겠군요. 경계해야 할 자라는 뜻입니까?”

명훈은 단박에 남궁의 말 속의 뜻을 알아차렸다.

“녀석은 그나마 계시자 중에 악인은 아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구원자인 양 착각에 빠지지. 나중에 가서는 자신의 클랜을 국가마저 뛰어넘게 만들려고 하거든.”

“형님, 그 뭐냐……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거 있잖습니까,”

“……?”

“혹시 2회차 뭐, 그런 거 아니십니까?”

마치 본 것처럼 미래를 예견하는 남궁의 모습에 명훈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분간은 녀석의 구원자 놀이를 그냥 둬도 괜찮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으니까.”

남궁은 명훈의 물음에 그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럼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별거 없어.”

부우웅--

남궁은 액셀을 밟아 속도를 올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해져야지.”

마물에게도 사람에게도 당하지 않도록.

콰가가가가강……!!!!

그때였다.

화성을 지나 서울을 향해 가던 남궁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차로 튀어나오는 뭔가에 황급히 핸들을 꺾었다.

퍼억!!!

끼이이이익……!!

앞 유리창이 뭔가에 부딪히면서 그 충격으로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소민아. 괜찮아?”

“으응…….”

뒷좌석에 앉아 있던 소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뭐죠? 형님.”

명훈은 어둠 속에서도 금이 간 앞 유리창에 붉은 핏물이 묻어 있는 것을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여기 있어.”

남궁이 주위를 경계하며 차에서 내렸다.

“고블린…….”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차에 부딪힌 것은 사람이 아니라 마물이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녀석들이 있는 건가.’

고블린 로드가 죽었다고 해서 마물들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로드의 죽음으로 마물이 더 이상 생성되진 않겠지만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는 놈들은 있었다.

“거기. 그걸 사람에게 쏠 생각은 아니겠지.”

남궁은 차에 부딪힌 고블린의 머리에 꽂힌 화살을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와 함께, 충격으로 한쪽이 부서진 헤드라이트의 빛 뒤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없었어요! 괴물들이 갑자기 달려들어서…….”

“지금 겨누고 있는 그게 더 위험해 보이는데.”

저벅-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남궁이 발을 떼자, 신기하게도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법한데도 앞의 상대는 단박에 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

양궁에서 쓸 법한 경기용 활을 겨누고 있는 남자는 기껏해야 열일곱, 여덟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

얼굴에는 이런저런 상처가 있었다.

고블린에게 당한 건지 아니면 사람에게 당한 건지…….

짧은 스포츠머리의 학생은 사과를 하면서도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남궁을 경계 했다.

“눈이 좋은 모양이군.”

스르르륵……!!

남궁은 차 앞에 쓰러진 고블린의 시체를 그의 앞으로 밀어 던지면서 말했다.

“이거 네가 잡은 건가?”

“……그렇습니다.”

“잘했다.”

“네?”

“잘했다고. 마물에 뜯어 먹히는 시체를 보는 것보다야 마물의 시체가 백 배는 낫지.”

이제 보니 고블린의 시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혼자야?”

그의 물음에 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활을 썼다고는 하지만 혼자서 고블린을 다섯이나 잡다니.’

남궁은 죽은 시체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모두가 머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꽤 실력이 있는 녀석 같은데…….’

그는 학생의 얼굴을 살폈지만 딱히 기억이 나는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꼬리를 달고 온 모양이군.”

그 순간 남궁이 튀어나가듯 학생의 옆을 지나쳐 달렸다.

화아아악--!!!

그의 등 뒤로 3명의 영혼 병사들이 나타났다.

[켁……!!!!]

[캬아아악---!!!]

어둠 속에서 마물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조, 조심하세요!!”

남궁이 그 소리에 고블린의 목을 베며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슈욱-!!

그 순간 화살 하나가 날아와 그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콰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정확히 고블린의 머리에 박혔다.

[……크륵.]

남궁은 자신의 앞에 쓰러진 고블린의 시체를 힐끔 보고는 그에게 물었다.

‘고블린 시체들이 전부 머리가 꿰뚫린 게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닌 모양이군.’

아니, 솔직히 말해서 놀라운 실력이었다.

“이름이 뭐지?”

“전경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름을 들어도 남궁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클랜이 만들어지기 전에 죽은 건가. 흐음…… 각성하기 전에 이 정도 실력이면 랭커에도 이름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2번째 지옥문이 열린 이후부터 클랜들이 하나둘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1번째 지옥문이 끝난 뒤 자정이 지나 선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각성을 거쳐 저마다 능력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긴 이상한 일도 아니야.’

마법적 자질이 최고 수준인 자신의 딸 역시 지옥문이 열리자마자 죽지 않았던가.

‘앞으로 2시간 정도 남았군.’

남궁은 자정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살폈다.

“그런데…….”

저벅- 저벅– 저벅-

그가 경인에게 다가가려 하자 경인은 황급히 화살을 채웠다.

“경계를 하는 건 좋은 모습이지만, 그걸 계속 당기고 있다가는 팔이 남아 남지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만에 하나 화살이 잘못 날아가기라도 하면…….”

남궁은 차 안을 가리켰다.

“넌 죽는다.”

섬뜩-

경인은 하마터면 남궁의 얼음장 같은 경고에 힘이 풀려 시위를 놓을 뻔했다.

그는 차 안에서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민을 보고는 천천히 활을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죄송하다는 말만 지겹게 듣는군. 딱히 네가 내게 잘못한 것은 없어 보이는데.”

“죄송…… 아, 아뇨.”

남궁의 지적에 학생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려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여긴 인적이 드문 곳인데 어째서 이렇게 멀리까지 온 거지? 방송 못 들었어? 집에 있으라고 귀가 닳도록 나오던데.”

차를 몰고 가고 있던 자신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지만.

“그게…… 서울에 가야 해서요.”

“서울?”

“네. 아버지께서 혼자 계십니다. 그런데…… 연락이 되지 않아서요. 병원에 계시는데…….”

“어떻게?”

“……네?”

“경계령이 내려서 지금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나이가 어려 보이니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닐 테고. 어떻게 서울로 갈 거냔 말이야.”

“자전거로…….”

경인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돌한 녀석이군. 이런 상황에 화성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로 갈 생각을 하다니.”

“형님. 오죽했으면 그렇겠습니까.”

차 안에서 두 사람의 얘기를 듣던 명훈이 나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경인에게 인사를 했다.

“서울은 그래도 피해가 크지 않다고 하는 거 같더라. 너무 걱정하지 마.”

“감사합니다…….”

명훈의 위로에 경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고블린을 잡았으니 알림을 들었겠지. 아직은 정부 지침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라서 그렇지만 자정이 지나고 대리자 일족들이 나타나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거다.”

남궁이 말했다.

“도로 전역이 통제되거나 폐쇄 될 거야. 차로 가는 것도 빠듯한데 자전거로 가는 건 사실 불가능해.”

“그, 그럼 어쩌죠?”

“돌아가.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더 이상 얘기할 것이 없다는 듯 남궁은 차로 돌아서려 했다.

“서울까지 데려다주시면 보답을 하겠습니다!”

그 순간, 다급해진 경인이 남궁에게 소리쳤다.

“보답? 글쎄. 네가 딱히 내게 보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이걸 드릴게요. 사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늘에 문이 열리고 난 뒤에 얻은 겁니다.”

경인은 주머니 안에서 작은 돌을 하나 꺼냈다.

“이게 뭐야?”

명훈은 보잘것없는 시커먼 돌을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경인을 바라봤다.

“……돌멩이? 이 녀석아. 내가 형님께 잘 말씀드려 보려고 해도, 이런 걸 주면 나라도 기분 나빠서 안 하겠다.”

하지만 핀잔을 주는 그와 달리 남궁은 경인의 손에 있는 작은 돌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너…… 이거 어디서 구한 거야?”

시커먼 돌에는 알 수 없는 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지금 나올 리가 없는데……?’

룬(Rune)이었다.


0